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를 주지 마시오.' - 제가 준 게 아니에요.
라스베가스에서 있을 일정 중 가장 큰 건은 바로 그랜드캐니언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이 워낙에 인기 있는 명소이다 보니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나는 여행 시작 전 한국에서 미리 투어를 예약했는데, 여러 블로그에서 한인 투어를 다녀온 후기들을 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처음으로 해외 장기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에 도취해서 현지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선택했다. 각 투어에 모두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해도 좋겠지만, 나에게는 현지 여행사 프로그램이 나름대로 새롭고 특별한 체험을 해본 기회였다.
투어를 떠나는 당일, 호텔로 셔틀차량이 픽업하러 왔다. 그랜드캐니언 사우스림은 라스베가스에서도 거리가 꽤 멀어서 아침 일찍 출발했어야 했고, 전날 늦게까지 일정이 있었던 나는 굉장히 피곤하고 졸린 상태로 셔틀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셔틀을 타고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된 셔틀차량이 몇몇 호텔을 돌면서 투어 프로그램 참여자들을 태우고 버스 터미널에 모이는데 그곳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목적지에 따라 본격적으로 버스에 탑승하는 식이었다.
내 이름은 영어권 사람들이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편이라 대부분 미스 전긴 혹은 미스 전진으로 불렸다. 그날도 역시나 명단을 확인하는 직원이 부르는 전진 소리에 일어나 무사히 버스로 전진했다. 그때 나는 복도 쪽 좌석에 앉았고 내 옆에는 할머니 한분이 앉으셨다. 통로 건너 자리에는 젊은 어머니와 8~9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탔는데 알고 보니 셋이 한 가족이었다. 나는 할머니께 자리를 바꿔드리냐고 물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셨고 나는 애매하게 그 가족 사이에 앉아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5시간 정도 이동하면서 그 가족은 중간에 앉은 나를 번거롭게 할까 걱정되었는지 서로 살며시 물건을 주고받으려 했었고, 나는 나 때문에 그 가족이 불편할까 봐 열심히 비켜주고 물건을 대신 건네주었다.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나를 살피는 배려가 느껴져서 고마우면서도 송구하고 또 어색한 마음이었다.
전날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버스에서 푹 자면서 이동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행 내내 이동 중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혼자 다닌다는 생각에 긴장을 많이 했는지 늘 눈만 감은 채 잠과 명상의 어중간한 틈에 끼어 다녔다. 버스를 운전하시면서 동시에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신 기사님은 굉장히 리드미컬한 억양으로 여러 재밌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듣다 보니 흥이 나서 더 잠이 깨는 것도 있었다.
중간에 사막 느낌이 물씬 나는 휴게 지점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뷔페에 들려 점심을 먹기도 했다. 쓰고 갔던 선글라스가 부러져서 휴게소에서 급하게 선글라스를 샀다. 부러지는 순간이 너무 갑작스럽고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이 났는데 그걸 나눌 사람이 없어서, 그리고 선글라스를 함께 골라 줄 사람이 없어서 좀 아쉽기는 했다. 뷔페에서도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한 맛이 나는 수프를 먹으면서 공감할 사람이 없고, 갑자기 내리는 비에 같이 오두방정 떨면서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아주 조금 허전했다. 어쨌거나 버스는 열심히 달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는 날이 흐렸고, 점심쯤엔 소나기도 내려서 걱정했지만 도착한 곳은 한결 날이 좋아서 점점 마음이 들떴다.
도착해서 목격한 그랜드캐니언은 말 그대로 정말 그랜드 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광활하고 넓고 깊었다. 지금 다시 보니 사진만으로도 너무 멋지지만 그때는 그랜드캐니언의 풍경 사진을 찍으면서 많이 당황했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고차원적이고-정말로 차원이 다른 것처럼 보였다.- 무수히 많은 프레임이 눈앞에 동시에 겹쳐있는 것 같았으며, 내 시신경과 뇌가 인식하기 어려울 만큼 깊고 넓었는데 사진에는 평면으로 담기려니 그 모습이 제대로 담기지가 않아서 답답했다. 물론 훌륭한 사진 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좋은 카메라를 사용해서 촬영하면 위 사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최고의 사진이라도 실제로 봤던 그 모습에 비할 수는 없을 거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다.
버스 타고 오는 동안 기사님은 몇 번이나 그랜드캐니언 아이스크림에 대해 말씀하셨다. 굉장히 여러 번 강조하고 강력히 추천하길래 사실 나는 속으로 무슨 광고비를 받으시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정말로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추천한 걸 수도 있는데 나는 많이 세속적인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어쨌거나 평소 아이스크림을 굉장히 좋아했던 나는 반드시 사 먹겠다는 결심을 한 상태였다. 나와 버스의 다른 승객들은 레밍처럼 나란히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나는 딸기맛과 민트 초코칩 맛을 샀는데 색이 아주 예뻐서 맘에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관광 망원경이 눈에 띄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그랜드캐니언 헬기투어에 혹 했다가 겁이 많아 포기한 나는 대신 망원경으로라도 더 속속들이 살펴보기로 했다.
망원경을 통해 경관에 푹 빠져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어떤 여자분이 반대쪽을 가리키며 내 아이스크림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망원경 바로 옆 난간에 올려둔 내 아이스크림 앞에 뭔가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바위다람쥐였다. (사실 그냥 청설모인 줄 알았다가 이 글을 쓰기 전에 검색해보고 알았다.) 바위다람쥐는 그랜드캐니언에서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동물인데, 관광객들이 자꾸 먹이를 줘서 문제가 된다고 했다. 그 친구는 아주 귀엽게 생겼지만 야생 동물답게 민첩한 공격성이 있고 발톱도 날카로워서 조심해야 했다. 주변을 구경하는 동안 몇 번이나 바위다람쥐를 볼 수 있었어서 마냥 귀여워했는데 그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내 아이스크림을 노리고 있었다.
놀란 내가 그분께 급하게 인사하고 후다닥 다가가 아이스크림 그릇을 가져왔다. 바위다람쥐는 이미 내 아이스크림에서 초코칩을 꺼낸 이후였고 내가 가까이 가도 겁먹지 않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바위다람쥐와 나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것도 아니고 초콜릿을 먹게 된 바위다람쥐가 너무 걱정이 됐고, 이미 야생동물의 손이 닿은 아이스크림을 버려야 해서 속상했다. 그래서 바위다람쥐에게 하소연하듯이 한참 말을 걸었다. 너 그거 먹으면 안 될 텐데 어떡하냐. 야, 그렇다고 남의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먹으면 어떡해. 너 때문에 나 망원경 시간 남았는데 그냥 나왔잖아…
사람 말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한국어는 더 못 알아들을게 분명한데도 바위다람쥐는 꽤 오랫동안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먹을 것을 더 줄까 기대한 것 같았지만 당연히 나는 아이스크림을 치워버렸고 바위다람쥐는 그렇게 나와 마주하고 있다가 뒤돌아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 발걸음이 날렵하고 가벼워서 난 한시름 덜었다. 아이스크림 속의 초코칩에서 초코맛이 거의 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나도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수는 없었지만 바위다람쥐와 마주한 시간이 신기하고 새로워서 하나의 경험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라스베가스로 돌아오는 동안 승객들이 쉴 수 있도록 조명을 끈 어두운 버스 안에서 나는 체력적으로 좀 지친 상태였다. 버스 안에 걸린 TV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틀어져 있었는데 우리나라 배우 수현 님이 출연한 작품이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버스에서 깨어있던 나는 외롭지 않았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나의 여행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줬다.
커다란 국립공원에 피어있던 아주 작고 소박한 들꽃들을 발견해서 왠지 모를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라스베가스로 오기 전에 LA의 마트 주차장에서 엄청 세게 넘어져서 다리에 커다란 멍이 든 상태였는데, 돌아오는 버스에 타면서 그걸 발견한 내 옆자리의 가족들이 혹시 그랜드 캐니언에서 넘어진 거냐며 굉장히 걱정을 해주었다. 그때쯤엔 그 가족과도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져서 편안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거대한 자연 속을 혼자 다니면서도 이런 작은 스침들 덕분에 더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