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머릿속에, 마음속에 떠나지 않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하루를 살아내는 내내 나와 함께하는 친정아빠. 내 가슴속 아픈 그 묵직한 덩어리를 이 노래가 톡 건드린 것이다.
아빠가 아픈지 올해로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처음엔 한쪽 다리가 불편했는데 점점 걷는 게 힘들어져 수없이 넘어졌다. 그때마다 아빠를 부축하던 우리도 같이 넘어지고 무너졌다. 젓가락질이 조금 불편했었는데 점점 숟가락 잡기도 쉽지가 않다. 아빠는 음식을 흘렸지만 그걸 보는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화나면 소리를 잘 치던 아빠가 처음에는 발음이 잘 안 되더니 이제는 대화조차 힘들다. 내 아이들 키울 때 아이들의 혀 짧은 소리도 나는 엄마니까 잘 알아들은 것처럼, 몇 년간은 아빠의 어눌한 말소리도 거의 다 알아듣곤 했었다. 나는 딸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오직 문자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아빠는 말을 몇 마디 내뱉으려 하다 답답함에 멈추고 그럴 때마다 나는 미안함이 차올라 알아들으려는 노력을 멈춘다.
나 어릴 때 웃어주지 않던
나 어릴 때 놀아주지 않던
나 어릴 때 함께 울어주지 않던
나 어릴 때 손잡아주지 않던
나 어릴 때 애주가로 무섭기만 했던 아빠.
그땐 몰랐는데 이렇게 다 자라서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술 먹는 아빠가 너무 싫어서 술 못 먹는 남편과 결혼했는데
그 남편이 내 딸에게 하는 걸 보니, 내가 너무 가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면서 받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오히려 아빠에게 주느라 부단히 도 애쓰는 내가 안쓰러워
다음 생에는 자기가 내 아빠가 되어주겠다는 남편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얼마 전 아빠는 요양병원에 가셨다. 8년 차에 접어드니 점점 더 일상생활이 힘들고 위험해 가족들의 힘으로만은 도저히 감당하기 쉽지가 않았다. 한동안은 죄책감이 나를 매일 짓눌렀다. 언젠가 엄마에게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차라리 아빠가 어디가 아파서 내가 장기이식을 해줄 수 있어 낫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해서 낫게 해주고 싶어”. 그만큼 간절하고 아렸다.
지금도 삼시세끼 식구들 밥 해 먹일 때, 커피 한잔 마실 때, 꽃을 볼 때, 자는 아이들 얼굴 들여다볼 때마다 그 순간마다 아빠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은 안 넘어졌는지 오늘 반찬은 뭐가 나왔는지 오늘 하루는 잘 보냈는지 늘 생각한다.
며칠 전 병원이 싫어 집에 오고 싶은 아빠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에 갈까?”
대답을 못한 못난 딸이다. 조금 더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을 때 답장 할게 아빠. 주말에 복숭아 가지고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