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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03. 2024

레몽 아롱의 자유와 평등

동해선에서 읽은 책 87

알지만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모르는 사람. 학자나 저자도 마찬가지. 레몽 아롱은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 본 적은 없다. 그의 글을 인용한 책을 읽어 본 기억만 있을 뿐. 그렇다고 읽고 싶어서 검색을 해보거나 서점을 들락거리며 찾은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사서 읽었느냐 물으신다면 앞선 글에서 썼듯이 지난 화요일, 충동구매를 했기 때문.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강연이었기 때문.


“우리는 모두 어떤 자유들은 누리지만, 모든 자유들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자유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유들을 행사하는 것을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막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대중 집회를 조직하려고 할 때, 집회가 개최되려면 다른 집회들을 금지하거나 우리 집회를 막는 다른 집회들을 막아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를 위한 자유는 대개의 경우 그 반대급부로 다른 무엇인가 또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제한이나 금지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8     


자유는 자유를 막는다.

최근 한 단체의 이름을 듣고, 그 철학의 동의여부와 상관없이, ‘야. 이름 잘 지었다.’하고 감탄했었다. 이름하야 <거룩한 방파제>. 멋지지 않나? 이름은 이렇게 지어야 한다. 이들은 기독교를 근본에 둔 안티 동성애 단체다. 퀴어 축제를 저지하고 더 나아가 동성애의 물결과 그 범람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둘 다 자유다. 동성애를 하는 것도, 그와 관련한 행사를 하는 것도 자유지만, 그 동성애를 싫어하는 것도 동성애 관련 행사를 저지하려는 것 또한 자유다. 저자도 책 속에서 말하듯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뭘 하건 자유다. 물론 혐오감을 유발할 수도 있고 내 신념에 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인, 그러니까 물리적이며 재산적인 피해, 법적으로 보호받는 내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라면 허락되어야 한다. 내 자유 또한 같은 이유로 허락받을 테니.    

 

이쯤 해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저 문단에 있는 내용이다. 내가 뭔가 할 자유는 남에 자유를 막음으로써 생길 수 있다는 것. 좀 우스운 예를 들어보자. 우리 동네에 하루에 서너 번 정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노인이 있다. 문제는, 이 노인, 늘 같은 코스를 오가면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는다는 것. 그것도 아주 높고 크고 경쾌한 목소리의 경상도 아가씨의 안내로 말이다. 그 아가씨의 안내가 끝나면 당연히 그 정도 볼륨으로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갈 때의 멘트는 외우고 있다. “쫌만 더 가면 오른쪽으로 가래이. 이자 다 왔네. 조금만 가면 집이네.”     


이 노인이 시끄럽게 음악을 듣고 내비게이션 안내를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활개 칠 자유는 동네의 카페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자유와 서재에서 조용히 카피를 쓰거나 이런저런 글을 쓰고 싶은 내 자유를 막음으로써, 엄밀히 말하면 침해함으로써 보장된다. 결국 자유인의 자유는 법에 의해 통제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전에,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자유시민의 미덕이 깨어 작동한다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작동되어 자신의 자유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자발적으로 이뤄지겠지만... 알다시피 인간은 근본적으로 야만적이기에, 법이 작동한다.     

“이 자유들 중 무엇이 전형적인 자유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말했지만, 나는 자유를 단수로 말하기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자유는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좋은 사회에 대한 관점을 구축하는 것, 말하자면 다양한 자유들 간에 위계를 설정해서, 우리가 보기에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대로 좋은 사회를 규정하는 자유들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간단하게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우리 눈에 본질적으로 보이는 자유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P.30.     


선택된 자유, 그 선택의 토대와 가능성

우리는 자유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그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좋은 사회에 대한 공통되고 최대한 통일된 일반 상식 하에서, 그 선에서, 그 내에서 선택된다. 또 다른 하나는 저자가 말했듯,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아래 그 자유의 종류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기버>나 <이퀼리브리엄>에서 보듯이 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된 목표,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손쉽게 개인의 자유를 규제하고 제한한다. 직업, 의상의 색깔, 취미 활동 등등. 이 영화들은 그 극단의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21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사회에도 그 자유의 양상과 형태를 규정하는 뭔가가 존재하고 있다.      


좋은 사회에 대한 소위 공유된 상식과 이데올로기라는 거시적 틀과 함께 우리의 자유를 규제하는 “장치”들은 무수히 많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에 따라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고, 지역, 직업, 신념 등으로 자신의 자유를 자율 규제한다. 물론 그런 틀 없이 사는 사람은 방종(放縱)에 빠지기 쉽다. 남에 눈치 안 보고 크게 스피커를 튼 채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그 노인처럼 말이다. 젊어서든, 늙어서든 이렇게 자유의 선이 존재하지 않는 이를 두고 우리는 소위 교양이 없다, 분별없다, 상식이 없다고 말을 한다. 야만의 경계 이쪽에 있는 이의 자유는 사람다운 자유다.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자유.

“사실 오늘날 자유주의와 심지어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절차’에 대한 형식적인 관념에 지배되고 있다. 그것이 시장의 절차이든 권리 보장의 절차이든, 절차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사회 구성원들이나 시민들의 성향과 관계없이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행동은, 엄밀히 말하자면 얼마나 용감한지, 공정한지, 신중한 지 등 주요 미덕의 정도에 따라 평가될 수 있고, 평가되어야 하는 행동은 이제 우리들 사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미덕은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우리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고 우리의 권리를 보장할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64(피에르 마낭)        

  

미덕의 실종, 존중과 존경의 상실

학교와 관련한 일련의 뉴스를 보면서, 그리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 학교를 겪으면서, 특히 최근 아이를 통해 알게 된, 학교와 초등학교 교사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숙고하면서, 난 학교에서 어떤 근본적인 무엇이 사라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사라짐의 원인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다.


교육감이 바뀌면 그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선출직 지자체장이 바뀌면 그 성향에 따라 알아서 모든 정책의 기조를 바꾸는 시청과 구청/군청의 공무원들처럼, 교사들은, 특히 그 변화의 효과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변화의 파도에 치이는 일선의 교사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교육철학과 신념, 교대 시절 가졌던 이상도 잃게 된다. 몇 년만 있으면 학교를 옮기니 당연히 학교와 그 학교가 속한 지역 사회에 대한 애정도, 관심도 없다. 학생에 대한 애정? 글쎄... 무사히 학교에서의 임기를 끝내고, 별 다른 민원 없이 한 학기, 한 학기 마치는 것이 가장 우선이지 않을까? 그래서 궁극적으로 직업에 대한 애정은 있어도 직업에 대한 사명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조직이건, 그 직업, 신분이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미덕이 없으면, 또 그런 미덕이 있으리라고 사회의 일원에게 기대를 받았던 이들과 공동체와 조직이 그 미덕을 상실하면, 그 미덕을 대신할 복잡할 절차를 수립하게 된다. 그 절차가 양심과 용기와 윤리와 미덕을 대신하여, 심지어 그 주체를 대신하여 일을 한다. 결국 그 직업의 주체는 절차 뒤에 숨는다. 교사들이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가정통지문과 교육청의 공지를 보내는 것도, 학부모가 학교에 들어오는 절차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자신의 개인 번호나 사무실 번호가 아닌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한 톡으로 소통하는 것도 이 “절차”라는, “합리적 절차” 뒤로 숨는 것이다.      


절차 뒤에 숨은 사람을 존경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양심과 철학과 미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 학칙과 절차를 앞세우고 교사로서의 철학과 양심과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숨기는 사람을 스승으로 여길 수는 없다. 무너진 교권의 내면엔 복잡한 사건들이 녹아져 있는지 모른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교육감, 그에 따라 함께 파도치는 학부모들의 성향,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교사와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어려웠던 교사들, 결국 지자체장의 임기말년에 공무원들이 하듯이 그렇게 복지부동하면서 절차 뒤에 숨어 학교에서의 임기와 더 나아가 정년을 채우기로 마음먹게 되는 교사들.... 이런 것들이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결과가 오늘의 학교를 만들어낸 건 아닐까?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고 권리를 보장할 규칙과 절차만이 살아 있는, 결국 생명력을 잃어버린 좀비 같은 학교를... 이런 생각들을 이 책을 읽으며 해 봤다.


사족...

상반기에 두꺼운 책, 까다로운 책을 주로 읽었다. 하반기를 한 달 앞둔 6월엔 좀 얇은 책을 읽어보려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여하간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선택됐다. 참고로 피에르 아낭은 레몽 아롱의 강연의 편집과 딸려 실린 해제의 집필을 맡은 학자다.     


하반기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새로운 걸 해보려고 준비 중에 있다. 겸사겸사 인스타그램 계정도 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고 팔로우도, 친구도 없다. 한 달 정도는 그냥 이런저런 검색어로 검색을 하고 맘에 드는 게시물에 하트만 눌러주면서 그 안에 나라는 인간의 캐릭터를 구축해보려 한다. 하루에 십 분 정도 주기적으로 들어가서 출판사와 독서모임과 서평과 같은, 글쓰기와 책과 관련한 게시물만 보고 있다. 야한 여성의 사진이 실린 게시물에 하트를 막 눌러주면 이런 나의 시도는 말짱 꽝이 될 텐데... 벌써 걱정이다.     


이 책은, 오늘 베란다에서 다 읽었다. 역자의 말을 빼면 백 페이지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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