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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31. 2024

자기를 위한 인간 - 에리히 프롬

동해선에서 읽은 책 86

프롬의 미덕

그의 글은 쉽다. 시대를 뛰어넘는다. 내 경우, 최근에서야 프롬에게 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사회 분석과 현대인(그 당시의 현대인)에 대한 분석에서 전혀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책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책도 도대체 언제 쓴 건지 찾아봤다. 1947년이다. 47년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고 한국 전쟁은 시작도 안 했을 때다. 그런데 그의 사회에 대한 통찰은 지금에도 유효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신경증과 강박증에 대한, 그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윤리를 다른 무엇에 맡겨버리는 현상에 대한 그 모든 통찰이.       

   

“인간이 모순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받는다면, 모순의 존재 자체가 부인되어야 한다. 조화를 회복하고 모순을 없애는 게 개인적 삶에서는 합리화의 역할이고, 사회적 삶에서는 이념(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합리화)의 역할이다. 인간의 정신이 합리적인 대답과 진실에만 만족한다면 사회적 이념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구성원의 대부분이 공유하는 생각, 혹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권위체가 제시하는 생각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다. 따라서 이념들이 조화를 모색하며 구성원의 합의나 권위체에 의해 지지받는다면 인간 정신은 크게 진정되겠지만, 인간 자신까지 완전히 안정되지는 않는다.”P79     


<자유로부터의 도피>, 그 2탄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연장선상에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앞의 책은 현대인(프롬 당시의 기준으로) 왜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같은 전체주의자와 광적인 종교 지도자와 스탈린 같은 독재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의지를 맡기고 따르는, 그 이유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이 책, <자기를 위한 인간>은 그 탐구를 인간의 윤리 문제로 끌고 왔으나, 저자가 밝혔듯이 앞의 책에서의 논의의 일부가 반복된다. 질문의 근본이 같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람은 왜 자기라는 존재 자체를 만끽하지 못하는 걸까? 왜 자기 내면의 소리에 따라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걸까? 왜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기댈 수 있는 권위-이념, 종교, 사회, 공동체의 신념-에 맡기는 걸까?      


그 문제의 답을 저자는 몇 가지 나열한다. 앞서 단락에서 보여준 역사적/공동체적 윤리와 권위의 존재, 인간의 존재 조건 중 하나인 성격과 그 지향의 여러 종류, 양심의 두 종류(권위주의적 양심과 인본주의적 양심), 쾌락의 종류(타자의 도구가 되어서 누리는 쾌락, 스스로 누리는 쾌락)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움과 자발성을 객관적인 목표로 지향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성숙한 분별력과 자발성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 또 자아를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심각한 결함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나 다수의 구성원이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결함’이란 현상이 존재하게 된다. 개인을 그런 결함을 다수와 공유하기 때문에 그 결함을 결함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경험, 말하자면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의 안전이 위협받지는 않는다. 풍요로움과 행복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까닭에 적잖은 것을 상실하겠지만, 그 정도는 그가 알고 지내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며 얻는 안전감으로 상쇄된다. 심지어 그의 결함이 그가 소속된 문화권에 미덕으로 추어올리며, 그에게 크나큰 성취감까지 안겨줄 수 있다. 칼뱅주의의 교리가 사람들에게 야기하는 죄책감과 불안감이 대표적인 예다. 구원이냐 영벌(永罰)의 저주냐에 대한 끝없는 의혹에 짓눌린 사람,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채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PP318~319     

완벽해 보이는 결함(?)

-다 그렇게 살면 문제없다. 딸이 크면서 남자아이들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엿듣는다. 부산과 울산 남자 애들 중 몇몇은 열 살이 넘어가면 욕을 달고 산다. 최소한 목소리라도 커진다. 안 그런 아이들은 대체로 아빠도 그런 사람이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렇다. 욕을 하고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고 친구를 만나면 3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며 심지어 그 회동의 마무리는 노래방에서 아줌마를 부르는 걸로 끝나야 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그건 결함이다. 그런데 다들 그러면 그건 “그들 다움”, “그 지역 남자다움”이 된다. 딸의 남자 학우 중엔 전혀 안 그런, 그런 “다움”이 없는 애들이 있다. 그 “다움”이 없는 것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별종, 아웃사이더다. 그러나 그런 애들은 여자 애들하고는 잘 통하는데, 그 “다움”을 장착한 남자 애들하고는 서먹한 경우가 있다. 그 결함이 없기에.     


“우리 시대의 도덕적 문제는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다. 우리가 개인의 중요성과 특이성에 담긴 의미를 상실하고, 우리 자신이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길을 자초하며,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를 상품으로 취급하며, 우리 자신의 힘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에 우리 시대의 도덕적 문제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사물이 되었고 우리 이웃들도 사물이 되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그런 무기력을 이유로 우리 자신을 경멸한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믿지 않는다. 물론 우리 자신도 믿지 않고, 우리 자신의 힘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도 신뢰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의미에서의 양심도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을 보고,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 틀림없이 목적지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 유목민과 같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지만, 모두가 우리와 똑같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용기를 잃지 않는다.”,P357.     

나다움

매달 마지막 강습 일, 약 십 분 정도 일찍 끝난다. 피니쉬 라인에서 몸을 식히면서 요즘 한창 접영을 배우고 있는 초급반 사람들의 접영 연습을 봤다. 그중, 평소 안면을 튼 아가씨의 접영이 눈에 들어왔다. 돌핀킥-스트로크 한 번, 두 번, 세 번-이후 힘든 지 자유형으로 마무리했다. 그마저도 접영 스트로크 할 때의 팔은 접혀 있었다. “팔을 쭉 펴야죠.”하고 내가 한 마디 했다. “힘들어요. 물이 너무 무거워요.”하고 아가씨는 하소연했다. 키가 크다. 한 165는 되지 않을까? 몸매도 모델 같다. 군살이 전혀 없다. 이 몸, 수영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물에 잘 뜨게 하는 지방도, 몸을 앞으로 보내는 근력도 없는 몸이다. 아마 수영장 밖에서는 아주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날씬하면서 스타일 있는 이십 대 여성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수영장에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몸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매일, 매 순간, 자신의 육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성취와 환희를 느끼는지 알게 됐다. 지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대여섯 살일 때, 일본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도쿄 디즈니랜드와 북해도의 후라노와 아사히카와 동물원 등을 보고 오는 일정이었다. 그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도쿄 오이다바에서 내가 사는 빌라보다 큰 건담을 봤을 때와 아사히카와 동물원에서 하마와 눈표범을 봤을 때였다. 아이는 건담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도 그 건담의 위용에 진심 어린 감탄을 내질렀다. 아사히카와 동물원에서는 물속에서 똥을 싸고 있는 하마를 보면서도, 설산 같은 위엄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는 눈표범을 보면서도 감탄에 감탄을 이어갔다. 물론 나도 아이와 함께 모처럼 여과 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직도 딸은 맛있는 걸 먹으면 미간을 찌푸리며 감탄하고 멋있는 경치를 보면 탄성을 지를 줄 안다. 그런 사진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리지도 않지만 오롯이 그 순간의 감격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리는 건 나다. 진짜 나. 프롬이 우리를 위해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바로 이 점 아닐까? 그런 이유로 프롬의 글은 니체,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들뢰즈의 철학,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느낌이다. 마치 계주의 2번이나 3번 주자 같다고나 할까?      


수영은 그 빼빼 마른 아가씨에게 자기 몸, 그 몸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견갑골을 사용하라는 강사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아가씨의 하소연이 그걸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생각보다 우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 프롬의 말처럼 관심이 없다. 수영장에 오기 전, 그 아가씨의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관심은 오직 하나였을 것이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 지금은 접영 할 때 이팔을 어떻게 꺼낼 지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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