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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15. 2021

미국 가는 길의 23시간 55분

성공적인 경유를 위해 주어진 미션들



쓸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단기여행에는 경유시간도 아깝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거리 비행에서는 경유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건 내가 공항이라는 장소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고, 혼자 여기저기 잘 구경하고 다니는 스타일이라서 경유하는 공항도 또 다른 여행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유 덕에 비행기 표도 훨씬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그 즐거운 경유도 처음 경험할 땐 서툰 만큼 소소하게 날 당황시켰던 해프닝들이 있었다.


미국 여행을 계획하면서 비행기표를 알아볼 때 자연스럽게 경유 편을 확인하다가 눈에 띄는 일정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나항공과 아메리칸항공의 공동운항 편이었는데 경유시간이 무려 23시간 55분이었다. 긴 경유시간에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더 놀랐다. 세상 모든 가격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이유가 명백히 눈에 보인다면 뭔가 내가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그랬다. 나는 경유에 나름의 낭만을 가지고 있었고, 괜히 경유시간이 촉박해서 연착을 걱정하거나 종종거리며 환승게이트로 가는 것보다는 여유롭게 식사도 하고 휴식도 할 수 있는 긴 경유 시간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23시간 55분은 너무 심하게 긴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남는 비용으로 여행지에서 더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다며 좋아했다.



이 때는 창가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은 이동이 자유로운 복도 쪽을 선호한다.



긴 경유시간에 자신이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사실 내가 장기여행을 대비해서 PP카드를 만들어 둔 데 있었다. PP카드가 있으면 대부분의 공항에서 제휴된 라운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큰 걱정 없이 갈 수 있는 라운지만 알아본 상태였다. 다만 내가 간과한 것은 나리타 공항의 경우 공항 운영시간이 있고, 그에 따라 환승 방법도 다른 공항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라운지 운영시간에는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외 시간에는 공항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던 나는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안내를 따라 이동하면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몇 번이나 승무원에게 물어보고 표지판도 제대로 확인하며 와서 분명 트랜스퍼 줄에 서있는데 앞사람부터 천천히 입국절차를 밟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나리타공항은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운영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룻밤을 넘겨 경유하는 경우, 입국 후 다시 출국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얼떨결에 일본에 입국하게 된 나는 은밀한 경유자가 되었다. 이미 터미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경유를 하는 사람인지 입국하는 사람인지 출국하는 사람인지 나와 항공사만이 은밀하게 알게 된 것이다.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라운지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본엔 PP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라운지가 얼마 없는데 그나마 나리타공항에 몇 군데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가려고 했던 라운지는 아니었지만 일단 인터넷에서 알려준 대로 열심히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은 굉장히 소박한 라운지였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출국하기 전, 아시아나 항공 라운지를 이용한 나는 넓고 쾌적한 시설에 매우 만족했었는데 그에 비하면 라운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잠시 머무는 휴게실 느낌이었다. 10명 남짓 수용 가능한 공간인 데다 제공되는 것도 음료 정도여서 배를 채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내가 무방비하게 노출된 곳이 아닌 어느 정도 보호가 보장된 공간에서 쉬는 것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에 푹 쉴 생각으로 의자에 편히 앉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의자는 신기할 정도로 딱딱했다. 사실 모양은 의자라기보다는 1인 소파처럼 생겼었는데 그 쿠션 안에 뭐가 든 건지 너무 딱딱해서 내 엉덩이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그대로 구겨져 쪽잠을 좀 자다가 음료만 두어 잔 마시고 저녁 먹을 때쯤 밖으로 나왔다. 몸은 더 찌뿌둥해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 이외에는 이용객이 거의 없었고 - 중간에 한두 명씩 들러서 잠시 쉬다 떠났다.- 관리하는 직원분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친절하셔서 편했다. 오히려 단둘이 있던 시간이 길어서 왠지 모를 유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리타공항 주변 풍경



라운지에서 나온 나는 식사를 하고 공항 한편에 자리 잡았다. 아이스크림 자판기가 있어서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엔화가 없었던 나는 그마저도 실패했다. 다시 여행 계획을 점검하고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공항 운영시간이 끝날 때가 됐는지 관리인이 와서 머물 수 있는 곳을 안내해줬다. 관리인은 경찰처럼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직업 특성상 진압봉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태도였지만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새초롬해졌다. 그렇게 밤을 보낼 대합실에 들어갔다. 외국에 나가면 가장 쾌적하고 좋은 자리에는 이미 한국인들이 있다던데 정말 그랬다. 일단 나부터가 대합실 안쪽 의자에 자리 잡았고 내가 들어갈 때 이미 의자에 누워 핸드폰을 보던 사람들도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됐다. 나는 겁이 많아서 여행 중에 짐을 잃어버리지 않게 엄청 신경 쓰는 편이라 대합실에 누워서도 팔다리에 내 짐들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렇게 내 짐들과 뒤엉켜 누운 채 대합실 천장을 보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이 보아의 'Amazing kiss'였다. 보아가 일본에 진출해서 크게 인기를 얻은 곡인데 뭔가 나에게는 그 곡이 일본을 떠올리게 해서 미리 선곡해갔다. 그 노래를 일본의 국제공항에 누워서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예상보다 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이였던 나는 보아를 참 동경했었다. 어린 나이에 멋지게 무대를 하고 외국에서도 신드롬을 일으키는 모습이 마냥 멋져 보이고 따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보니 귓가에 흐르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보아의 앳된 목소리가 조금 구슬프게 들렸다. 그 나이에 멋지게 반짝였던 보아가 더 대단해 보였고 또 정말 고생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커서 혼자 여행 가겠다고 경유하고 있는 나도 낯선 공항에서 보내는 고작 하룻밤이 겁나는데 어린 그에게는 비교할 수 없이 고되었을 것이다. 노래의 선율을 따라 여러 감정들이 떠다녔다.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한 아련함, 스스로 번 돈으로 추억 속 노래가 만들어진 곳에 와서 그 노래를 듣고 있다는 성장에 대한 감개무량함, 앞으로 있을 일정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그렇게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가득 찬 대합실에 누워서 복잡한 마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했다.



나를 살려준 샤워실, 환승객은 30분에 500엔


그 당시 인천 국제공항을 제외하고는 라운지 사용경험이 없던 나는 당연히 모든 라운지에 샤워실이 있을 거라는 엄청난 착각을 했다. 씻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편인 나는 다음날 라운지에서 쾌적하게 씻고 환승 편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버텨보려 했지만 막상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도저히 찝찝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꼬질꼬질해진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행히 나리타 공항에는 별도의 유료 샤워실이 있었고, 사용료는 30분에 1000엔으로 만원 정도였지만 환승객은 50% 할인이 되어서 500엔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유료 샤워실은 처음 경험해보았는데 평소 샤워를 느긋하게 하는 나는 '탈의-샤워-옷 입고 머리 말리고 뒷정리'까지 30분 내에 처리해야 하는 타임어택이 꽤 급박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예상처럼 흘러가지는 않았어도 조금씩 대처해가며 내 계획을 누덕누덕 기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환승 편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또 하나의 문제를 맞닥뜨렸다.


경유 노선이다 보니 면세품 규정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출발했었는데 그건 보통 몇 시간만 경유할 때의 이야기였고, 나는 스탑오버처럼 이미 입국하여 출국심사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구입한 면세품에 문제가 생겼다. 면세품들은 수하물로 부치거나 버려야 했는데, 출국 심사를 위해 줄을 오래 서있느라 비행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순간 너무 당황스럽고 조급했다. 여행지에서 유용하게 쓰려고 그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한 면세품들을 모두 버릴 수도 없고, 다시 수하물을 부치려면 돈도 시간도 더 들 텐데 모든 게 부족하고 촉박하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어렵지 않게 해결했을 텐데, 해외여행 경험이 부족하던 그땐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는 모든 것들에 너무 놀라고 두려운 상태였다. 


결국 나는 동동거리며 아메리칸 항공 카운터에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내 얼굴은 너무 울상이고 어깨는 한껏 쪼그라져 있었다. 조회해보니 다행히도 나는 총 2개의 무료 수하물을 부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1개만 부친 상황이라 일본에서도 하나를 무료로 처리할 수 있었다. 돈이 해결됐으니 이제 시간이 문제였다. 면세품 봉투는 찢어지거나 터질 위험이 있어서 추가 포장이 필요했는데, 그때 나의 얘기를 들은 직원이 어디선가 급하게 A4용지 박스를 가져와서 포장을 도와주었다. 면세품 부피에 비해 박스가 조금 작아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아마도 미국인일 그 직원은 치마와 구두 차림이라서 쪼그려 앉아서 힘쓰는 게 불편했을 텐데도 자기 일처럼 열심히 도와주었고 나는 정말 너무나도 든든하고 고마웠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환승 편에 탑승했을 때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워낙 정신이 없었어서 혹시 뭔가 잃어버리진 않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창밖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렇게 어지럽고 탈 많았던 23시간 55분이었지만 그래도 난 경유하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전혀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입국 도장이 여권에 찍히기도 했고, 미리 여행에서 있을 미션들을 연습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황했던 순간마다 사람이 나에게 힘이 된다는 걸 알게 된 기회였다. 의자가 딱딱했던 라운지에서 말없이 눈인사를 나누던 직원, 어두운 대합실에서 의지가 되어주었던 한국인들, 나의 급조한 수하물 박스에 꼼꼼히 테이프를 붙여주던 항공사 직원까지 내가 곤란할 때마다 심적으로 의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들이고 겪지 않을 해프닝이지만, 이렇게 능숙한 지금을 만든 건 그때의 서툰 경험 덕분일 것이다. 앞으로 있을 여행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경유지를 거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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