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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1. 2021

라스베가스의 구덩이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긴 하죠



LA에서 라스베가스로 이동했을 때 나는 꽤 놀랐다. 생각보다 익숙하고 친숙했던 LA와 달리 라스베가스는 내 예상보다 훨씬 화려하고 번쩍거렸다. 무엇보다 네바다주의 사막 기후가 제대로 느껴져서 이국에 와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거리에 늘어선 야자수도 멋졌고, 스트립(라스베가스 중심거리) 따라 특이하고 화려한 호텔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도 대단했다. 라스베가스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는데 노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라스베가스의 휘황찬란한 분위기 덕분에 그 풍경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었다.


나는 스트립의 끝쪽에 위치한 호텔에 머물렀다. 메인 거리와는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스트립을 관통하는 버스노선이 호텔 바로 앞까지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예약한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오자 버스에서 정류장이 변경되었다는 안내가 나왔고 나는 호텔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야 했다. 임시 정류장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호텔 앞 도로에 진행되는 공사가 있어서 근처 정류장을 임시로 옮겼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스트립을 지나는 버스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두 버스의 노선은 겹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었다. 어쨌거나 두 버스 모두 내가 머무는 호텔 앞 정류장을 지나게 되어있었고 그래서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좀 잦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의 모습. 도로를 나누는 야자수가 멋지다.


고온다습한 여름을 지닌 한국의 더위에만 익숙했던 나는 건조하면서도 말도 못 하게 뜨거운 라스베가스의 날씨가 신기했다. 임시 버스정류장에서 호텔 정문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는데도, 그새 머리꼭지가 뜨거워지고 입이 말랐다.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맞은 에어컨 바람이 너무 시원해서 뒷목이 찌릿할 정도였다. 탈수로 고생하는 여행객들이 많은지 호텔 로비에는 유리로 된 음료 디스펜서에 시원한 얼음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얼음물 안에는 특이하게도 레몬과 함께 길고 얇게 썰린 오이가 들어있었다. 레몬이 들어간 얼음물은 흔하게 봤지만 오이가 들어간 있는 건 처음이라서 신기하고 궁금했다. 레몬과 오이 덕분인지 물은 유독 시원하고 개운했다. 뜨거운 라스베가스 거리를 걷느라 한껏 바삭해진 후에 쾌적한 호텔 로비에 들어와 그 레몬 오이 얼음물을 마신 순간은 내 인생의 만족스럽고 시원한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될 만했다.



창 밖 풍경이 그림 같았던 호텔 객실. 아주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체크인하고 올라온 호텔 객실은 너무나 맘에 들었다. 아늑한 조명에 욕실에는 큰 욕조가 딸려있었고 침대는 넓고 깨끗했다. 특히 창 밖 풍경이 굉장히 멋졌는데, 멀리로는 사막의 풍경이 보이고 아래로는 골프장과 주차장이 한눈에 보였다. 그 장면이 너무 새롭고 광활해서 라스베가스는 창문이 만드는 장면까지도 화려하구나, 싶었다. 메인 스트립에서 거리가 좀 있는 만큼 비슷한 가격에 더 컨디션이 좋은 방에 묵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만족스러웠다.


라스베가스로 오던 버스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이 있어서 그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안 그래도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일행이 생겨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혹시나 해서 챙겨 왔지만 많이 걷느라 잘 신지 못했던 굽 높은 샌들도 신고, 옷도 가장 예쁜 옷으로 골라 입었다. 일행과 함께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도 여러 가지 시켜서 먹어보고,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명소도 구경하면서 라스베가스의 밤을 맘껏 즐겼다. 라스베가스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더 밝고 화려해졌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갈 때가 됐다. 다른 일행들은 메인 스트립에 있는 호텔에 묵는 터라 나만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일행은 늦은 시간에 돌아가는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라스베가스의 불빛에 경계심이 흐려진 건지 마냥 괜찮다고 했다. 아까 호텔에 들어갈 때 임시정류장에서 그럭저럭 걸어갈 만했던 게 생각나서 별 걱정 없이 버스에 탔다. 문제는 내가 묵는 호텔로 가는 버스가 두 종류였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두 가지 버스는 모두 호텔 앞에 정차했지만 기존 정류장이 있는 구역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각 노선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임시 정류장이 두 군데 생겨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그 버스는 오후에 탔던 버스와 다른 노선이었고 나를 또 다른 임시정류장에 내려주었다. 그 두 번째 임시정류장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 있었다.


공사하는 곳 바로 옆이어서 그런지 두 번째 임시정류장은 꽤 으슥했다. 거의 빨갛게 보일 정도의 주황색 가로등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서 상대적으로 내가 가야 할 호텔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정확한 길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호텔 빛을 따라서 방향을 잡고 걸었다. 길을 걷는데 반대편 도로에 차 한 대가 서더니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Do you want a ride? 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꾸미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친절을 베푼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무서웠다. 최대한 빨리 걸으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신은 높은 굽 신발이 너무 불편하고 발이 아팠다. 다행히 들어선 골목 끝에 호텔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발 밑이 꺼졌다!




나는 구덩이에 빠졌다. 길 한복판에 웬 구덩이인가 했더니 그쪽도 공사구간에 포함되는 것 같았다. 구덩이 주위를 따로 끈으로 둘러놓거나 하진 않고 그냥 라바콘 몇 개만 세워놓아서 목적지인 호텔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걷던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 그대로 빠진 거였다. 천만다행으로 구덩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도 다리를 접질리거나 하지 않고 가벼운 찰과상만 었다. 나는 그저 아주 놀랐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난생처음으로 구덩이에 빠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겨우겨우 호텔방에 돌아와 다친 부분을 간단히 치료하고 있는데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사람들에게 구덩이에 빠진 사실을 말했더니 다들 걱정하면서도 조금 어이없어했다. 버스에서 서로 말을 트게 된 것도 나에게 어떤 사건이 있어서 그랬던 건데 나에게 자꾸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신기하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엄청난 일들은 아니지만 여행을 하면서 사소한 사건들이 자주 생겼다. 그 이후의 일정에서도 고장이나 취소, 시스템 오류들이 빈번했다. 만족스럽게 묵었던 호텔에서도 결국 체크아웃하는 날엔 온라인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다며 체크아웃 명부를 수기로 작성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해프닝들이 생기는 게 조금 지치고 당황스러웠지만 지나와 돌아보니 그 덕에 더 생생하게 많은 장면들을 기억하게 된 것 같다.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다는 말이 있는데, 덕분에 나는 재미없을 틈 없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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