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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21. 2024

벅차오르는 순간을 위해

수영장에 빠진 철학 69

배영 주간의 아픔

배영 주간의 목요일이다. 메인 세트는 배영 100미터에 자유형 50미터가 한 세트, 이걸 네 개 하는 것이었다. 이 앞의 웜 업이나 이 뒤의 잡다한 세트들은 이 메인 세트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불과하다.      


출석률이 좋은 요즘, 라인업은 대체로 비슷하다. 오랜만에 일찍 온 1번과 성실한 2번이 고정이고 새로 합류한 청년이 3번, 날렵한 고수 아줌마가 4번, 제법 수영을 오래 한 걸로 보이는 지난달부터 합류한 삼십 대 아가씨(아줌마인지도 모른다.)가 5번, 내가 6번을 섰다. 내 뒤로 대여섯 명 정도가 있었다. 


결정해야 한다. 네 세트 모두 쉬지 않고 하기 위해 피치를 조절할 것인지, 아니면 이 중 한 바퀴 정도는 쉴 걸 생각하고 약간 피치를 올려 내 앞에 사람과 간격을 없앨 것인지. 난 전자를 선택했다. 두 번째 세트가 끝났을 때 1번이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간 모양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세트, 쉬지 않고 했다. 내 앞의 아가씨는 자유형 한 바퀴를 쉬었고 내 뒤의 몇몇도 배영 한 타임을 쉬었다.      


하소연

강습이 끝나고 나만의 쿨링 타임을 갖은 뒤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2번 아저씨가 막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고 있었다. “야~ 배영이 이게 안 힘든 것 같은데, 힘드네요.”, “하모, 배영이 힘들다니까. 이기, 물을 좀 타줘야 되는데, 마, 손을 돌리기 바쁘니까 힘들어. 다른 건, 물을 좀 타준다 아입니까. 근데 이건 물을 몬 타겠어. 이기, 좀만 타주면 수월킨데. 연습을 할 땐 좀 되는 데, 마, 그때뿐이라. 아마 1번 말고는 다 힘들걸?”     


그의 말이 맞았다. 새로 합류한 청년도 쿨링 타임에 오늘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야~ 진짜? 난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하고 내가 맞장구를 쳐 줬다. “아임니다. 저도 힘들었습니다.”하고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의 대화를 둘 사이에서 듣고 있던, 저번 달부터 합류한 덩치 좋은 남자가 “아니, 오늘은 좀 뒤에서 하니까 수월 턴데.”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끔 그래야 돼. 좀 아픈 척도 하고 힘든 척도 하면서 뒤에서 할 때도 있어야 좀 할만하지.”하고 내가 역시 맞장구를 쳐줬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중급 A반 1번과의 대화

2번과의 대화는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아주 잠깐 이어졌다. 그동안 중급 A반의 총각이 내 건너편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2번 아저씨가 라커로 들어가자 그 청년이 말을 꺼냈다. “그렇게 수영을 잘하시는데 아쉬운 게 있으신가 봐요.”, 난 대번에 대답했다. “당연하죠. 어디 만족이 있나. 조금씩 고쳐가면서 하는 거죠.”, 청년은  다시 샤워를 이어나갔다.      


내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동안 그도 샤워를 끝냈다. 그는 그 반의 1번이었다. “이제 올라와야죠. 아줌마들하고 백날 해봐야 실력이 느나, 체력이 느나.”하고 툭 말을 던졌다. “안 그래도 우리 강사가 올라가라고 하데요.”, “그렇지. 성에 안 차죠?”하고 내가 이어 물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자유형 백 미터 하면, 75미터쯤 되면 꼬리가 잡혀요. 그래도 앞에 한 3번까지는 속도랑 체력이 비슷한데 그 뒤로는 차이가 너무 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서 다 하고 쉬는 시간이 길고 해서 좋은 점도 있는데...”     


난 단호하게 말을 받아 이었다. “우리가 뭐 백세까지 산다고 하지만, 살면서 막 숨을 헐떡이면서 운동할 수 있는 세월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래도 80까지는 어디 아픈 데 없이 살아야 하는데, 움쩍 거리기 싫어하는 환갑 넘은 업계 선배들이 뒤늦게 운동한답시고 골프채 휘드르는데, 그게 쉽겠어요? 연습장 가는 날보다 병원 가는 날이 더 많을걸? 그전까지, 오십 대까지 운동해 놓은 걸로 버텨야지. 체력도, 근력도... 아직 삼십 대죠?”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네, 아직...”


“그럼 걱정할 것도 없네. 우리 반에서 한 이삼 개월만 버티면 내 앞에 설 걸? 우리 반도 이제 사람 많아져서 할 만해요. 그리고 우리 1번이 막 출발하는 것 같아도 나름 규칙이 있어요. 5, 6번이 들어와야 출발한다니까. 그러니까 처음엔 그 뒤에 서서 슬슬 따라오기만 하면 돼. 나중에 체력 붙으면 뒤에 서는 게 답답할걸?”, 그는 내 말에 약간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언제 우리 반에 합류할까?     


날씬한데 근육은 없다.

어제, 아내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아내의 부하직원 중,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이 안 되는 아가씨가 있다. 그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건강검진을 한 모양이다. 근무하는 병원에서 한 데다가 결혼 전 다이어트 경험을 묻기 위해 아내에게 인바디 결과표를 보여줬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아내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몸에 근육이 거의 없는, 체지방률이 거의 80퍼센트에 가까웠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PT도 제법 오래 받아서 살도 많이 뺐었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그러면 뭐, 배운 걸로 꾸준히 운동을 하면 되지 않나?”했더니, 아내가 말하길, “그것도 습관이 된 사람이나 그러지.”했다. 전문 트레이너에게 운동하는 법을 몇 개월 동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이 습관이 안 되어, 헬스장에 발을 끊자마자 다시 운동 안 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건강 검진 문진표에서 묻는 것 중 하나가 일주일에 몇 번, 얼마만큼, 어느 강도로 운동을 하냐는 것이다. 국민 열 명 중 세 명은 전혀 운동을 안 한다. 하는 사람 중에서도 중등도, 그러니까 평소보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빠르게 걷기와 같은 운동을 20분 이상 하는 사람은 20퍼센트 정도다. 매일 고강도 운동을 하는 사람은 십 퍼센트도 안 된다.      


벅차오르는 순간

한 세트가 끝나고 레인 끝까지 걸어오는 브레이크 타임을 가질 때, 동료 회원들의 얼굴을 볼 때가 있다. 다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나도 몸이 달아올라서 수영장 물을 얼굴과 몸에 끼얹으며 걷곤 한다. 이렇게 전력을 다해 운동을 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벅차오른다는 표현은 감정적인 상황에 쓰이는 말이다. 해부적으로도, 겉으로도 보이지 않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상황을 맞이할 때 우리는 이런 말을 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은 흔치 않다. 그런데 수영을 하다 보면 ‘이런 상황이 그런 상황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4,50대의 남녀가 그야말로 몸매가 다 드러난 수영복을 입고도 불온한 생각은 1도 없이, 오직 전력을 다해 50분의 수영을 하고 난 이후, 각자에게 찾아오는 육체적, 감정적 상태에 이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수영을 할 땐 아무리 힘들게 해도 땀이 안 보여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땀 흘리는 운동을 한다. 흐르는 땀을 보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아직도 움직이면 근육이 일을 하고 그 덕분에 이렇게 사우나에 들어온 것 마냥 땀이 나는구나. 몸이 제대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몸, 언제든 움직일 수 있지, 언제든 운동을 할 수 있지, 언제까지나 건강하겠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에 맞게 몸을 전력으로 써 본 사람은 그런 생각을 안 한다. 어제의 전력은 오늘의 환상이라는 걸 안다. 십 년 전의 전력은 오늘 새벽에 꾼 꿈 같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하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자본의 축적만큼 근육의 축적이 중요하다고 해서 근테크라는 말을 쓰지 않던가? 그러나 그 말, 그 필요보다 더 중요한 건, 몸을 쓰면서, 그때만 느낄 수 있는 환희와 “벅차오름”이다. 그 감정, 그 육체적 부풀어 오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만 하는 게 무엇이겠나? 뭘 뭐야. 숨이 차도록 몸을 써보는 거지. 노동이 아니라 오직 육체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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