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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08. 2021

마이애미 사우스비치의 윤슬

파도로 둘러싸인 작은 섬의 기억


미국 여행 중 마이애미에 들렀다. 나의 미국 여행 도시에는 모두 그 목적이 있었는데 마이애미는 바로 사우스비치였다. 바다를 좋아하다 못해 바다에 의지하는 나로서는 오롯이 바다만을 위한 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이애미 여행의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비행 스케줄 때문에 마이애미 공항에 새벽에 가까운 아침에 도착한 데다 연결된 lift(우버와 비슷한 미국의 배차 시스템) 기사님이 굉장히 강한 러시아 악센트를 써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통화할 때 애를 먹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호탕하고 유쾌한 분이었고 덕분에 미국의 크루즈 여행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이동하는 내내 낯선 악센트에 가려진 단어들을 찾아내려고 신경을 쏟았더니 도착하고 나서는 이미 기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해변과 가까운 위치 때문에 선택한 게스트 하우스는 얼리 체크인이 되지 않아서 체크인 시간까지 6시간이 넘게 로비나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른 시간에 갈만한 곳도 마땅치 않아서 자연스럽게 근처 바다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해변은 조용했고 그만큼 파도 소리가 더욱 세차게 들렸다. 기울어진 햇빛 때문에 더욱 짙은 색으로 철썩이는 바다를 보며 열대기후의 도시에서 약간 추위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때가 미국 여행 일정의 중반부였는데, 파도길을 따라 백사장을 걸으며 조금의 회한을 느끼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가 자리 잡고 앉아서 또 한참 바다를 바라봐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점심을 먹은 이후에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 로비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체크인 시간을 기다렸다. 바닷바람에 쓸려간 체력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


아침 8시에 걸었던 마이애미 해변. 밀려온 해초들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체크인을 마쳤으나 내가 묵었던 층에 전기설비에 문제가 생겨 공사를 하고, 함께 방을 쓰는 여행객들이 굉장히 격렬한 파티를 즐기는 바람에 복도에서 소란이 일기도 하고, 한밤 중에는 멀리서 경찰차 소리와 총성(공포탄이었을 거라 믿고 있다.)이 들려서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지친 상태였다. 바다에서 회복하는 사람이었지만 낯선 나라의 낯선 바다는 나를 회복시키기에는 서먹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해가 머리 위에 떠있는 낮에 나는 비장하게 해변에 갈 준비를 했다. 기대는 조금 접어놓은 상태였지만, 마치 출근 준비를 하는 것처럼 사우스비치를 위해서 장만한 수영복과 비치 원피스를 입고 등과 어깨에 꼼꼼히 선크림을 발랐다. 오롯이 혼자 하는 여행이라서 외롭기도 하고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바다를 마주하면 그래도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찾은 해변은 확실히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부족한 잠을 채우고 돌아갈 방이 있는 상태라서 그런지 거칠게 들렸던 파도소리가 포근했다. 한적한 해변에서 짙은 바다를 바라봤던 때와 달리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어서 그런지 쓸쓸했던 파도소리가 경쾌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나는 살금살금 바다로 들어갔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뽀얀 모래와 발목부터 쓰다듬는 물결이 다정했다. 파도소리 위에 자꾸만 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허리까지 물에 잠길 생각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다시 수심이 낮아졌다. 독특한 지형에 근처를 여기저기 걸어보니 가운데가 소복이 올라온 곳이 있었다. 조금 더 깊은 곳에서 물장구도 치고 둥둥 떠있기도 하고, 얼굴만 내놓고 푹 잠겨있기도 하면서 바다를 만끽한 나는 쉬기 위해서 솟아있는 작은 모래섬 가운데 해변을 등지고 앉았다.




사우스비치의 투명하고 잔잔한 수면


물속에 잠겨있을 때는 몰랐는데 얕은 수심에서 다리를 모으고 앉아 바라본 수면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파도는 내 등 뒤에서 치고 있었고 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뜬 윤슬이 평화롭게 반짝였다. 내 목에 걸린 방수팩 안 핸드폰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었는데, 내가 한국에서 마이애미 해변을 생각하며 열심히 선곡한 노래들이었다. 휴양지와 어울리는 몽환적인 음악과 파도소리,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이 어우러져서 생전 처음 와 본 낯선 바다의 모래바닥을 아늑한 작은 섬으로 만들어줬다. 반짝이는 윤슬을 만드는 햇살은 그대로 나의 피부에 닿아 밝은 빛을 냈고 그 순간 나는 정말 바다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분명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 나는 마이애미에 머무는 동안 어떤 식사들을 하고 어느 곳을 갔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사진을 보면 조금씩 기억이 나지만 구체적인 기분과 감정이 또렷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모래바닥에 앉아 물결이 움직이는 대로 조금씩 흔들리며 바라봤던 윤슬과 수평선은 언제든지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다. 그 장면을 기억하면서 나는 또 바다에 안길 시간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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