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Jan 06. 2024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히로세 준

동해선에서 읽은 책 74


"이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을 설득하여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도, 그들로부터 패권을 빼앗아 오는 것도, 그들 전부를 숙청하여 어리석은 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하나같이 불가능하다.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이 세상의 치욕은 우리 자신이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만 씻어 낼 수 있다. 이 책에서 '봉기'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언가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히로세 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한글판 서문 중에서.



사건, 또는 계기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 본문은 2009년 1월에 있었던 용산 참사에 대한 서술로 시작한다. 서문은 2011년, 소위 아랍의 봄에 대한 짧은 묘사로 시작하고.... 백상현의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는 그 글의 목적 자체가 그러하기에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숙고가 전반에 흐르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논쟁>은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한다. 또 사사키 아타루나 아즈마 히로키, 히로세 준 같은 나와 동년배의 일본 학자들의 책 중 일부는 동일본 대지진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로 시작한다. 21세기에 나온 미국 학자와 작가들의 책들 중 일부가  9.11 사건의 의미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하듯...


일종의 갈등과 논쟁의 시발점이 있다. 봉기의 발단이 되고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들이 있다. 그 사건들은 튀니지에 있었던 사건처럼 한 사람의 죽음일 수도 있고 시대와 도시의 아이콘이었던 거대한 빌딩 두 채를 무너뜨리는 사건일 수도 있다. 또,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시스템의 목격에서 유발할 수도 있다. 심지어 68 혁명은 여자 기숙사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하라-이 대학에선 여학생이 남자 기숙사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나 여자 기숙사를 남학생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는 시위가 발단이 됐다.


관건은 그다음이다. 월가의 증권사를 향해 비난을 퍼붓던 시위대는 어디로 갔나?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반핵, 반원전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87년 서울의 봄에 앞장섰던 넥타이 부대는? 어떤  시위는 진행 중이고, 어떤 시위는 역사의 임무를 완수한 듯 보였으며 어떤 시위는 무기력하게 사라졌다.


봉기의 정신

유시민 작가가 어느 토론회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난 대선 때 보수 후보를 지지한 세대는 87년 민주화 운동의 주력이었다. 학번으로 나보다 짧게는 5,6년, 많게는 10여 년 앞선 사람들. 실제로 나에 막내 이모부는 평생 딱 한 번 데모에 참여했는데 바로 이때였다. 이때 이미 그는 대리인가 그랬다. 이모가 기가 차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학생 때도 안 하던 시위를 왜 지금 하냐며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길들여졌다. 혁명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가 길들여졌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세상은 완전히 안전해지지도 않았고 완전히 해결된 문제도 없으며, 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기업이 되라고 말하고 부채를 부추기고 있으며 현재도 그렇게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데 저 시기 맨 앞 줄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 없다. 저자가 말했듯이 나폴레옹의 엘바섬 추방 이후 왕정복고를 한 프랑스처럼 30년 전의 혁명가들이 평범한 중년이 된 것이다.


"혁명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 생겨나지만, 봉기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을' 때 생겨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문제해결 사회에서는 도래해야 할 해방의 기쁨이라는 약속 아래 피로를 불문에 부치지만, 문제 제어 사회에서 피로는 해방의 기쁨을 지속시키는 조건으로 떠오른다. 요컨대 혁명은 피로를 알지 못하지만, 봉기는 피로하다... 오늘날의 데모가 기쁨인 동시에 피로인 까닭은.... 답을 향해 가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나아가는 데모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종착점이다. 종지부가 아니라 휴지부에 불과한, 시작도 끝도 없는 데모이기 때문이다.", pp. 216-217.


봉기의 자격, 민주주의의 참여 조건

맨 끝에 저자가 한국어판에 직접 추가한 글에서, 랑시에르의 글을 인용하며 말했듯이  "모두가 모든 것에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제야 평등에 대해 겨우 말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를 살기 위해선, 그 구성원이 되기 위해선 우린 언제나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에도, 언제든지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저자가 말했듯이 지적인 존재로 지적인 활동을 하는 지성인이자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였던가가 어느 책에서 말했던,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고, 지식과 사유를 구분하며, 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다름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그 토대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학력이나 직업이 지성과 지식의 토대가 되기에는 부족하며, 앞으로는 더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출신이나 성별, 연령, 취향 등이 그 토대가 될 수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는 더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책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했듯이 역설적이게도 모두와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끼리끼리 연결하는 시대, 모두가 대화할 수 있는 시대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만" 찾아서 대화하는 시대, 아무나 대학에 갈 수 있는 시대에 지성인과 지식인을 찾기 힘든 시대다.


이 시대에 누구나 모든 것에 언제든 말하기 위해선 개인의 준비와 함께 타자의 승인, 타자의 수용이 동시에 필요하다. 저자가 레비나스의 이론을 영화의 샷으로 비유하며 말했듯이, 한 개인을 풀샷에 묻힌 역할로 해석하는 대신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보거나, 제삼자와의 대화 속에서 그의 내면을 알아가면서 그 타자의 인격을 재구성하여 그를 탈캐릭터 화하여 수용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선입견 없는 마주 봄이 아닐까?


내 한 몸도 피곤하겠지만...

그렇다. 내 한 몸도 피곤하다. 어제 뉴스에서 나온 것처럼 수원으로 퇴근하는 사람은 서울 명동에서 버스를 타면 세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다. 이렇게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과 아침, 부산의 센텀 시티 역에 내리는 청춘들과  늦은 밤 광안역에서 타는 청춘들에게 사유와 봉기를 촉구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우리가 피곤하여 내 삶에만 함몰되어 있을 때 세상은 불안정에서 불안정으로,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이어진다. 내가 원하던 안온한 세상, 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온전한 세상은 오지 않거나 지연된다.


새해 첫 주부터 이런 책을 읽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쓸데없어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며, 그래야만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이 책과 이 책에 관한 글은 그 나름의 소임을 했으리라 본다.


사족

1. 일전에 말했듯, 히로세 준은 나와 동년배다.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 아즈마 히로키, 그리고 히로세 준까지... 70년을 전후로 하여 태어났고 90년대에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비슷한 대중문화를 소비했다. 그래서 생각의 궤적이랄까... 사고방식이랄까... 그런 것들이 통하는 면이 있다.


2. 인문학이 해야 될 일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이론을 엄밀히 연구하여 잘 재단한 상태로 학계와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 둘은 그 이론을 최대한 일상어로 번역하여 동시대의 대중의 삶에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 특히 젊은 이들에게.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이 두 가지 맥락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본다. 이론을 이해하고 그 이론을 삶에 적용시켜 가는 것. 그래서 궁극에는 어떤 존재로 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약간의 답을 얻는 것, 더 나아가 그 답들을 꺼내어 서로 대화하는 것,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 세상이 그럭저럭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


3. 브런치의 독자들에게... 과거에 읽었던 책은 잘 안 올리고 있다. 그런 책을 올리다 보니 앞에 어떤 책을 올렸는지 한참 살펴봐야 하는데, 그게 또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더라. 물론 글 하나 올릴 때마다 아이콘에, 그림에, 링크에, 사진 몇 장까지 올리시는 분의 수고에 비하며 별 거 아니겠지만... 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하간 최근엔 이렇게 최근에 읽은 책을 올리고 있다. 앙해 바란다.


#봉기와_함께_사랑이_시작된다

#히로세_준

#동해선에서_읽은_책

매거진의 이전글 화폐라는 짐승 : 북클럽 자본 3권 - 고병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