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개봉도 못해보고 사라진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고, 어렵사리 개봉했어도 흥행은커녕 홍보 뉴스 한 꼭지 타보지 못한 영화도 수두룩할 것이다. 이런 영화 중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쉬운 영화를 하나 꼽자면 단연 이 영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플로렌스라는 미망인이 남편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외진 바닷가 마을 하트 러버에 서점을 연다. 작은 마을 공동체가 종종 그러하듯 이 마을도 소위 지역 유지를 자처하는 인간이 있고 마을 공동체랍시고 대를 이어가며 그 유지를 둘러싸고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는 무리가 있다. 또 그런 무리들이 싫어 공동체와 떨어져 자신의 상처를 품고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도 있고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마을에 무슨 서점이냐며 타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책방은 그럭저럭 꾸려진다. 지역 유지인 바이올렛이 그 서점을 문화센터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실현키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기 전까지는. 화병이 날까 싶어 영화의 세세한 내용을 중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서점은 문을 닫고 플로렌스가 떠날 때 그 낡은 집은 불에 탄다.
공동체가 외면한 존재
여운이 길다. 그 여운은 외로움의 그림자다. 책을 사랑하는 플로렌스와 중년 신사 에드먼드 브런디쉬는 외롭다. 두 사람은 책을 매개로 소통하지만 서로의 심리적, 물리적 공간을 존중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물리쳐야 될 감정도 아니고 타인이 함부로 들이닥쳐 철거하고 청소하듯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외로움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에겐 그럴 자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공동체 속에서 외롭지 않은 이들도 실은 외롭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수다를 떨고 연애하고 사교계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렇게 서로가 공고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이들도 그 내면은 황폐하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는다.
사교계를 들락거리는 것이 소통의 질과 양을 높이는 건 아니다. 한 마을에서 같이 농사를 짓고 계절을 겪으며 나이를 먹는다고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고 같은 감동과 생각을 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교 활동으로 외로움이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부와 계급으로 형성된 위계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지적/경제적/사회 자본의 소유 여부와 그 소유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이러한 불균형은 앞서 말한, 소통 없는 커뮤니케이션과 그 장(場)을 관례와 장식으로 격하시킨다.
개별 구성원, 즉 개인과 주체의 생각이 이런 관례와 장식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름 고유의 의견을 갖고 있어야만 하고 그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존중되어야만 한다. 개별 의견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 영화의 주민처럼 지역 유지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면, 그 공동체는 전체주의, 파시즘의 물결에 휩쓸려 살게 된다. 책 속의 외로움을 선택한 이가 이런 파시즘적인 마을 들어오자, 소위 외삽(外揷) 되자 공동체는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불안을 가져오기에 외삽된 존재는 탄압된다. <북샵>의 마을에서 행해진 일은 그 탄압이 불러온 파국이다.
고유한 존재의 탄생을 가로막는 것 - 필독서
필자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부모들이 애 교육을 어찌 시켜야 할지 난감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학 나온 부모는, 한 반에 절반은커녕 3분의 1도 안 됐던, 고등학교만 나와도 고학력 축에 들었던 시절이었다. 이렇다 할 교육 정보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어디서 얻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육아의 노하우라면 몰라도 급속히 성장하고 변화하는 사회에서 아이 교육의 노하우와 정보를 찾을 곳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담임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아이의 미래가 결정됐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열심히 백과사전과 전집류를 사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계몽사 등에서 수십 권짜리 어린이 백과사전이나 위인전집, 문학전집, 과학만화 전집 등을 내놨다. 영업 사원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알음알음 이웃에서 이웃으로 비슷한 전집들이 꽂혀갔다. 가난했던 필자의 집에도 그렇게 백과사전과 위인전집 따위가 있었던 걸 보면 그 전집의 선택이 아이 교육에 막연한 부모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 그러나 절박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필독도서 또한 이 절박함을 해소해 주기 위해 나름의 사명을 갖고 세상에 나왔는지 모른다. 유명 대학은 물론이고 연구소, 각종 공공 기관, 언론사까지 연령별, 직업별, 시기별로 필독도서, 권장 도서 목록을 쉴 새 없이 가르쳐 준다. 아이가 학교가 들어가니 학년 별로 권장도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들 여전히 자녀 교육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거 보면, 늘 하는 얘기지만 세상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또 어찌 보면 하나도 안 변한 것 같기도 하다.
고유한 존재를 가로막는 것 - 시장의 인문학
필독서와 백과사전의 강박을 간직한 어른은 백과사전적 지식을 향한 열망을 키우게 된다. 모든 질문에 답을 갖고 싶다. 박학다식이라는 말이 듣고 싶다. 결국 이런저런 지식을 잘 정리한 책을 찾게 된다. 자기 분야에 인문학이라는 포장지를 씌우고 싶다. 그러나 인문학 경영이니 광고니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정해진 목적이 있는 행위가 한 개인의 고유의 답을 찾는 인문학과는 맞지 않는다. 인문학이 길을 잃고 나만의 새 길을 찾는 것이라면 광고나 경영은 생존과 경쟁을 위해 세상에 맞는 길을 선택하고 타자를 압도하는 것이다.
독서, 더 나아가 인문학 공부의 결과는 측정불가의 그래프 없는 성과이고 척도 없는 성장이다. 그래서 채사장이나 최진기 등의 책을 읽어 세상의 모든 상식을 다 알려고 하는 것은 인문학의 여정으로 가는 지도가 될 수 없다. 그건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파의 강박, 그것도 오만을 동반한 실패한 강박이다. 그들의 책은 어쩌면 관광지만 아이콘으로 표현한 관광지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한병철이 말한, 관광 스폿을 떠도는 여행자를 위한 지도 말이다.
그러나 그 지도는 신의 뜻을 알고 나에 길을 알아가기 위해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몸으로 열어가며 나아가는 순례자에겐 아무 쓸모가 없다. 인문학이 이러한 허기진 순례의 여정과 같다면 내가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나보다 더 많이 알거나 다른 걸 아는 이를 만나 내 무지가 확인되는 순간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그 앞에서 내 무지를 고백하고 그의 지식의 혈관에 질문의 송곳니를 박아 넣고 앎의 흡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도 학문도 다 문을 향한다. 그 문과 그 문을 열고 맞이할 새로운 세계의 가치를 만드는 것도, 그 가치를 찾는 것도, 그것을 찾기 위해 문을 여는 것도, 그 세계로 들어갔다가 그 문이 아님을 알고 닫고 돌아선 뒤 새로운 문을 향해 용감히 나가는 것도 결국 개인의 몫이다. 인문학의 그 열려 있는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은 결국 질문 없는 주체인 것이다. 시장과 필독서의 인문학은 그저 좌판처럼 그것들을 나열해 줄 뿐이다.
상품화로 사라진 것
90년대의 재즈 상품화가 찰리 파커와 존 콜트레인, 디지 길레스피의 난해함을 시장의 변두리로 몰아내고 재즈를 키치화 했듯이 상품화된 인문학도 인문학의 본질을 두꺼운 책 뒤로 묻어두고 “키치화” 됐을지 모른다. 이런 키치화 된 “무엇”은 언제나 해석의 난해함과 쓴 맛의 교훈, 잔혹한 결말을 삭제한다. 아이들의 명작 동화가 원작의 흉측한 부분은 삭제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잘 편집된 명작 동화 세트가 아이들의 동심을 달달하게 코팅하듯이, 아이들의 소꿉놀이 세트의 식칼이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그 모양새만 칼인 것처럼 상품화된 인문학도 우리의 입맛과 상품성을 위해 쓴맛과 흉터를 남길 수 있는 날카로움은 잘라내어 저 강단과 재야에 묻어 뒀는지 모른다.
결국, 어쩌면, 인문 도서의 범람 속에서 빈곤해진 인문학의 책임은 허름한 창고에 달린 샹들리에처럼 돈과 주목을 끌기 위해 아무 데나 인문학 타이틀 갖다 붙이는 이들이 그 책임의 한몫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또 오바마 전 대통령 내한 때 우리가 마주쳤던 기자들의 질문 없음을 탄생시킨 질문 없음을 당연시하는 사회와 교육도 그 책임의 일부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모두 같은 문틀을 맞춰지기 위해 애쓰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특별한 모든 아이들을 평범한 보통 아이들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열정적인 흉내 내기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유한 존재를 가로막는 것 - 고독하지 않은 독서
영화에선 나온 “서점에선 누구도 외롭지 않다.”는 말은 서점을 방황하는 이는 서점 밖에선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읽혀야 한다. 그러니 외로움의 도피처로 인문학 모임이나 독서클럽을 선택할 일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그러니까 토론과 논쟁 없이 두루뭉술한 말의 상찬 뒤 뒤풀이나 하고 헤어지는 사교모임 같은 인문학모임은 등산 후에 막걸리 한 잔 하고 헤어지는 친목 도모를 위해 형성된 산악회와 별 다를 게 없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프랑스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자리에 이야기 길라잡이로 초대받은 적이 있다. 나름 묵직한 영화라 꼼꼼히 보고 논쟁적인 이슈를 들고 갔다. 감독을 비판하는 내용도 얹어 갔고 말이다. 영화를 보고 이런 질문과 논쟁거리를 던졌더니 다들 뜨악한 표정이었다. 앞의 영화 목록을 봤더니 이해가 갔다. 이 영화를 제외하곤 묵직한 영화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유행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런 종류의 독서모임과 인문학 모임은 책의 선택과 커리큘럼을 대중의 입맛에 맞춘다. 애들 명작 동화 같은, 긍정과 성취가 넘쳐나는 탄산음료 광고를 닮은 시장과 트렌드에 영합하는 이런 인문학은 과일 향 가득한 라들러 맥주를 닮은 흐트러짐과 흔들림을 허락하지 않는 인문학이다. 그 인문학은 외로움과 같은 고유한 감정 또한 허락하지 않고 일상에 균열을 내지도 않는다. 플로렌스 같은 낯선 외부자를 만들지도 않고 공동체의 흔들림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시장의 인문학은 부정(否定)이 없는 인문학이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인문학은 상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 붐이 일어난 후 우리 사회가 더 나아졌는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저 쓴 맛없는 인문학과 그런 모임에서 찾아야 한다.
고유한 존재의 가치
고유한 존재는 외롭고, 외롭다는 감정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 물론 영화에선 “책을 읽을 땐 그 안에 살게” 되기 때문에 “누구도 서점에서는 외롭지 않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서점에서 외롭지 않은 이는 서점 밖에선 외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주체의 고유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필연이고, 규범적 도서 목록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책 세상과 고유의 사유 체계를 만들려는 이의 운명이다.
그 외로움을 알면서도, 딸이 서가에서 방황하게 놔둔다. 딸과 같이 서점에 가지만 이걸 읽어라, 저걸 읽어라 하진 않는다. 친구에게 듣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눈여겨본 책을 찾고 있으면 어디에 있다고 알려줄 뿐이다. 딸은 그렇게 서가를 서성이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면 그걸 꺼내 들고 읽고 다시 꽂아놓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맘에 드는 책 서너 권을 챙겨 아빠에게 가져온다. 되도록 다 사주려 하지만 너무 성의 없이 만들어졌거나, 내용이 부실한 책은 분명한 이유를 말해주고 다른 걸 골라보라고 한다. 아이는 납득하고 서가로 다시 가서 서성거리길 반복한다.
그렇게 제 나름의 책을 보는 안목을 만들고 있다. 이 또한 나보다 십몇 년은 빠른 것이니 부럽다. 방학을 맞아 읽을 책을 찾을 때 마찬가지다. 필독도서 목록이 함께 나온다. 아내도 찾아 보내고 학교에서도 보낸다. 그 목록을 손에 쥐어주고 필요한 책을 찾은 뒤에는, 끌리는 책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이렇게 우연히 책과 만나는 순간을, 우치다 타츠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책과 눈이 맞는 것이라고 했다. “책방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책과 눈이 맞는’ 일이 있습니다. 저자 이름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고, 서평도 읽지 않았는데 ‘책과 눈이 맞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눈이 맞는 책은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운명처럼 만난 책이다. 다시 우치다 타츠루의 말을 빌리자.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 여름방학 과제로 읽어야 해서 읽은 책도, 찬사 가득한 서평을 받은 책도 안 됩니다.”
이렇게 우연히, 운명처럼 만난 책들로 한 인간의 사유는 고유해진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재판들에서 우리가 요구한 것은, 인간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판단뿐이고, 게다가 그 판단이 자기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만장일치의 의견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과 완전히 어긋난 것일 때조차도,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그렇다. 이 개별적인 사유, 고유한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판단을 갖게 된다. 저 영화에서처럼 사람들 무리의 중론에 휩쓸려 자기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 고유한 사유를 간직한 인간의 역할에 대해 <정신의 삶>에서 한나 아렌트는, 디시 이렇게 말했다. “‘사유의 바람’의 구체화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을 말하는 능력”이며 이 능력으로 인해 주체와 주체가 속한 공동체는 명백한 “판단이 탁자 위에 있는 흔치 않은 경우에도 최소한 자기를 위해 파국을 방지”하게도 한다고. 한 개인의 고유한 사유는 사적인 파국만 막는 것이 아니다. 저 영화 속 작은 마을, 그 공동체의 파국도 막을 수 있다.
자기만의 인문학 레시피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플로렌스가 배를 타고 마을을 떠날 때 서점은 불에 탄다. 그 서점에서 일하던 소녀가 어른의 부조리한 세계를 목격한 후, 주인공을 부두에서 배웅한 후 그 길로 돌아가 서점에 불을 지른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이들에게 서점이 필요 없고, 독서가 부재한 곳에 문화센터가 추구하는 문화가 임재할리 없다. 소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독서와 인문학 또한 그렇게 불을 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타버린 뒤 남은 빈 터에, 낯설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새로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최진석은 인문학을 사람이 그리는 무늬라고 했다. 수유너머의 멤버들이 쓴 <불온한 인문학>에선 문화교양주의를 벗어나서 세상과 현실, 구조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을 만드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했다. 결국 책을 읽고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과거의 그 무늬를 깊이 알아 지금 내 인생의 무늬를 좀 더 낫게 그려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려진 개인의 인문지도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유의 레시피가 된다. 그렇게 각자가 더 나은 무늬를 그려나가고, 고유의 삶의 레시피를 축적해 가면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다양한 맛이 공존하는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