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4분의 3 승강장에 걸려버린 머글 혼혈
셔틀 트레인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A는 해리포터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리고 나는 상대적으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서 제대로 즐길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놀이공원을 방문할 때는 적어도 몇 가지는 꼭 타보겠다거나, 어떤 곳은 반드시 가보겠다고 결심하는데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머릿속에 특별한 동선이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위시리스트를 가지고 있던 A 덕분에 덩달아 나도 꽤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A는 갑자기 만나게 된 동행이 자신의 계획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지루해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끌어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해리포터 세대라서 또래 중에 해리포터 시리즈-책과 영화 모두-에 열광하는 친구들이 많다. 물론 나도 처음 해리포터를 접하고는 굉장히 깊게 빠져들었지만, 그 몰입이 너무 과해져서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영화 속 주연배우들을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의식적으로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피아노 학원 연습실에서 진지하게 영국 가수 비틀스의 'yesterday' 연주를 연습하면서 다니엘 래드 클리프를 만났을 때 어떻게 인사하면 좋을지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책은 '불의 잔'까지, 영화는 '비밀의 방'까지만 보고 거리를 두었던 나는 머글(해리포터 세계관에서 마법사가 아닌 인간을 뜻하는 단어)이라고 하기엔 그 세계를 알았고, 그렇다고 완전하게 마법사가 되기엔 진심이 모자랐기 때문에 혼혈 정도로 볼 수 있었다.
순혈 마법사로 보이는 A는 나를 여러 곳에 데려가 줬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숙사별 아이템을 살 수 있는 기념품점부터, 버터비어를 마실 수 있는 가게, 마법 지팡이를 살 수 있는 상점 등등... 영화 속에 나온 것과 똑같은 소품들을 볼 때마다 A는 감명 깊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옆에서 함께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나도 점점 동화되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매력적으로 꾸며진 테마파크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나중에 마법 지팡이 상점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어떤 지팡이가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과몰입하게 만든 것은 그 당시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놀이기구였던 '해리포터와 금지된 여행(Harry Potter and the Forbidden Journey)이었다.(*편의상 '금지된 여행'이라고 하겠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대해 잘 모르던 나도 이미 알고 왔을 정도로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입장하자마자 바로 그것부터 탔다. 금지된 여행은 실로 완벽한 놀이기구였다. 외관부터 호그와트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데다가 입장하는 곳부터 탑승구까지 실내의 모든 곳이 해리포터 컨셉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중간에 해리포터 주인공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서 말하고 있는 곳에서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대기줄이 줄어드는 게 다 아쉬웠다. 내가 그럴 정도였으니 처음부터 해리포터 파크 때문에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A는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탑승해보니 역시나 굉장히 대단하고 재미있었는데, 내가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유형의 놀이기구였다. 레일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그 레일에 스키장 리프트처럼 생긴 4인 좌석이 달려있었다. 그 좌석에 앉아 다리가 대롱대롱 뜬 채로 레일을 따라 움직이고 흔들리게 되는 시스템이었는데 그 움직이는 각도가 지면과 거의 90도까지 꺾여서 정말 격렬하게 재미있었다. 3D 안경을 착용한 덕분에 눈앞에 날아다니는 퀴디치 볼이 생생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각도에서 펼쳐지는 영상과 기구의 움직임, 기계로 불어주는 바람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서 4D를 넘어서서 그냥 아예 내가 정말로 해리포터와 금지된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 번의 탑승으로 금지된 여행에 완전히 매료된 우리는 다른 놀이기구를 타다가 중간에 다시 한번 타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금지된 여행의 운행이 종료되기 전 우리는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타기로 했다. 앞선 두 번의 탑승이 너무나 재밌고 만족스러웠던 터라 대기줄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생각보다 대기시간이 길지 않아서 금방 차례가 온 우리는 이번엔 중국말을 사용하는 남자 두 명과 한 조가 되어 4인 좌석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즐거운 운행이 시작되고 신나게 휘날리고 있는데 갑자기 중간에 놀이기구가 우뚝 멈췄다. 우리는 마법 빗자루를 타고 화려하게 비행하는 중이었어서 한껏 기울어져 있었는데 아무런 예고 없이 놀이기구가 그냥 멈춘 것이다. 이전의 운행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지만 난 놀이기구가 고장 나는 일이 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저녁시간 대 에피소드는 또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구가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상과 소리도 모두 꺼졌고 우리는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스모그 효과가 가득 찬 삭막한 내부를 흐릿한 3D 안경을 통해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좌석은 레일을 중심으로 생각했을 때 9시 방향에 위치해서 가장 오른쪽에 앉았던 내가 바닥 쪽에 쏠려있었다. 그래서 A는 속절없이 미끄러져 내 왼쪽 어깨와 팔, 엉덩이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보다 키가 컸던 A를 왼쪽에 얹고 버티면서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이 놀이기구가 한 번에 몇 개의 좌석을 운행하는지도 몰랐고, ' 만약 우리 좌석에만 문제가 있어서 뒤이어 오던 다른 좌석과 부딪힌다면?'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뒤쪽이 너무 불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혀 그런 충돌이 있을 구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막연하게 그냥 무서웠다. '금지된 여행이라더니 진짜 이렇게 모든 게 금지되는 건가?'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졸지에 우리와 운명공동체가 된 중국인 남성 둘도 많이 당황했는지 큰 목소리로 뭔가를 외치고 있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가 빠르고 크게 들려서 마음이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때 A가 작게 말했다. '언니... 저 너무 무서워요.'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가녀리고 걱정스러울 만큼 떨리고 있어서 순간 나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저히 겁먹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아니야, 괜찮아.'만 반복했다. 뭐가 아니고 뭐가 괜찮다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목소리만큼은 내가 듣기에도 차분하고 침착해서 거의 비장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두 명의 강렬한 중국어와 한 명의 숨소리, 그리고 한 명의 기계적인 주문이 반복되는 와중에 드디어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가 겁먹은 게 민망할 정도로 느긋하고 권태로운 목소리였다. '기계에 문제가 생겨 운행을 중단하오니, 탑승객분들은 하차구역에 도착하시면 안전하게 하차해주시기 바랍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 후 어떤 영상도 효과도 없이 덜덜거리는 좌석에 실려 하차구역으로 옮겨졌다. 영상 없이 보이는 내부가 당연하게도 너무 보잘것없어서 아까의 호들갑이 더 머쓱하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놀이기구가 고장 나는 일이 굉장히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어쩌다 고장이 나는 일이 있으면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었는데, 그걸 기준으로 생각해 봤을 때 우리도 뉴스에 나가게 되는 건 아닌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미국 땅에 와서 놀이기구를 타다가, 그것도 세 번이나 타다가 결국 고장 나는 것까지 보고 미국 뉴스에까지 나가겠구나! 하지만 당연하게도 난 미국 뉴스에 나갈 일이 없었고, 놀이기구 출구 앞에서 '뉴스에는 아까 우리의 모습을 찍은 CCTV 영상이 나가는 걸까?'하고 함께 걱정하던 나와 A는 그냥 중도하차한 사람이 되어 무사히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그 당시에는 즐거웠던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결연한 마음으로 탔던 놀이기구가 그렇게 허무하게 중단된 것이 당혹스럽고 아쉬웠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마저도 너무 마법의 세계 같은 일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겪는 일들은 좋은 일이든 조금 나쁜 일이든 지나고 보면 다 하나의 추억거리가 된다. 얼떨떨했던 그때의 기억도 이제 생각해보니 마치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벽에 부딪쳐버린 머글 혼혈이 된 경험처럼 추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