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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13. 2021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칠면조 다리

어쩌다 내가 '먼저'가 된 순간


나는 놀이공원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여행지 근처에 놀이공원이 있다면 꼭 방문해보는 편이다. LA 여행 중에도 근처에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 할리우드'에 갔었는데, 내가 해외에서 처음으로 가본 놀이공원이라 새롭고 즐거웠던 기억이 많다.


LA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 가지 사소한 해프닝들을 겪었고, 그래서 혼자 돌아다니는 것에 조금 겁먹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이후에 올랜도 디즈니월드에서 며칠 동안 머무를 일정이 있어서 놀이공원에 가는 일이 굳이 또 필요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래서 대신 후보 목록에 넣어뒀던 가까운 미술관을 갈까 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결국 게스트하우스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다 말고 마지못한 손길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입장권을 예약했었다. 하지만 당일 아침, 가볍게 일어난 나는 이유 모를 의욕이 생겼고 들뜬 마음으로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역에서 셔틀 트레인 타는 쪽으로 가는 육교에서. 아침 일찍 도착해서 해가 조금 기울어 있다.



지하철역에서 놀이공원 안까지 가려면 셔틀 트레인을 타야 했는데, 그곳에서 A를 만났다. 셔틀 트레인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A 근처에 서있었고, 우리는 둘 다 혼자였기 때문에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말 없이도 나는 A의 옷차림이라던가 전체적인 스타일에서 친근함을 느꼈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들은 서로 알아볼 수 있다는데 정말 그랬다. 나는 당연히 혼자 다닐 생각이었는데도, 즐겁게 뛰놀아야 할 놀이공원이라서 그런 건지 불현듯 A에게 동행을 제안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A가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라서 그런 이유가 컸다. 셔틀 트레인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A는 내 앞자리에 앉았는데 나는 그 뒤통수를 보면서 말을 걸어도 될까 몇 번이나 고민했다. 혹시 일행과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을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다가, 결국 혼자 입장권을 스캔하고 안까지 들어간 다음에야 말을 걸 수 있었다. A는 유학생이었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곳에 꼭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친구들과 함께 다녔지만 오늘은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서 혼자 오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흔쾌히 나와 동행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예상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심슨의 배경인 '스프링필드' 구역이 조성되어 있다.


A가 좋아하는 해리포터 테마로 꾸며놓은 구역부터 내가 궁금해했던 심슨 구역까지 신나게 돌아다녔다. 놀이기구들은 한국의 놀이기구보다 순한 맛이었지만 그 사실을 공감해 줄 사람이 옆에 있어서 더 재밌었다. 대기 줄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LA 선배인 A에게 주변 명소나 여행 팁들을 들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A가 기념품에 투자하는 편이라면 나는 먹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고, 그녀가 고심해서 예쁜 물건들을 고르는 동안 구경을 마친 나는 군것질을 했다. 점심 먹을 때가 되었을 때, A는 도시락을 싸왔다고 했다.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고르는데 눈에 띄는 메뉴가 있었다. '점보 훈제 칠면조 다리'. 나는 그전에 칠면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칠면조 고기를 구입하거나 칠면조 요리를 사 먹을 수 있겠지만 그때 나에겐 낯선 음식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에게 칠면조 요리는 외국, 특히 미국의 추수감사절 음식이다. 미국 시리즈 '프렌즈'를 재미있게 봤던 나는 늘 칠면조 요리에 호기심이 있었고 이 순간이 바로 그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친숙한 한식 도시락을 펼쳐놓은 A의 앞자리에 점보 훈제 칠면조 다리를 놓고 앉았다. 한 끼로 양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내가 살면서 본 다리 중에는 가장 큰 조각이었다. 만화나 영화에서 들고 뜯던 칠면조 다리가 눈앞에 있으니 왠지 감개무량했다. 그곳은 할리우드의 놀이공원이었고, 마법의 세계가 꾸며진 곳이면서 영화 촬영장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살면서 만날 가장 만화 같고, 가장 영화 속과 똑같은 칠면조 다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함께 준 플라스틱 포크로 먹어보려고 했지만, 단단한 고기에 비해 포크가 너무 약해서 먹기 어려웠다. 그리고 내심 만화에서 처럼 끝을 잡고 와구와구 먹고 싶었던 나는 A에게 양해를 구하고 깨끗이 씻은 손으로 칠면조 다리를 통째로 들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나중에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니 포장지로 감싼 칠면조 다리를 들고 다니면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일단 그 순간 주변에 칠면조 다리를 뜯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우리의 식탁 풍경이 좀 특이했는지 주변 사람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슬쩍 쳐다봤다. 당연히 이목을 집중시킨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잠시 시선을 두는 정도였다. 어쨌거나 나는 '와구와구'에 집중했다. 그냥 식사를 하는 거라면 그냥 '냠냠' 먹어도 됐을 테지만 나는 그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다 꽤 한참 동안 나의 칠면조 다리를 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주문대 근처에 서있었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wow'라고 말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모른 척 감자튀김을 집어먹었다. 칠면조 다리는 짜고 질겨서 다 먹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야무지게 도시락을 비운 A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다른 테이블을 지나쳐 나오면서 아까 wow라고 말했던 남자를 다시 마주쳤다. 그는 나처럼 칠면조 다리를 뜯고 있었다.



유니버셜 투어 프로그램 중에 볼 수 있었던 멋진 풍경



주문대 근처에서 메뉴를 고민하던 그는 어쩌면 나를 보고 칠면조 다리가 먹고 싶어 졌을 수도 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에게는 너무 짜고 질기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리고 A는 나와 함께 놀이기구를 기다리면서 말했다. '사실 저도 아까 셔틀 정류장에서 언니 보고 한국인 같아서 말 걸어볼까 생각했어요.' 이렇게 가끔 얼떨결에 내가 '먼저'가 되는 순간이 있다. 가기 전에는 망설이고 고민했던 유니버셜 스튜디오였는데 막상 가보니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날 내가 가지 않았다면 아마 A는 혼자 다녔을지도 모르고, 그 남자도 점심으로 다른 메뉴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의 작은 결심과 여러 우연이 겹쳐 사소하게나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신기했다. 혼자 다니는 여행에 의기소침해졌던 나를 환기해주는 아주 소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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