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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24. 2024

에로스의 눈물 - 조르주 바타유

동해선에서 읽은 책 89

남는 게 없다는 거짓말     

두껍고 어려운 책은 바다를 떠도는 빙하와 같다. 다음 페이지를 향해 느리게 나아간다. 열매를 먹기까진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과실수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완독의 열매를, 행간으로 솟아오르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긴 시간을 들여 느리게 더듬어 가야 하다. 이 느림에 질려 책을 던져버리기 않기 위해, 프로야구의 5회와 6회 사이의 클리닝 타임처럼, 치어리더의 특별 공연처럼 얇고 가벼운 책을 읽는다. 종종 다시 읽는 책도 있다. 바타유의 책을 그렇게 또 잡았다.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4년 전에 읽었다. 당시의 서평이 네 줄 뿐이다. 그러니 서평이라 할만한 글은 이게 처음일 듯.      


책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를 하라는 둥, 이미지를 그리라는 둥 여러 노하우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 그래도 읽기 싫은 책인데 이런저런 잡다한 노하우는 책을 등지게 하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논문을 쓸 거 아니면 그냥 읽으면 된다. 읽으면서 어떤 형태로든 즐거우면 된다. 요즘엔 혼자 영화를 봐도 이만 원 가까이 쓴다던데, 그 돈에 비하면 책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다가, 책이라는 부피도 남지 않나? 그러니 머릿속에 엄청난 걸 남기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


그러지 않아도 남는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종종 놀라는 것이, 요즘 내가 하는 생각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읽은 책은 이미 당신의 말과 삶 속에 있다. 그러니 세간의 권유와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읽고 싶은 데로 읽어라. 읽는 데로 내가 된다.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기원이자 시발점인 성 본능 속에 주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인간에게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되며, 그 앞에서 인간은 공포에 휩싸일 뿐이다. 그러한 공포 상태가 ‘작은 죽음(petite mort)' 속에 주어진다. 내가 그 ‘작은 죽음’을 온전히 겪을 수 있을까? 최종적 죽음을 미리 느껴 볼 수 있을까? 발작적인 쾌락의 폭력이 나의 심장 깊숙한 곳에 있다. 동시에 그 폭력은-나는 지금 이 말을 하면서 전율한다. - 죽음의 심장이다. 그것이 내 안에서 열리고 있다”  


바타유의 표적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다. 이 짧은 분량 속에서 자신의 논지를 단숨에 치고 나간다. 마치 펜싱의 칼끝처럼 급소를 향해 쭉. 칼은 두 개의 표적을 향한다. 하나의 표적은 역사다. 구석기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에로스가, 성적인 쾌락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그리고 종국엔 어떤 신세를 겪게 됐는지, 그 굴곡의 역사를 재빨리 짚어 본다. 다른 표적은 그것의 양면성이다. 에로스가 갖고 있는, 성적 쾌락이 갖고 있는 무서운 양면성.      


“금기는 스스로 금지시키는 대상에 불길한 동시에 신성한 불길을 비춘다. 한마디로, 종교적인 빛을 비춘다. 금기는 자신이 금지하는 대상에 고유의 가치를 부여한다. 내가 금기의 대상을 멀리하려 할 때, 어쩌면 정반대로, 이미 나는 그 대상에 자극된 게 아닐까?”     


바타유는 “불길한”이라는 단어에 각주를 단다. “음란함의 빛은 범죄의 빛과 마찬가지로 음산하다.”라고. 바타유는 에로스가 금기 시 되기까지의 역사의 행로를 따라간다.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에서부터 드러나는, 인간만이 인식할 수 있는 죽음과 에로스, 그 두 개의 것을 품고 있는 예술과 삶, 노동과 전쟁, 종교적 제의(祭衣)와 광란의 축제의 변화를, 그리고 이것들 안에 공존하고 있는 생산과 파멸에 대한 공존할 수 없으나 공존하는 열망에 대해.     

 

이런 극단적 양면성은 우리의 일상에도 있다. 친숙하다. 각성을 향한 커피 사랑과 취함과 이완을 원하는 술에 대한 갈망, 안정적인 가정에 대한 소망과 일탈에 대한 불온한 욕망, 휴식을 원하는 주말의 나와 외출과 밤샘을 원하는 주말의 나.      


우리의 이런 양면성은 바타유가 말한 진정한 극단적 양면성의 은유이거나 모사품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이 말한 죽음 충동처럼 우리에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죽음에 대한 열망이, 삶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환멸이, 육체와 타자에 대한 갈망과 환멸이 공존한다.


안전한 삶, 매끄러워진 에로스

공존의 현실은, 현실적인 공존은- 그 발생이 동시든 순차적이든-불가능하기에 음(陰)과 암(暗), 혼란과 악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터부시되고 은폐된다. 은폐된 “것”들은 은밀하게 변신하여 일상 속에서 불쑥 등장했다 사라진다. 록 페스티벌의 광기에서, 클럽의 신체들 속에서, 3차까지 가는 만취 속에서, “작은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는 전시된 오르가슴인 포르노 속에서.     


상품이다. 안전하고 완벽하며 매끄러우며 보기 좋은 것들, 전시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린 그것들에 둘러 쌓여 산다.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말했듯, 이런 것들의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이자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를 추구”하고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하며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한병철이 바타유를 인용하며 말했듯, “에로틱한 것의 본질은 더러움”에 있기에 에로틱은 유사 에로틱, “깨끗한 포르노그래피”로 대체된다.      

에로틱은 더러움뿐만 아니라 자기 파괴와 분열, 짐승의 야성적 본능 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린 대체로 본연의 그것, 날 것의 그것, 길들여지지 않은 그것과 마주하길 두려워한다. 그 결과, “에로틱”조차 구매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매춘은 - 누가 사든 - 겁쟁이의 선택이다. 그 선택은 돈을 지불한 만큼의 광기, 아니 광기의 흉내를 만들어주고, 문을 닫고 나오면 두고 사라지는 “소비자”로서의 나를 통해 실천되는 맨 정신으로 “만” 살고 싶다는 부질없는 바람을 이뤄준다. 


뿌리 깊은 공포

한 사회의 청춘들이 결혼을 안 하고 애를 안 낳는 현상에 내재된 근본적인 심리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공포다. 타자와 미래와 사회에 대한 공포, 살아온 나와 현재의 나를 잃는 것에 대한 공포, 미래의 나를 내 맘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 계획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 궁극적으론 “나”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에로스에 쾌락과 주체의 상실에 대한 공포가 공존하는 것처럼, 사랑에도, 더 나아가 결혼과 출산과 육아에도 행복과 불행이, 다른 나를 만날 가능성과 지금의 나를 상실한 가능성이 공존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 공존의 한 쪽만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외면한다. 문제는 지금의 나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 가능한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의 나를 유지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격년으로 건강검진을 받아도 언제 걸렸는지도 모르게 병에 걸릴 수 있다. 집값이나 물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널뛰고 광기의 운전사가 모는 자동차가 사각지대에 밀고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결국엔 공포가 크면 클수록, 불안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우린 안전한 삶을 암시하는 것들을 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다. 선택을 제한한다. 안온한 일상을 지키려 애쓴다. 예외는 없다. 질서다. 그러나 그건, 강박이다. 초월의 환상으로부터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죽음과 분열과 사랑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쓰는 안간힘이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애쓰되 너무 애쓰지 마라. 꿈꾸되 꿈에 얽매이지 마라. 미래로 향하되 오늘의 기쁨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길 바란다.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도 말되, 동시에 숨이 차도록 사랑하고 으스러지도록 안는 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린 모두 언젠간 늙고 병들고 죽고 사라지니...


카페에 앉아 공부를 하는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를 지금 만날 수 있다면 가서 만나고 와라. 그 부피를 가진 사랑을 한껏 맛보고 와라. 이 맛도 없는, 각성을 위해 선택한 커피 대신, 죽음과도 같고, 영원한 잠과도 같은 그 사랑의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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