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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족이 되는 시간 Jul 28. 2023

평범한 위탁가족입니다

프롤로그

   

  무지는 폭력입니다. 사람을 찌르고, 넘어뜨리고, 죽이죠.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무지, 당신 안에 있는 무지가 누군가를 찌르고, 넘어뜨리고, 죽였을지 모릅니다. 상대는 정신을 잃고, 속이 까맣게 타 죽었을지 모르죠.

“위탁부모요? 돈을 많이 받나요?”


 위탁부모가 된 지 9년 차, ‘가정위탁제도’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밖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습니다. 제도도 모르고, 위탁부모의 삶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요.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돈(양육비, 수고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서, 걱정돼서 묻는다고는 했지만 그건 분명 폭력이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어서, 무지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이젠 알아가고, 협력해 달라고 애원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몰랐어!”라는 말로 넘어가기엔 잔인한 무지였습니다. “어머, 진짜 몰랐어!” 하면서 해맑게 웃었나요? 무지를 모르는 무지가 더 깊고 아팠습니다. 묻지도 않는 무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시작점을 찾기도 어려웠지요.


 국가의 무지도 한몫했습니다. 한 가지만 얘기해 볼게요. 위탁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쓴 돈을 일일이 증빙해야 합니다. (위탁아이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거든요.) 위탁부모는 아이 물건을 살 때마다 영수증을 꼭 챙겨둬야 합니다. 가족끼리 마트를 가도 아이 영수증은 따로 받아둬야 하지요.


 일반 가정에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위탁부모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무지’가 위탁부모들에겐 ‘폭력’과 상처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거겠죠. 세금이니 영수증 처리는 당연하다고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해요. 왜 비혈연 관계인 일반위탁 부모와 전문위탁 부모에게만 요구하는 걸까요? 누구를 위한 걸까요? 이 방법밖엔 없을까요?


 국민신문고, 보건복지부, 국가인권위에도 민원을 넣어봤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 신문에도 제보하고, 뉴스로도 방영이 됐지만 달라진 건 없었어요. ‘변화의 의지가 있는가?’ 국가에 되묻고 싶을 만큼 고요하고, 평안했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시민들의 무지와 폭력은 당연하겠지요.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혼자 찾아보고 배워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정위탁제도’가 도입된 건 2003년입니다. 올해로 20년이 됐어요.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된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낯선 제도고, 여전히 홍보에 주력하고 있어요. 입양제도는 초등학생들도 다 알잖아요. 가정위탁제도는 20년째, 제도 알리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도’의 문제입니다. 20년 동안 제도조차 알리지 못했다는 건, 위탁가족들이 부글부글 민원을 제기한다는 건, 일반 시민들이 무지로 인한 폭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건, 위탁부모들 조차 자신이 위탁가족인 걸 숨기고 갈등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그러다 포기한다는 건…, 제도의 문제입니다.


 가정위탁제도는 위탁이 필요한 부모와 아이, 위탁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위탁가족들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제도의 중심엔 ‘사람’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행정’을 두면 어떻게 될까요?


 영수증 증빙은 사람을 위한 겁니까, 행정을 위한 겁니까? IT 강국에서 종이 영수증을, 그것도 6개월 치를 모으라니요. 영수증 글씨는 휘발돼 잘 보이지도 않는데요. 그걸 모으고 주민센터에 가져가는 수고는 당연한 건가요? 

 

 위탁부모들에게 영수증은 단순한 영수증이 아닙니다. ‘시선’, ‘방향’의 문제예요. 위탁부모들은 아이를 만나고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데 그 평범한 일상을 업무로 바라보고, 일일이 영수증을 모아, 증빙 서류를 첨부해서, 제출하라니요.


 관리 감독의 의무를 위탁부모에게 떠넘기는 건 아닌가요? 연말정산처럼 한 번에 할 순 없나요? 이렇게 짐을 지우면 누가 위탁부모로 자원할까요? 국가는 2024년까지 위탁부모 비율을 37%로 확대한다고 했는데…, 가능할까요?

 

 꽃샘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는 건 봄이라 생각했는데 겨울바람이 불기 때문이지요. 위탁부모는 한 아이를 품고 서로 사랑하고, 아이가 크는 기쁨을 누릴 거라 믿으며 육아를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따뜻한 봄을 기대했죠. 그런데 현실은 꽃샘추위였습니다. 겨울보다 더 추운.


 지금까지 가정위탁제도는 위탁부모들의 선한 마음에 기대어 연명해 온 게 사실입니다. 이제는 바뀌어야죠. 제도가 제도로서 다듬어지고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보는 눈이 필요하고, 듣는 귀가 필요합니다. 한낱 민원으로는 그 눈도 귀도 열리지 않는 것 같아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봅니다. 언제쯤 그곳에 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때, 참고 자료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야겠지요.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순 없어도 감쌀 순 있을 테니까요. 애초에 바위를 깨는 게 목표는 아니었으니까요. 던지고 또 던져서 바위를 감싸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세요. 읽고 전해주세요. 민원이 커지면 국가는 움직입니다. 표가 몰리는 곳에 관심을 두니까요. 비혈연 가족이 어떻게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이 되는지, 어떤 벽을 허물고 재건해야 하는 건지 읽고 퍼뜨려 주세요.


 활자와 활자 사이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봐 주시고요. 단락과 단락 사이에서 숨 한번 고르시고요. 이야기가 끝나면 무지로 인한 폭력은 없었는지 돌아봐 주세요. 마음이 따뜻한 예비 위탁부모들에게 추천해 주시고요. 


 내가 낳은 아이, 네가 낳은 아이. 경계를 긋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도록 너른 양육을 부탁드립니다. 내 아이는 이웃의 아이와 영향을 주고받잖아요. 내 아이가 잘 자라려면 이웃의 아이도 잘 자라야 하잖아요. 


 모두가 위탁부모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될 수도 없고요. 위탁 이모, 위탁 삼촌, 위탁 언니, 위탁 오빠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긍정과 애정을, 칭찬과 응원을 해주는 따뜻한 ‘이웃’ 말이에요. 


 적어도 이 책을 펼친 여러분들은 가정위탁제도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함께 나누는 이웃이 되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웃으로서 어떻게 지지해 줄 수 있는지 여기에 세세히 적어놨어요. 보호가 필요한 아이에게 부모가 되어 주기로 선택한 건 위탁부모들이지만, 지지하고 응원하는 건 여러분의 선택이에요. 가장 보람 있는 협력이고요.


 부탁드립니다. ‘대단하다’는 말보다는 ‘그랬구나!’ 공감해 주세요. “저도 함께하고 싶어요.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물어봐 주세요. 멀찍이 떨어져서 쳐다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한발 가까이 다가와서 공감해 주는 이웃이 되어 주세요. 


 아이를 만나면 칭찬해 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긍정해 주시고, 잠시 놀아도 주시고, 간식도 주시고…. 그런 이웃이 절실합니다. 지금은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우아하게 중립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고 돕는 이웃이요.


 위탁가족들이 숨지 않도록, 위탁이 비밀이 되지 않도록 같이 목소리를 내주시겠어요? 위탁부모들이 힘들다고 하면 “그만해라!”, “왜 고생을 사서 하냐?” “이젠 보내라!” 하지 마시고 끄덕끄덕 공감하며, 손잡아주며, 들어주시겠어요?


 위탁부모들에게 아이는 단순히 돌봐주는 존재가 아니에요. 같이 살면서 어느새 ‘내 아이’가 된 자식이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위탁부모예요. 사회적인 무지에 힘이 들어도 꾹꾹 참고 영수증 처리하면서 아이를 위해 커다란 비밀 하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위탁부모예요. 아시나요? 위탁아이는 입양과 달라서 등본에 ‘동거인’으로 올라갑니다. 대부분 친자녀들과 성도 다르죠. 


 평범한 집에선 당연하게 생각할 일을 위탁가정에선 사력을 다해 지켜내야 하는 비밀이 되는 거예요. 이 무거운 짐을 지고서라도 가보겠다고 나섰는데, 따뜻한 햇살이 아니라 매서운 꽃샘추위라면…, 어떻겠어요?


 포기할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만 꾸준히 자원봉사를 다녀도 훌륭한 건데, 나는 왜 내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가면서, 가족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런 처우를 받으면서, 몸이 아파가면서, 육아를 자처하고 있나? 수백 수천 번을 생각했습니다.


 육아보다 힘든 게 편견이었어요. 그래서 <천사를 만나고 사랑을 배웠습니다>를 썼지요. 국내에선 처음으로 발간된 위탁가정 이야깁니다. 위탁가정에 관한 책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거든요. 후에도 더 발간된 건 없었고 또 이렇게 지면을 빌려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열 명의 위탁부모들 이야기를 담았어요. 입양가족이면서 위탁가족인 진해-****맘, 당진-**맘. 베이비박스 아기를 위탁하고 있는 경기-***맘, 대전-**맘. 한 아이도 힘든데, 두 아이를 위탁하고 있는 울산-**맘, 서울-****맘. 위탁부모들도 피하고 싶은 친가정 복귀의 고통을 경험한 경남-****, 경남- **님. 다문화 가정이면서 위탁가정인 대전-***. 새터민 가정이면서 위탁가정인 울산-**맘까지. 사회적 편견에 맞서며 위탁부모로 살고 있는 (또는 살았던) 열 명의 심장입니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위탁부모가 됐을까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내 아이로 품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한 아이를 품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가족이나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위탁가족으로 살면서 느낀 ‘사랑’, ‘만남’, ‘관계’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심장에도 온기로 전해질 거라 확신합니다. 


 사람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 관계와 갈등, 무지와 깨달음은 우리가 겪어내고 견디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미완으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때론 미완이 완전해 보이기도 합니다.


 미완인 당신의 삶을 축복합니다. 돌아보고, 무지를 깨뜨리는 용기를 낼 수 있길. 그 틈으로 보드라운 수용과 이해, 지지와 응원이 싹트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런 따뜻함을 갖고 있어요. 약자의 편에서 돕고, 외쳐주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계란 하나를 또 힘껏 던지겠습니다. 바위는 깨지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요. 노랗게 뒤덮일 때까지 던지고 또 던지는 게 제 목표입니다. 무지로 인한 폭력은 멈추라고. 가족의 시작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피보다 더 진한 게 ‘사랑’이라고 외치겠습니다.


 당신의 응원에 힘입어 한 번 더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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