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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10. 2021

그리피스 천문대의 프러포즈

LA 야경을 기다리다 마주친 아름다운 순간



LA 여행 중엔 한국과는 사뭇 다른 거리 분위기 때문에 해가 완전히 지기 전, 8시 전에는 꼭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다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내가 결연히 맘을 먹고 밖에서 달까지 보고 돌아온 하루가 있었다. 


그날은 그리피스 천문대에 갈 계획이라서 구글맵이 알려주는 대로 버스를 탔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믿을 건 구글맵뿐이지만 그렇다고 구글맵을 너무 맹신하면 안 된다.'였다. 목적지 근처에서는 차라리 스스로의 본능을 믿는 게 나을 때가 있을 정도니까. 이때도 구글맵이 알려준 대로 그리피스 천문대 근처에서 하차했는데, 명소임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사람이 나뿐이었을 때 난 의심을 해봤어야 했다. 도보 거리가 좀 길게 나오길래 걱정스럽긴 했지만 못 갈 거리는 아니라서 우직하게 걷기 시작했고 내가 가는 곳이 그리피스 '천문대'라는 걸 잊지 말라는 듯 길은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평소 그다지 등산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조금 벅찬 경사였는데 날씨가 좋고 경치가 좋다는 말로 스스로 등을 밀어주며 열심히 올라갔다.


천문대로 향하는 가파른 길.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뜨거운 햇볕 아래 서서히 목덜미에 땀이 올라올 무렵, 눈부시게 하얀 그리피스 천문대가 보였다. 그리고 나와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푸른 잔디밭에 다리를 뻗고 앉아 여유를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관광객 차림인 내가 산의 입구에서 홀로 하차할 때 의아해하던 얼굴들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구글 맵은 몰랐겠지만 사실 그 버스는 이 천문대 바로 앞까지 와서 회차를 하는구나! 조금 허탈했지만 그래도 내려갈 때는 걷지 않아도 된다는 걸 위로 삼았다. 천문대 건물과 그 앞 부지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감상할 거리가 많았다. 바깥 잔디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천문대 건물의 경관을 즐기며 사진도 찍고, 실내 전시공간을 구경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미국의 깃털이 예쁜 새를 만나기도 했다. 게다가 오후엔 어떤 전문가께서 바깥 마당에 망원경을 설치하여 행성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계셔서 덕분에 꽤 천문대 방문객다운 경험을 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늘이 어슴푸레 해질 때쯤 천문대 위쪽 발코니처럼 조성된 공간으로 올라갔다. 결연한 마음을 먹고 이 일정을 짠 이유는 바로 이곳이 LA의 야경을 보기 좋은 곳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는데, 유명한 만큼 미리 자리를 잡는 게 중요했다. 5월의 LA는 해가 늦게 지는 편이라 나는 한참을 혼자 기다려야 했다. 여행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보통 음악을 들으며 상념에 빠지거나 사람들을 구경했고, 그날도 일몰을 기다리며 상념에 빠져 한껏 센티해진 상태였다. LA에 오면 꼭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듣고 싶었던 터라 한곡 재생으로 틀어놓고 그 기타 선율과 가사를 음미했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우리 아버지께서 독보적으로 가장 좋아하시는 곡인데 뭔가 자식으로서 나라도 꼭 진짜 캘리포니아에 가서 이 곡을 들어봐야겠다는 이상한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그 막연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어 캘리포니아 땅에서 바람을 맞으며 듣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버지는 이 곡을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 걸까, 한국에서 들을 땐 마냥 분위기가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꽤 쓸쓸하다, 이 노래가 나올 시기에 캘리포니아 사회가 어땠길래 이런 묘한 가사가 나왔을까…



여러 생각들로 LA 경관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잔뜩 아련해졌을 때, 아래쪽 난간에 나란히 기대 있던 한 커플이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이 실크 셔츠와 실크 원피스를 똑같이 파란색으로 맞춰 입은 게 아주 근사했다. 두 사람이 너무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는데, 멋지게 차려입고 서로를 다정하게 살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다만 여자가 즐겁게 손동작까지 섞어가며 얘기하는 반면 남자는 왠지 모르게 조금 산만해 보여서, 여성분이 표현을 잘하시는 분이구나 하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봤고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그들은 나와 아주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큰소리로 말하면 들릴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그래서 여자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장난식으로 서운함을 말하는 여자의 얼굴이 울상이라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나까지 초면인 남자분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쯤, 갑자기 누군가 여자에게 다가가 끝에 풍선이 달려있는 끈을 건넸다. 마치 그게 신호인 것처럼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계단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음악과 함께 둥실둥실 올라오는 수많은 풍선들이 보였다. 적게는 하나부터 많게는 대여섯 개 뭉치까지 풍선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두 사람과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풍선을 건네받았을 때 어리둥절해하던 여자는 이어진 상황을 눈치챘는지 감격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여자가 풍선을 건네는 사람들과 가벼운 포옹을 하고 축하를 받는 동안, 남자는 멀찍이 서서 초조한 듯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제자리를 돌고 있었다. 어느새 여자의 손에는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의 수많은 풍선 줄이 쥐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로 남자가 들고 있는 하나의 보라색 풍선만이 따로 떠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가 여자에게 마지막 풍선을 건넸고 여자는 밝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남자는 근사한 바지와 구두가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맨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었다. 눈물을 훔치는 여자를 보고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을 때, 여자가 'YES!'라고 외쳤고 야경을 기다리던 나와 모든 사람들은 환호성과 박수로 그들을 축복했다.  


사진 촬영으로 꽤 오래 자리에 머물던 두 사람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주변의 다른 연인들도 감응되었는지 서로 더 가까이 붙거나 안아주며 애틋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로맨틱한 분위기는 꽤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약속한 순간이라는 것이 가장 아름다웠지만, 그들을 아끼는 주변 사람들의 축복이 마치 손에 들린 그 풍선처럼 그들에게 하나하나씩 전해졌기 때문에 더욱 멋지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이벤트 자체가 나에게 엄청나게 새롭고 신선한 방식은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장면이고, 한국에서도 근처에 있던 사람이 그런 이벤트에 동원되어 초면의 여성에게 꽃을 건네는 걸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낯설고도 낭만적인 여행지에서 완벽하게 타인인 누군가의 일생일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하게 되니 모든 게 대단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 커다랗게 모인 풍선 뭉치가 두 사람의 사랑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고, 같은 색으로 푸르게 찰랑이는 그들의 실크 셔츠와 원피스가 같은 색으로 물들 그들의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여행에서 이런 순간을 만나면 정말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다. 저 멀리 대한민국에 평생을 살던 내가 미국 여행을 와서 LA에, 그리고 딱 이 그리피스 천문대에 올라 온 지금과 저 사람들의 인생에 손꼽히게 중요한 순간이 마주친다는 게 너무 절묘했다. 나와 아무 접점 없을 그 사람들의 프러포즈 장면을 목격하고 함께 환호하고 박수를 치고 축하를 보내는 그 순간이 정말 특별했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그 축복 가득한 순간을 떠올리며 나는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평소 야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날만큼은 저 수많은 불빛 속에 과거를 지나 미래까지 나와 아주 짧게라도 스쳤던, 스치는, 스칠 인연이 있지는 않을까 새로운 기대감이 들었다.




그 이후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 <라라랜드>에서 그리피스 천문대가 나오면서 더욱 인기 많은 명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사 같은 큰 변화가 없다면 장소는 한결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장소는 방문하는 사람과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피스 천문대의 외관이 똑같고, 내가 들렀던 날과 비슷한 날씨더라도 다시 가본다면 분명 다른 곳처럼 느껴질 것이다. 처음 발을 디디고 목격했던 순간과는 다르게 그날 나에게 그리피스 천문대는 쓸쓸하면서도 로맨틱한 곳이 되었다. 게다가 나도 라라랜드를 봤기 때문에 영화에 나온 모습까지 합쳐져 내 머릿속에 새로운 상상도가 그려진 상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상상도를 품고 그리피스 천문대를 다시 방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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