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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15. 2023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 우치다 타츠루

동해선에서 읽은 책 28


'내가 앞서서 죄를 짊어지겠다'고 하는 '나'의 자처만이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내는 것은 신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인 것이다.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255.


이성은 환각의 뒷면을 알 수 있도록 각성해 있을 의무가 있다. 잠들어버려서는 안 된다. 철학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레비나스, <관념에 도래하는 신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서 재인용.


보통 서문은 재미없다. 

그런데 이 서문부터 재미있다면 당연히 그 책은 재미있다. 재미를 떠나서 그 정도로 서문을 논리적이고 재미있게 쓴다면 당연히 뒷 장을 읽어야 한다. 심지어 이 책은 역자 서문도 재미있다. 창원대 이수정 교수가 번역했는데, 글도 잘 쓴다. 그러니까.. 저번에 말했듯이 이건 불공평하다. 심판이 공도 잘 차는 형국이다.


광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

...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왜 욕망하는가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돈을 쓰지 못해 안달이고 브랜드라면 사족을 못쓰며, 신상이라면 목숨을 거는가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한다. 광고를 오래 공부했고, 그걸 업으로 삼는 나도 당연히 이 질문을 30년 동안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건 삼십 대 중반쯤이었다. 그때 비로소 진짜 나는 누굴까? 하는 딱히 사는데 중요하지 않고, 카피 쓰는데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했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알 수 없고, 그도 날 다 알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래서 그 깨달음 이후에 "저 멀리 있는 신은 날 알까?" 하는 의문이 들어 교회 나가는 걸 그만두고 나라는 인간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라캉에서 레비나스로.. 불이 번진다.

왜 그러냐면... 흠... 일단 나를 알기 위해 주체는 뭐고, 주체의 욕망이 뭔지 알아야 했다. 난 왜 이걸 욕망하고, 왜 이건 두려워하고, 왜 이건 끊지 못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 앎은 왜 사람은 저걸 욕망하고, 왜 저걸 혐오하고, 왜 저런 양태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한 십 년 라캉의 언저리를 맴돌며 그를 공부한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이제 진짜 그의 텍스트로 가볼까 생각 중이었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묘하게 타인에 대해 연민과 혐오가 동시에 커져간다는 걸 느꼈다. 삶을 꾸려가는 모든 이의 수고에 안쓰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왜 저 사람은 이 상황에서 저런 결정을 하고, 왜 저런 옷을 입고, 왜 저런 행태를 이런 장소에서 보이는 걸까, 하는 의문이 혐오로 이어졌다.


이 연민과 혐오를 이해하기 위해 

결국 나를 벗어나 타자의 문제로 이어졌다. 이 또한 먹고사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지만 말이다. 그러다 레비나스라는 양반이 이쪽으로는 제법 고수라는 소문을 들었고, 그렇다고 본문으로 훌쩍 들어갈 수 없으니 그에 대해 쓴 책을 찾아봤다. 그러다 다카다 아키노리의 <나를 위한 현대 철학 사용법>을 읽게 됐고, 이어서 우연히 서점에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를 포획해서 몇 년을 뜸 들이다 최근에서야 읽게 됐다.


그래도 여전한 먼 타자에 대해

누군가 안내해줘야 했다. 그때 만난 책이 바로 이 책,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이다. 내가 생각하는 타자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많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 특유의,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치다 선생께서 설명해 주셨다.


이해의 대상, 관조의 대상, 평등의 대상도 아닌

타자는 뭘까? 이 책에서 빛의 은유가 많이 나온다. 이 빛의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계몽의 영어 표현, enlightenment, illumination과 불어 표현  Lumières를 염두에 둬야 한다.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관용하고, 수용하고.... 그 모든 건 내 이성이 하는 일이다. 심지어 배격하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증오하는 일조차 이성의 일이다. 그 후의 폭력 또한 결코 야만으로 유래된 것이 아니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말이다.


타자의 윤리란, 인간의 윤리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 잘 이해할 텐데... 아니 불교 신자도 잘 이해할지도.. 우리는 이 세상에 책임이 있다. 그걸 기독교에선 원죄라 하고, 불교에선 업이라 한다. 그러나 우린 살면서 이 세상의 고통과 아픔, 문제에 대해 그것이 내 책임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그것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 귀책사유가 있는 사람을 찾아 그 책임을 물으려 한다. 그것은 정의(justice)다. 그러나 인간의 윤리란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어도 그것에 책임을 느껴 그 쓰레기를 줍는, 그 치움의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고 나서는 그곳에서 발생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인간의 윤리, 타자의 윤리란 그런 것이다.


레비나스는 위대한 랍비의 제자였다.

탈무드 해석의 권위자다. 당연히 유대인이고, 홀로코스트를 체험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의외로 성경적인데, 기독교적이지는 않다. 그러니까 성경 본문에 담긴 은유로 우리의 철학에 화두를 던진다.


책과 사람은 비슷함을 새삼 알게 된다.

읽는 순간, 마주하는 순간 존재하는 대상. 내가 읽은 것이 이 책이고, 그 책의 의미는 이렇다고 주장하는 순간, 책은 타인에게 읽혀 다른 게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같은 책을 읽고 다르게 말하는 사람과 만나 무한정 토론을 해야 하고, 그것이 어쩌면 독서의 궁극적 쾌락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랍비들이 성경과 탈무드의 한 문구를 갖고 밤새 토론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 주장이 유일한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주장이 차곡차곡 쌓여 텍스트의 두께를 더 두텁게 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말하기 전에 타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내 주장을 위해 타자의 주장을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알던 토론 방법과 다른 토론 방법을 제시한다.


사족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어려운 걸 쉽게 풀어 설명하는 재주가 남다르다. 전에 읽었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읽으면서도 느꼈었다. "이 양반, 이 네 명을 잘도 쉽게 얘기하는군, 그걸 또 이렇게 얇은 책으로 잘도 담아냈군." 하며 읽었었다.


이런 책들은 한 학자에 직진하기 전에 그 둘레를 돌며 그 학자의 기운과 이론을 가늠하는 책이다. 이런 책들을 읽어가며 그 학자의 중심에 조금씩 다가가다, 어느덧 좀 가까워졌다 싶으면, "저 실례하지만 이제 레비나스 선생에 대해 읽어보겠습니다."하고 원 저자의 텍스트를 펼쳐드는 것이다.  그게 뭐 굳이 내 독서방법이라면 방법이다.


레비나스와 라캉의 텍스트는 내년 숙제다. 아.. 뭐 그 숙제를 한다고 누가 참 잘했어요 같은 도장을 찍어주거나 수료증을 주지는 않겠지만... 게다가 먹고사는데 크게 도움도 안 되겠지만... 뭐 그게 독서 아니겠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읽는 동안 즐거운 거... 뭐... 다들 애를 만들기 위해서만 섹스하는 건 아니잖아?


또 생각해 보면 그다지 돈 드는 취미도 아니다. 낚시나 등산처럼 장비나 의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조기축구처럼 부상의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여하간 그렇다는 얘기다.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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