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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29. 2024

철학으로 저항하다.-다카쿠와 가즈미

동해선에서 읽은 책  90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 철학하는 마음이라는 불꽃이 날아오기만 한다면 누구든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 P13

철학의 불꽃

딸이 거실 테이블에서 공부할 때, 마주 앉아 책을 읽는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라 지루해질 만하면 바꿔 읽기 위해 보통 세 권의 책을 쌓아 놓는데, 엊그제 딸이 그중 한 권의 제목을 보고 “아빠, 철학도 개념이 있어?”(책 제목이 <철학적 기본 개념>이었다.)하고 물었다. “그렇지.”하고 답한 후 예를 몇 개 들어줬다. 답을 한 후, 다카쿠와 가즈미의 <철학으로 저항하다>를 읽어 나가는데, 그는 철학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철학이란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록의 친구일지도.


딸은 요즘 one ok rock이라는 일본 록 그룹에 빠져 있다. 아이돌 음악만 듣다가 그게 세상의 음악의 전부인 줄 알고 살까 봐 살짝 걱정되어 이들의 영상 몇 개를 보여줬다. 그 이후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다. 어느 날 딸이 내게 말했다. 학교에 갔다 와서 행복하기 위해선 제로베이스원의 노래와 성한빈의 얼굴이 필요하지만, 학원에 가기 위해 힘을 내야 할 때는 one ok rock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딸은 멤버의 이름은 물론이고 생년월일, 고향, 자라 온 배경까지 조사해 머리에 넣어 뒀다. 애초에 라이브 영상을 보여준 탓인지 딸은 뮤직 비디오가 아니라 콘서트 영상을 찾아보며 이들의 음악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들의 음악의 대략 이십여 년의 역사를 말이다. 그야말로 록의 불꽃이 튀어 날아온 것이다. 저자가 말한 철학하는 마음의 불꽃이 날아오는 순간은 이렇게 우연히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그전과는 다르게 펼쳐질 테고 말이다. 그 불꽃은 언제 날아올까?

“철학이란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P23.

무기력과 냉소를 넘어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다들 당연하게 여기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세상을 일순간 다르게 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잡은 물고기를 중간 상인에 헐값에 넘겨 정작 어부인 자신들은 늘 가난하고 중간상인만 부자가 되는 현실의 이상함을 알아챈 어부,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들, 자신들의 주식이었던 연어를 잡을 권리를 뺏긴 아이누족, 신의론과 운명론에 저항했던 볼테르와 커트 보니것, 당연하고 자명하며 심지어 법으로 보장된 흑인 인권의 즉각적인 성취를 점진적으로 이뤄나가자며 긴 시간 뒤에 찾아올 변화를 제시하면서 오늘의 변화를 유예시키는 온건주의자들과 맞선 마틴 루터 킹....


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마주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상은 다수/주류(Majority)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만든 이는 보지 못하고 소수/비주류(Minority)만 볼 수 있다. 저자가 말했듯 다수/주류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며 구별되어 표시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특권을 공기처럼 물처럼 누리고 있기에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당연히 누려야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설령 알더라도 동정과 연민을 보낼 뿐 함께 저항하거나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6,70년대 미국 온건파 백인 목사들처럼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함께 인내하며 천천히 세상을 바꿔나가자고 한다. 이런 반응은 그나마 나은 것이다. 대부분의 다수/주류는 침묵하고 누린다.


더불어 대다수의 소수/비주류는 냉소하고 무기력에 빠진다. 다수/주류로부터 주어지는, 그들이 선심 쓰듯 제시하는 불완전하며 부족한 대안들에 만족하며 산다. 아니 최소한 만족하려 애쓰며 산다.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며 말이다.


철학이라는 저항

저자는 지금도 시위에 나서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철학으로 저항한다고 주장하는 건 어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이다. 철학을 운운할 시간에 현장에 뛰어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가? 저자는 푸코의 예를 든다. 푸코는 놀랍게도 이란 혁명 때 호메이니 쪽(엄밀히 말하면 이 대오의 온건파)을 지지했다. 친미성향의 부패한 팔라비 왕조를 몰아내는 혁명이 비록 이슬람 원리주의로의 회귀를 예감케 했음에도 말이다(실제로 호메이니 정권을 잡은 후 이란은 그런 나라가 됐고 현재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푸코의 이란 혁명의 간접적 참여와 관련 르포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비난에 대한 일종의 대답으로 그는 한 편의 글을 썼는데 저자는 이 글을 제법 길게 인용한다.


인용된 단락의 첫 줄은 이리 시작한다. “봉기는 쓸모없다. 무엇을 하든 결국에는 마찬가지다.”... 이 글의 마무리는 이렇다.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의미를 갖는 데는 그런 목소리가 존재하고 이들을 침묵시키려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철학이라는 저항은, 철학으로 하는 저항은, 얼마 전 볼리비아에서 세 시간 만에 수습된 쿠데타보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인다. 사회면에도, 정치면에도 뉴스로 다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그것으로 하는 저항은 “세상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고 더 나아가 세상 그 자체를 갱신한다. 후자의 갱신이 더디게 올뿐이다. 그 후자의 갱신이 더디게 온다고 해서 안 온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 생각하고 인식의 갱신을 멈출 순 없다. 저자의 메시지다.


세계의 다른 분면, 또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가능성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더 나아가 소위 철학이라는 행위를 하는 건 다르게 보기 위함이다. 아니, 다르게 봤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아니, 다른 걸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마치 딸이 록을 통해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맞이한 것처럼 말이다.


변화는 두렵다. 두려움엔 이유와 근거가 있다. 그 이유와 근거들이 두려움을 납득시켜 여기에 머물게 한다. 실제로 그렇다. 얼마 전 쓴 글에 나온, 중급반 1번과 얼마 전 샤워장에서 잠시 또 대화를 나눴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운동 하시나요?”, “아뇨. 그냥 수영만 하죠.”, “아니 몸이 좋으셔서...”, “젊었을 때 만든 몸을 수영으로 유지하고 있는 거죠. 수영이 이게, 물만 제대로 잡고 킥만 제대로 차면 다른 근육 운동이 필요 없거든요.”


그가 물었다. “그렇죠. 그런데 전 좀 하다 보면 팔이 아프더라고요.”, “그건 이유가 여러 가지인데, 일단은 스트로크 자세가 문제일 수 있고..., 이 이야기는 일단 우리 반에 올라와서 마저 합시다.”하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그가 심각하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고민 중인데... 최근 지인이 배드민턴을 하다가 대동맥 파열로 급사했거든요. 그래서 좀 충격을 받아서...”,


난 그의 말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운동을 많이 하고 건강하던 지인이 배드민턴을 하다가 죽었다면 고민이 될 만하다. 물론 우리 수영장은 주말엔 하지 않으니 아무리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일주일에 고작 다섯 번, 매번 50분 정도만 할 수 있으며, 배드민턴은 수영과는 달리 힘을 순간적으로 쓰기도 하고 심지어 서너 시간 쉬지 않고 하기도 하며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할 수도 있으니 수영과는 그 위험성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찾아온 사람에게 다른 가능성이 들어갈 여지는 없으니....


결국, 갱신은 두 가지 맥락에서 가능하다. 하나는 당연한 것, 살아온 데로의 삶을 의심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금지된 것, 두려운 것, 한계 주어진 것의 진실을 알아내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이후, 갱신 이후의 세계는 당연히 다른 세계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저자가 “물은 물고기의 엘리먼트”라는 말로 표현했듯,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나라는 세상을 이루는 근본 조건도 변한다. 물에서 뭍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엘리먼트의 변화다.


인식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나 하나 그렇게 인식했다고 해서 바뀔 리가 있겠나? 인식은 전염되고 전염은 연대를 부른다. 연대의 대오는, 그 대오의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거리에서, 책에서, 글에서, 온라인에서-되는 행진은 더 큰 연대와 대오를 부르고, 그 연대와 대오의 역사는 언젠간 새로운 세계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니 지금 뭔가를 하지 않으면, 변화를 촉구하지 않으면 도래할 역사는 끝없이 지연된다.


철학의 입문서가 아니다. 입문서를 가장한 철학의 사용법이다. 앞서 딸이 물었던 것처럼, 어떤 철학의 개념을 외우고 이해하기 전, 이론과 학자와 학파와 학계와 어려운 철학책이 존재하기 전, 우리에게 불쑥 찾아오는 철학의 불꽃에 관한 책이다. 그 불꽃이 언제 찾아오는지, 그렇게 찾아온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책이다. 친절하게 썼기에 쉽게 읽힌다. 그러나 절대 가벼운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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