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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18. 2021

산타모니카 해변의 막대사탕

상상했던 노래 속 한가운데 서 있던 순간



오롯이 바다만을 위한 마이애미 여행이 예정되어있었는데도, 나는 첫 도시인 LA에서 굳이 하루를 할당해 산타모니카 해변을 찾았다. 그건 바로 내가 즐겨 듣던 노래의 한 소절 때문이었다. 

"…but I stand in California with my toes in the sand.The Neighbourhood의 Sweater Weather 라는 노래인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언젠가 나도 캘리포니아의 해변에 가서 모래 사이에 발을 파묻겠다는 막연한 상상이자 결심을 하곤 했었다. 캘리포니아에 왔으니 그 상상을 실현할 일만 남은 것이었다. 나는 할리우드 쪽에 숙소를 잡았는데, 그래서 산타모니카 해변까지는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다. 환승하는 정류장 근처에 99 Cent only stores가 있어서 마트를 좋아하는 나는 구경할 겸 들러서 간식거리를 샀다.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향하는 육교. 표지판에 산타모니카라고 적혀있다.


비가 오거나 어두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날이 좀 흐렸다. 산타모니카는 1년 중 300일 이상이 맑은 날씨라던데 그럼 난 꽤 드문 날씨에 방문한 셈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해변이라고 하면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여유롭게 시원한 병맥주를 마시는 상상을 했었지만, 현실은 세차게 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미지근해진 오렌지맛 탄산음료를 마셨다. 어쨌거나 나는 '산타모니카'라는 이름도 좋았고 멀리 보이는 수평선도 좋았다. 해변은 특이하게도 일반 도로와 높이 차이가 있었다. 모래 절벽 아래 펼쳐진 해변이 훤히 보여서 속이 시원했다. 나는 해변으로 향하는 데크를 걸으며 플레이리스트 상단에 올려놓았던 노래를 틀었다.



산타모니카 해변. 깎이듯 떨어지는 모래절벽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멋지다.


드럼의 하이햇과 스네어가 경쾌한 소리로 비장한 분위기를 만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데크를 걷는 동안 배경음으로 묵직한 베이스 소리와 기타 리프가 깔렸다. 한국의 내 방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들을 때는 마냥 여유 있고 느긋한 느낌의 곡이었는데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에서 직접 듣고 있으니 왠지 쓸쓸한 느낌이 났다. 그 쓸쓸한 느낌이라는 게 날 외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분위기를 깊게 만드는 그윽함 같은 거였다. 나는 샌들을 신은 채 파도가 부서지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샌들 밑창이 모래에 푹푹 빠지고 파도소리가 코 앞에서 세차게 들려올 때쯤 나는 신발을 벗었다. 한 손에 샌들 두 짝을 모두 걸고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그냥 허리를 펴고 섰을 뿐인데 뭔가 우뚝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나를 좀 더 비장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모래가 부드러웠다. 발을 꼼지락거리자 노래 가사처럼 발가락 사이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모래가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해변가 모래를 밟았을 뿐인데 뭔가 인생에서 큰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생각만 하던 일을 실제로 이뤄냈기 때문일 것이었다.


풍선껌맛, 솜사탕맛 막대사탕


한참을 그렇게 서서 모래도 밟고 파도에 발을 담그기도 하다가 벤치에 앉았다. 여전히 모래에 발을 디딘 채였다. 가방을 뒤져 아까 99센트 마트에서 샀던 막대사탕을 꺼냈다. 나는 일부러 가장 장난감 같은 색깔의 막대사탕을 골랐었다. 상상을 실현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사소한 것도 내 낭만과 가장 가까운 걸 고르고 싶었다. 해변에 앉아 바다와 갈매기, 그리고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막대사탕 두 개를 천천히 녹여먹었다. 두 종류의 막대사탕은 각각 다른 색과 다른 이름이었지만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공향이 살짝 스치는 아주 단맛이었고 다 먹었을 쯤엔 입이 거의 얼얼할 정도였다. 귓가에는 여전히 그 노래가 울리고 있었고 혀끝에서는 단맛이 났다. 기우는 태양에 바다의 빛깔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보면서 원 없이 해변에 앉아있었다.



오랫동안 해변에 앉아있었더니 바람이 품에 든 것 같아서 숙소 근처에 돌아와 저녁으로 뜨끈한 쌀국수를 먹었다. 숙소에서 따뜻하게 샤워하고 하루를 정리한 후 포근한 침대에 눕자 충족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충족감은 하루를 마치면서 일어난 게 아니라 해변에서부터 차근차근 차오른 것이었다. 산타모니카 해변의 명소인 놀이공원도 방문하지 않았고 그저 해변의 한 구석을 산책하고 오랫동안 앉아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날은 나의 낭만과 의욕을 모두 채울 만큼 충만한 하루였다.


요즘도 Sweater Weather를 들으면 혀끝에 단맛이 나는 것 같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건 생각보다 더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어떤 일들을 겪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나의 상상들을 실제로 마주하는 일이 더 많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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