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86
“인간이 모순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받는다면, 모순의 존재 자체가 부인되어야 한다. 조화를 회복하고 모순을 없애는 게 개인적 삶에서는 합리화의 역할이고, 사회적 삶에서는 이념(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합리화)의 역할이다. 인간의 정신이 합리적인 대답과 진실에만 만족한다면 사회적 이념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구성원의 대부분이 공유하는 생각, 혹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권위체가 제시하는 생각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다. 따라서 이념들이 조화를 모색하며 구성원의 합의나 권위체에 의해 지지받는다면 인간 정신은 크게 진정되겠지만, 인간 자신까지 완전히 안정되지는 않는다.”P79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움과 자발성을 객관적인 목표로 지향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성숙한 분별력과 자발성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 또 자아를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심각한 결함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나 다수의 구성원이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결함’이란 현상이 존재하게 된다. 개인을 그런 결함을 다수와 공유하기 때문에 그 결함을 결함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경험, 말하자면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의 안전이 위협받지는 않는다. 풍요로움과 행복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까닭에 적잖은 것을 상실하겠지만, 그 정도는 그가 알고 지내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며 얻는 안전감으로 상쇄된다. 심지어 그의 결함이 그가 소속된 문화권에 미덕으로 추어올리며, 그에게 크나큰 성취감까지 안겨줄 수 있다. 칼뱅주의의 교리가 사람들에게 야기하는 죄책감과 불안감이 대표적인 예다. 구원이냐 영벌(永罰)의 저주냐에 대한 끝없는 의혹에 짓눌린 사람,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채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PP318~319
“우리 시대의 도덕적 문제는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다. 우리가 개인의 중요성과 특이성에 담긴 의미를 상실하고, 우리 자신이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길을 자초하며,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를 상품으로 취급하며, 우리 자신의 힘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에 우리 시대의 도덕적 문제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사물이 되었고 우리 이웃들도 사물이 되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그런 무기력을 이유로 우리 자신을 경멸한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믿지 않는다. 물론 우리 자신도 믿지 않고, 우리 자신의 힘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도 신뢰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의미에서의 양심도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을 보고,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 틀림없이 목적지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 유목민과 같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지만, 모두가 우리와 똑같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용기를 잃지 않는다.”,P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