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타자 - 엠마뉘엘 레비나스
동해선에서 읽은 책 29
이 책 산지 일 년도 넘지 않았을까? 읽다가 어려워서 몇 번 읽다 말기를 반복했다. 이번에 끝까지 읽게 된 건 아내의 책 모임에서 사주는 책으로 내가 대신 고른 책이 우치다 타츠루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걸 먼저 읽고 읽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다 스쳐서 다 읽었다.
이해 못 하는 일들
-최근영(페친인 울산의 환경운동가)씨의 플로깅의 열정을 난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성지 순례를 이해하라면 했지 저 매일 고향의 산을 오르는 의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페이스북에서 본 꼬막사진을 단초 삼아 오랫동안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서야 칼럼을 마무리했다. 그 칼럼을 수정하는 동안 이 책을 읽었다. 아직 송고전이다.
레비나스의 글과, 특히 뒤에 따라붙은 번역자인 강영안 교수의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해석이자 논문을 읽고 나서 근영 씨의 실천에 대한 내 이해가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 구경꾼...
-카피라이터는 이기적이다. 다른 카피라이터는 아마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우린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구경꾼이다. 타자를 보되, 구경꾼의 입장에서 본다. 그래서 세월 끝에 연민의 시간이 오면 그 시선의 날카로움이 무뎌져서 일선에서 물러난다. 난 태어난 곳을 포함해 제법 많은 도시를 오가며 살았고, 심지어 한 도시에서는 열 번 가까이 이사한 적도 있다. 그 태생적으로 주어진 외부자이자 구경꾼의 삶은 카피라이터의 삶엔 맞아떨어지나 저 이타적이고 고차원적인 행위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로 작용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 연민, 시간
-감독의 전화는 하루 종일 울린다. 친구, 선후배, 친척, 함께 일하는 분야별 프로들... 그는 구경꾼이 아니라 공동체의 주체다. 그는 삶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함께 커온 친구와 이웃, 친척, 그리고 그가 도운 많은 후배들로 인해 새로운 국면, 시간 속에서 펼쳐질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그런 타자다. 내가 무언가 가졌을 때 누군가는 잃지 않았을까 의심하면서 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만들어 그를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은 구경꾼의 삶이 아니다.
그 이후의 삶.
-타자와의 관계, 사랑, 에로스, 그리고 부모가 되는 사건 등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의 미래는 나의 반복이다. 살면서 계속 나라는 자아의 공간으로 반복해 돌아올 뿐이다. 자아의 밖은 무한하고, 통제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다. 그것은 불안하고, 그래서 위태롭다. 나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쓸수록,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움켜쥘수록 삶은 되돌이표다. 레비나스의 논지를 그렇게 이해했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나 같은 구경꾼이 사랑을 하고 가족을 꾸리고, 지역에서 겨우 밥벌이를 하는 동안 최근영 씨 같은 이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자신을 내던졌다. 그녀의 실천이 울산의 풍경을 어떻게 유지시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울산의 환경, 더 나아가 이 지구의 환경을 지켜나갈지 난 알 수 없다. 그 결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삶이 어쩌면 레비나스가 말한 삶인지도 모르겠다.
되돌이표 안에서 맴도는 삶이 아니라 그 악절 너머로, 그 악장 너머로, 그 곡 밖으로, 더 크게 울려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그렇게 어떤 이의 삶은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확장되고, 그 영향력이 미래에 얼마나 큰 울림을 줄지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채 살아진다.
그런 삶은 정치인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봉사하는 삶이 아니라 타자와 공동체,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삶이다. 나 같은 구경꾼은 그걸 충실히 지켜보고 최대한 그 의미를 기록할 뿐이다. 생각할수록 존경스러운... 다른 삶이다. 202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