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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20. 2024

가치 있는 삶 - 마리 루티

동해선에서 읽은 책 85

괜히 궁금했던 책

전혀 모르는 저자나 학자가 쓴 책인데 그냥 이유 없이 궁금하고 끌리는 책이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여서 구해지면 한 번 읽어보자 마음먹었었다. 그러다 동네 중고 서점에 들어왔기에 읽어 봤다.


끌렸던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저자에게 끌린 이유는, 이 미국 학자가 철학, 문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공부를 했다는 것, 그 공부를 바탕으로 젠더, 문화, 후기 구조주의, 정신 분석 이론 등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를 하고 글을 썼다는 것, 가장 끌렸던 점은 프랑스에서 그 유명한 줄리앙 크리스테바의 지도하에 정신 분석 이론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하버드에서 사회학과 비교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지적 여정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책 소개와 저자 스스로 서문에 밝혔듯이 엄청 어려운 이론을 최대한 쉬운 말로, 그 이론을 설명하는 용어를 배제한 채 설명하려 했다는 것, 그 설명이 그저 해제나 해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라캉과 니체의 이론을.... 과연, 성공할까? 난 그게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때도 우리 안에 반항심이 타오를 가능성, 특이성이라는 불꽃이 점화될 가능성은 잠재되어 있다. 이 가능성은 종종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다. 오랫동안 순응적으로 잘 살아오다가 갑자기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때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P.79.


점화(點火-Priming)

한 통의 전화일 수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의 맥주 한 잔일 수도 있다. 억지로 응한 인터뷰 자리일 수도 있다. 전날, 애인과의 싸움, 부부 싸움일 수도 있다. 딸이 롱 보드를 타는 모습을 볼 때, 딸에게 농구를 가를 칠 때, 그저 우연히 집어든 책의 첫 페이지일 수도 있다. 원인이 뭔지 모른다. 그 유명한 말처럼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고, 어느 나무에 번개가 떨어질지 모른다.


재미있는 건, 이 사건이 큰 사건이라고, 이 사건이 어떤 전환점,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기대가 되는 사건이 오히려 아무런 사건도, 작은 불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살면서 그랬다. “야, 이건 새로운 국면인데.”하고 중얼거렸던 사건의 대부분은 에피소드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설령 몇 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서사와 내러티브로 전개돼서 지루함을 남겼다.


반면 앞서 말한 우연한 사건들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아니 예측도, 준비도, 심지어 억지로 참여하거나 나가거나 해서 만났던 사건, 약속, 사람을 통해 일어났고 그 후에도 아주 예측할 수 없는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그야말로 시즌 1을 지나 CSI나 NCIS처럼 장수하는 드라마로 성장했다.


혼자 타는 불은 없다.

그렇다고 다 불이 붙는 건 아니다. 이 책 전반부에서 말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누르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덮어두고 잊고(잊으려 노력하고), 잃는다. 오늘의 그 사건을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 어지러운 무늬가 그려진 스카프에 묻은 아주 작은 먼지처럼 여긴다. 일상은 반복된다. 안온하고 무난하고 사건 사고 없는.


나이와 상관없다. 직업도 상관없다. 성별이나 종교나 출신지역도 상관없다.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함께 일하는 팀원의 사촌 형님은 아주 안정적인 직장의 제법 높은 직급에 있다. 그런데 그 형님,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벌이고 이런저런 모임에 쉴 새 없이 기웃거린다. 최근에 무슨 새로운 사업-설명을 들었는데, 도저히 내 머리로는 무슨 사업인지, 이게 어떻게 수익이 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에 참여해서 중국 상해로 출장을 갔다 와야 된다고 했단다. 중국 사람을 만나러. 그래서 접대를 위해 중국어로 된 노래를 연습하고 있다고... 그렇다.


불은 언젠간 꺼진다.

지키려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이 누구의 선택이냐가 중요하다. 저자가 썼듯이, 이 사회는 평온한 삶, 마음의 평안, 일상의 유지, 하나의 궤도로 쭉 가는 “발전적인 삶”을 칭송한다. 차곡차곡, 차근차근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형성하고 커리어를 만들어나가는 삶을 칭송한다. 결국, 내가 사건을 만나 변화를 가져가려 할 때, 말리는 이들이 등장한다. 불씨부터 겁을 내고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다.


“야, 걔는 아니야.”


“야, 니 나이에 무슨”


“직장 잘 다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된다. 그러니까 평온하고 무난하고 조용한 삶. 솔직히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고, 지금은 거의 그렇게 살고 있다. 중간에 좀 파도가 있었을 뿐. 여하간, 불은 끄지 않아도 꺼진다. 영원히 타는 불은 없다. 그게 직업, 사람, 사랑을 향한 열정이든, 몇 살에 찾아온 열정이든 상관없다. 어찌 보면 불이 안 붙는 걸 걱정하는 것보다 붙은 불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가 더 큰 걱정일지도. 불이 꺼진 다음엔, 다시 뜨뜻미지근해진다. 일도, 취미도, 사랑도.... 그래서 말리는 사람들의 말은 대체로 일리가 있다. “야, 너 그거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 그런데, 불씨가 날아왔으면 불을 붙여봐야 되지 않을까? 우린 어차피 다들 죽으니까.


“과거가 현재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재에 당면한 문제와 과거의 관련성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과거가 지닌 무게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며, 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P.191.


과거와의 대화

저자가 말했듯, 요즘 나오는 유사 심리학 책, 또는 세간에 떠도는 위로의 말들은 과거를 잊으라고 한다. 증인보호 시스템에 들어간 사람처럼 과거가 삭제된 채 새로운 나로,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뭐, 다 뻥이지. 우리가 하나의 산이라면 우리 안엔 과거의 지층과 그 지층의 퇴적과 융기와 침식과 화산의 폭발과 살았던 생물의 화석이 잠들어 있다. 오늘의 우리는 눈을 뜬 순간, 아침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과거에 사로잡히라는 말이 아니다. 저자가 조심스럽게 얘기하듯이 그 또한 경계해야 한다. 산에 얼마든지 새로운 나무를 심을 수 있듯이, 심지어 케이블카를 놓고 깎아서 골프장을 만들고 뚫어서 터널을 만들 수 있듯이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다만 케이블카든, 골프장이든, 터널이든 산이 가진 태생적 조건을 고려하며 만들 듯, 우리의 새로운 선택 또한 말 그대로 새로운 선택이 절대 아님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 선택이 과거의 무엇을 극복하기 위해서인가, 콤플렉스 때문인가, 결핍 때문인가, 보상 심리 때문인가, 죄의식 때문인가.... 이런 것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과거의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함께 가자고 다독이며 가야 한다. 마치 오랜 친구와 신세계로의 탐험을 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사족 - 흔적들, 또는 성과들

저자는 약속을 지켰다. 라캉과 바디우의 이론이 나오고 니체와 들뢰즈의 기운이 곳곳에 있지만 그들의 어려운 이론과 명사가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런 책들 있지 않나? 이론편과 실전편이 한 쌍인 책들. 마리 루티의 책은 이 철학자들의 실전편, 응용편 같다. 그래서 이 책만 읽어도 상관없지만 앞서 말한 다른 학자들의 책을 읽고 그 이론들에 대한 지식이 약간이라도 있으면 마리 루티가 조심스럽게 전개하려는 생각이, 그 글의 기원이 어디고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니체의 기운이 물씬 묻어난다. 허무주의와 초월주의에 대한 약간의 냉소....


우리는 길들여진 존재들이다. 우리는 길들이기 이전의 나를 알지 못한 채로 살다가, 어느 날 불쑥, 길들이기 이전의 나의 편린, 그 시절의 기억을 섬광처럼 마주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당황하곤 한다. 이게 나인가? 누구인가? 이럴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길들여지기 전의 나를 마주하게 될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야성의 가능성, 가능성이라는 야성을....


저자 이전에, 라캉도, 들뢰즈도, 그 이전의 니체도 같은 고민을 했다. 그 고민 끝에 우리에게 이런저런 답의 힌트를 건네줬고. 마리 루티는 그 힌트들을 그러모아 최대한 답안지를 작성하려 했다. 아주 친절하면서도 상세한. 성공인가?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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