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내리고 피톤치드 냄새를 폐 속 깊이 들여 마신다. 촉촉한 흙냄새도 난다. 일주일 간 쪼그라든 몸이 서서히 펴지는 기분이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향수 냄새가 확 풍길 때가 있는데 도심에서 둔했던 후각이 숲에서는 살아난다. 인위적 향수의 냄새가 거북하고 자극적이라는 것도 숲에서 알게 되었다.
가을이 오기도 전인데 초록색 도토리들이 잔뜩 떨어져 있다. 그것도 가지째.
떨어진 초록 도토리도 갈색으로 변하면서 익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아이들과 지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위벌레’라는 녀석들이 도토리에 알을 까놓고 다람쥐나 새가 열매를 먹기 전에 톱처럼 생긴 부리로 가지를 잘라 떨어뜨리는 것이란다. 어쩐지 가지의 단면이 매끈하더라니.
수도 없이 떨어져 나간 가지들을 보니 거위벌레들도 나무에서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사나 보았다.
와, 숲은 소리 없이 바쁜 것이다. 작은 생명들이 부지런히 살 궁리를 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있다.(인간들 눈에 띄지 않게 잘하고 있구나, 작은 생명들아 파이팅!) 숲은 작은 세상인 듯하지만 더없이 큰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덩어리의 조각이라고 생각하니 자연은 볼수록 수수께끼다.
걷다 보면 어릴 때 흔했던 땅강아지도 드문드문 보인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 아이들이 잡아서 숲으로 놓아주었다. 또 발견했을 때는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도망가더니 앞다리로 흙을 파헤치며 땅 속으로 들어갔다. 앞다리가 포클레인보다 바쁘다. 아, 잊어먹고 있었다. 땅강아지는 흙속에서 불쑥 나타나곤 했었지. 그래서 이름이 땅~강아지다. 내 남동생이 땅강아지가 어느 곤충의 유충이냐고 묻는다.(시골 태생이라도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 모른다.) 아이들이 땅강아지는 성충이라고 말해준다. 유충이라 하면 가장 먼저 애벌레가 생각난다. 애벌레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시댁에서 밤 까다가 놀라서 밤을 담은 바가지를 다 엎어버린 적이 있다. 통통한 애벌레가 기어 나오는데 이건 참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징그럽고 무섭다. 그런 나는 어릴 때도 물뱀 정도는 잘 가지고 놀았다. 뱀은 하나도 징그럽지가 않으니 이상하다. 숲에서 송충이를 보았을 때보다 더 기함한 적이 있을까. 송충이가 나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시절 운동장을 둘러싼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무더기로 떨어지던 털북숭이 송충이에 놀란 마음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내가 사슴벌레, 장수풍뎅이의 손바닥만 한 애벌레도 주야장천 키워봤으니, 남자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한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머리 위로는 까마귀 떼가 계속 울어댄다. 조상들은 까마귀 울음소리를 흉조라고 보았다는데 나는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듣기 싫지 않다. 까마귀들은 가족 사랑이 대단해서 어떤 위험이 다가오면 울음소리로 서로에게 알린다고 한다. 그런 까마귀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지만 영리한 까마귀는 그럴 틈을 주지 않을 테니 아쉽기만 하다. 까마귀를 그리면 즐겁다. 까마귀는 다른 새들과 다르게 큰 부리와 거북목 비슷한 형태도 재미있고 까만 벨벳 같은 몸도 묘하게 신비롭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절로 마음이 가는 것들이 있는데 새 중에서는 까마귀와 오목눈이가 그렇다. 오목눈이는 수다쟁이 유치원생 같다. 어디서든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데 가까이 가면 순식간에 숨어서 시치미를 뚝 떼거나 와그르르 날아가 버린다. 내가 농부였다면 새를 싫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림을 그리는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새들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그 새들을 숲에서 보면 좋아하는 마음을 괜시리 전하고 싶어 진다. 그들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지만.
남한산성을 걷다 보면 거대한 나무들을 우러러보게 된다. 저 나무들은 대체 얼마나 오래 살았던 것일까. 계속 올려다보고 있으면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어떤 영혼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아래를 끝없이 굽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남한산성의 나무야 숲아, 너희는 피로 물든 역사를 뿌리로 다 보았겠구나. 왠지 나무 아래에서는 ‘부끄럽게 살지 않을게요. 약속해요!’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가 묵직한 현자 같아서이기도 하지만 맘껏 뻗은 가지들에서 무한한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에 젖은 나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초작 초작 비를 맞는 나무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 빗소리는 나의 청력에도 좋은 약이 되는 기분이다.
밤하늘 아래 나무들은 낮에 보는 풍경과 또 다르다. 한낮의 나무는 햇살이 비추어 쾡 해 보이는 반면 밤의 나무는 기개가 웅장하며 검은 장막처럼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밤보다 더 검은 나무. 보고 있으면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밤에 보는 나무는 형태가 선명하고 힘차서 바로 붓을 들고 그리고 싶어 지는데 머릿속에서 그 붓은 곧 숟가락으로 변한다. 그리는 것이 어찌 잘 먹는 것보다 더 중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잘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숲에서는 내 욕심보다는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40대의 나는 밥을 잘 먹는 것, 잘 자는 것,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들에 치중한다. 늘 모자라지만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를 자주 생각한다. 30대에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 보니 예술이 삶을 뛰어넘어 더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작업이 갑자기 잘 되어 저녁시간에도 그저 작업을 이어가면 좋을 때가 간간이 있다. 혼자라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또 혼자라서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을 테지. 나는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족들의 저녁거리를 만든다. 현실은 숲에서 지금 내뱉고 있는 호흡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잘 자고 에너지를 만들어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 숲에서는 그런 별 것 아니지만 또 별 것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이 아까 만난 고양이를 또 쓰다듬고 있다. 다음에는 간식을 챙겨 오자고 한다. 나도 그러자고 한다. 이번에는 까먹지 않고 인터넷으로 고양이 간식을 주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