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은 Dec 09. 2021

    피아노



 둘째 외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아이들도 컸고 집이 좁은 관계로 피아노를 가져가지 않겠냐며 피아노의 원래 주인에게 물어온 것이다. 아직도 짙은 갈색의 윤기와 직각의 몸체에 둥근 모서리의 조화로운 자태 그대로인지 잠깐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은 가져갈 때가 아니라 보류했다. 가지고 왔다간 피아노 위에서 잠을 자야 할 만큼 우리 집은 삼촌네보다 더 좁기 때문에. 어쨌든 피아노라는 큰 덩치의 물건을 훌렁 들어다 버릴 것도 못되니 잠정적으로는 그대로 두겠지.

 삼촌은 나의 고향집에서 썩히고 있던 피아노를 서울로 옮기고 건반 조율을 다시 하고 바쁜 직장생활에도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 통화한 삼촌의 목소리는 봄날 물 위에서 자유롭게 물질하는 오리처럼 한 겹 들떠 있었다. 청소년이 된 딸들 사이에서 피아노는 또 하나의 소통의 장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시와 문학을 좋아했던 삼촌은 바쁜 직장인의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 담이 생겼을 터 피아노는 그 담을 허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피아노를 치게 되면 아름다운 연주곡들을 듣고 싶어질 테고. 그 힐링의 순간들이 단순한 일상에 에너지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관심도 없었던 피아노 학원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바로 어머니는 읍에 하나밖에 없었던 피아노 대리점에서 당시 삼백만 원이 넘는 고가의 피아노를 단박에 구입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어머니는 남의 집 허드렛일로 번 푼돈을 오랫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을 것이다. 그 덕에 아버지의 장사 밑천에 얼마간 구멍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빚내어 피아노를 샀노라고 둘러댔을 것이고. 아버지가 피아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걸 보면 나에게 혹시라도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기대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떡하나. 피아노는 아주 개방적인 악기이므로 재능이라는 게 금방 들통이 나고 만다.

 한날 똑같은 음만 반복해서 쳐대니 우리 집 피아노는 나 때문에 충동구매의 표상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아, 천재도 노력이 99프로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왕 초보 주제에 억울할 것도 없었다. 간혹 앞집 언니들이 담벼락 너머로 피아노 소리를 듣다 저들도 피아노를 사달라는 아우성이 우리 집으로 들리곤 했다. 나에게 그 따위로 칠 거면 피아노를 당장 넘기라는 말로 들리기는 했으나 나는 모른 척 한참 빠져있던 젓가락 행진곡만 계속 쳐댔다. 다음은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습하며 정진했으나 좀처럼 늘지 않아 초보 딱지를 쉽게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으니 배운다는 것은 즐겁다는 동시에 모른다는 것은 참 억울한 것이구나, 를 깨닫게 된 것은 실질적으로 나의 음악시간을 통해서였다. 음악 필기시험에서 지옥(까진 아니었지만)과 천당을 각각 맛보았다면 그것은 피아노를 배우기 전과 후의 맛이었다.

 더 이상 단조 장조에 따라 음표 옆에 계이름 같은 건 적지 않아도 되었다. 어찌 된 것인지 귀도 열리게 되어 눈을 감고도 어느 장조, 단조의 샵과 플랩의 음인지를 다 맞추었다. 이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실기의 음감 테스트에서 검증된 바 있다. 증인도 있다. 아직도 그 일을 두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나의 음감이 그토록 특출 나 보였던 것은 혹시 다른 실력이 부실했던 탓이었는지 굳이 그 친구에게 묻지는 않았다.

 피아노를 배운 후 음악시간은 내게 탕후루를 처음 입에 넣고 와작 깨물 때의 시원함과 달콤함이 있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아래채인 교습소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는 본채 사이의 마당을 짧은 한쪽 다리 때문에 강약 강약으로 절뚝이며 바쁘게 가로질러 다녔다. 

 어머니는 가끔씩 선생님의 부모가 왜 자식의 소아마비를 일찍이 고치지 않았는지 안타까워했고 피아노를 전공하고 학원까지 꾸리는 선생님을 두고는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학원은 뻥튀기한 성냥갑 모양에 지붕을 얹어놓은 모습이었다. 피아노 각방이라는 것도 없이 피아노 세 대를 옆으로 붙여 놓은 단출한 공간이었지만 그 작은 학원은 내게 단아하고 예쁜 집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봄, 여름이면 열어둔 앞문과 피아노 뒤로 뚫린 창으로 계절의 냄새가 넘나들었고 그 창으로 본 풍경들이 작은 액자처럼 남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창밖 청보리밭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면 시가 만들어지고 집에 가서는 한 건반 한 건반을 스타카토처럼 눌러 음을 만들어 치면서 나도 작사, 작곡 같은 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바뀌는 창밖의 풍경에도 변함없던 것은 박자에 맞추어 허공을 가르는 나무 지휘봉과 딴딴 따아 따안 따안, 따아아안, 자 한 번 더! 딱 부러지는 선생님의 목소리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안채의 끝에 달린 선생님의 방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지점토 만들기에 푹 빠져 있었다.  집에다 가방을 내려놓고 학원에 가기 전에 큰 삼촌네에 들러 외숙모와 지점토로 벽걸이 장식품 등을 만들곤 했기 때문에 어느 땐가는 그 결과물을 학원으로 가지고 갔을 수도 있었다. 그걸 보셨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방 안 가득한 각양각색의 개구리 도자기들을 하나씩 설명하며 보여주었다.

 선생님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사 모은 개구리들이라고 했다.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칠 한 것 같은 입 큰 개구리, 올망졸망 단란해 보이는 개구리 가족들, 기도하는 개구리, 개구리가 입은 드레스 안으로 작은 종이 딸랑 울리기도 했다. 개구리를 무척 좋아한다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장단을 맞추지도 않았고 지휘봉을 둘러대지도 않았다. 대신 큰 눈을 반짝이며 여행했던 곳에서 만난 개구리들을 사랑스러운 노래를 들려주듯 이야기해주었다. 선생님의 여행기에는 짧은 한쪽 다리의 불편함 같은 건 티끌만큼도 없었다. 절뚝이는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도 그저 평범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은 우리가 피아노를 배울 때는 선생님의 심장과 악보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님에게 지점토로 개구리를 만들어 주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안 그랬을 것이다. 내가 마르고 유난히 입이 커 보였기 때문에 남학생들이 나를 개구리라고 놀려대서 나는 썩 개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몹쓸 별명은 자업자득으로 얻어진 것이었으니. 나는 용돈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와 동생들은 다른 집처럼 우리도 용돈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학생으로서 당연한 권리이며 양육자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증거이다, 라며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낸 용돈은 딱 두어 번일 것이다. 그러곤 자연스레 없어졌는데 우리조차 부모에게 다시 용돈 타령을 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 집 어린이들만이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한 주먹씩 되는 동전들이 모두 커다란 돼지 저금통에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쌓였다. 이 속이 꽉 찬 돼지저금통만이 우리 집 어린이들의 자금융통의 해결책이었다. 우리(라고는 하지만 모두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이 일을 해치웠다)는 이 돼지저금통을 끌어안고 불법적으로 자금을 마련하곤 했다. 물론 그 돈은 모두 군것질거리에 사용되었다. 저금통에서 꺼낸 동전으로 내 기준에서 가장 비싼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을 사 먹는 게 낙이었다. 그러던 중 손바닥만 한 커다란 비스킷을 세워서 먹었던 게 화근이었다. 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장래희망 중 하나는 코미디언이었을 만큼 시키지 않아도 교단 위에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고는 했기 때문에(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런 나를 알고 있던 남학생들이 냅다 ‘입 큰 개구리’라고 놀려대던 게 별명이 되어버렸다. 내 아무리 선머슴 같다고는 하지만 자꾸 들으니 개구리에게 반발심 같은 게 생기고 만 것이다. 


 선생님은 나의 별명에 대해선 전혀 몰랐을 것이다.

 며칠 전에 소싯적 피아노 선생님이 생각이 나 어머니와 통화 중에 아직도 동네에 사냐고 결혼했냐고 묻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이 며칠 전에도 애랑 같이 지나가더라, 했다.

 아 결혼하셨구나, 생각하다가 곧 웃음이 터졌다. 왜 어머니는 당신의 딸이 지금 몇 살인데 선생님을 서른 살 젊은 엄마 말하듯 하지? 그게 무척 이상하지만 또 말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만났던 그때의 선생님이 지금도 창밖으로 푸르른 보리가 살랑대는 그 교습소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것 같다. 검고 찰랑거리는 똑 단발에 큰 눈을 악보에 고정시키고 맑고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딴 따란 딴딴딴 딴 따란 따안 따안 딴, 자, 알레그레토로 다시! 한 손엔 나무 지휘봉으로 딱딱 박자를 두드리면서. 

 선생님 아직도 개구리를 좋아하세요? 저도 지금은 개구리를 좋아합니다만.

작가의 이전글 안녕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