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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an 31. 2024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동해선에서 읽은 책 77

같은 책, 다른 느낌... 이유는?

지난 주말,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읽다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다르다. 처음 읽었을 때랑 뭔가 다르다. 마치 처음 읽는 느낌이었다. 어지간한 소설은 다시 읽으면 마지막까지 생각이 난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러나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게다가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마치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소설을 읽는 느낌....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두 편의 단편을 읽은 뒤, 다시 레이먼드 카버를 읽어야겠다는 생각, 그렇다면 그 유명한 <대성당>을 사서 읽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딸의 이름으로

-마침 딸이 책을 반납하고 새로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야 해서 따라갔다. 온 김에 아빠도 한 권 빌려도 돼, 하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했다. 딸은 판타지 소설 네 권을, 난 <대성당>을 찾아 빌렸다. 도서관엔 이 소설집이 세 권 있었는데 두 권은 상태가 엉망이었고, 그나마 내가 빌린 것이 봐줄 만했다. 이 책이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가, 레이먼드 카버의 유명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지도.


까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에 바친 서문을 빌려와 말하자면, 난 나중에 <대성당>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 들 누군가를 위해 이 안에 담긴 단편들에 대해 시시콜콜 말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난 마치 스티븐 킹이나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는 것만큼 재미있게, 몰두해서 읽었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와 이 소설집이 앞서 말한 작가와 그들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극적인 드라마와 반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다음 장이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라는 것도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


단편, 또는 단면

여기에 담긴 단편들엔 삶의 단면이 담겨 있다. 마치 한 시간짜리 교향곡의 한 소절이 담겨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소절, 이 단면, 이 짧은 이야기가 교향곡 같은 인생 전체를, 삶의 본질과 의미를, 그것들이 담고 있는 선명한 테마를 보여준다.


<깃털들>에서처럼 우리는 순간적으로 이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확신 하에 저지르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권태와 불안에 빠질 수도 있다. 또 <셰프의 집>에서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 그래서 이 이후로는 걱정 없을 것 같은, 그런 미래에 대한 기대가 화창한 여름날처럼 찾아온 그 순간, 그 바로 뒤에 거짓말처럼 가을 같은 서늘한 기운이 닥칠 수도 있다.


그 기운 뒤에, <비타민>에서처럼 초대하지 않은 누군가가 나에 멋진 저녁을 망칠 수도 있다. <보존>에 나오는 부부에게 그러하듯 여러 사소한 불행이 아무렇지 않게, 예고 없이 찾아올 수도 있으며 <굴레>에 나오는 가족처럼 모든 걸 잃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찾아온 낯선 도시에서도 희망은커녕 더 큰 좌절을 안고 새로운 도시로 떠밀리듯 떠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긴 세월, 긴 여정 뒤에 맞은 평온한 어느 시간에, <칸막이 객실>의 주인공처럼 고통스럽게 했던 과거의 뭔가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늘의 나를 호명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순간들, 삶의 불행과 절망과 내 맘대로 안 되는 나 자신을 극복하여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그 뒤로도 삶을 계속 밀고 나갈 수도 있다. 이렇게 삶을,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끝내 살아낼 수 있는 힘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누군가의 배려와 연민, 베풂에 있는 지도 모른다. 또, <대성당>에 나오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못했던 타자와 나의 경계가 순식간에 무너지며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좌절, 다시 희망, 그러나 또...

그렇게 기운차게 삶을 이어나가도 인생의 가뭄은 또 찾아온다. 이별이 오고, 해결하지 못한 중독으로 인한 자기 환멸이 시작될 수도 있다. 완벽하리라 기대했던 세 번째 결혼도 위기에 봉착할 수 있으며 <신경 써줘>의 주인공처럼 자기 자신을 속여가며, 끝까지 허황된 기대를 품고 있는 스스로에게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 나오듯 우린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쨌거나 뭔가 하긴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해보는 거야.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인생이야. 그렇지 않아?"<신경 써줘> 중에서


방법을 찾다 보면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좌절의 한 챕터가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생을 향한 기운을 얻을 수도 있다.


이야기, 끝도 시작도 없는

다른 글에 썼듯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만든 거실 붙박이 책꽂이에 시선집 몇 권을 꽂아 놨다. 그걸 꽂아 놓는 딸에게 말했다. “책을 읽기 싫을 땐 시집을 읽어. 한 편만 읽어도 충분하니까. 분량이든, 감동이든 뭐든. 그러니 시집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완독이니 정독이니 숙독이니... 그런 것도 신경 쓰지 마 그냥 펼쳐진 곳을 읽고 덮어. 그렇게 왔다 갔다면서 읽어.”


물론, 그 이후, 딸이 그 시선집들 중 하나라도 꺼내어 읽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 사이에 꽂혀있던 레이먼드 카버의 시집 또한 그랬다. 딸은 그 이후, 묵직한 부피를 자랑하는 판타지 소설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첫 페이지를 읽으면 끝까지 달려 나갈 수밖에 없는, 그 절묘한 이야기들을.


그러나 생각해 보면 판타지든, 어떤 소설이든,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누군가, 다른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거나, 희망이 없는 세상에 마지막 희망이 되거나, 그리하여 그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 아니던가.


딸은 일상에선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 그 깨달음을 잊기 위해 판타지를 읽는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언젠간 그런 존재가 되리라, 그런 세상이 오리라 꿈꾸며 읽을 것이다. 어른이 판타지를 읽지 않는 건, 아니, 판타지를 읽지 않는 어른은 그런 일은 이 세상에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 뿐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겨우 단편이다. 모든 사람에겐 이야기가 있다. 결말지어진 이야기와 진행 중인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의 행방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이야기까지.... 이 모든 이야기들이 합해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는 동안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모른다. 모르고 죽는다.


그는 입 밖으로 연기를 조금씩 내뿜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을 하나는 짓는다는 건 알겠어" 그가 말했다. "물론 저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거야. 한 집안이 대대로 대성당 하나에 매달린다는 것도 알겠어. 이것도 방금 저 사람에게 들은 거고.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대성당> 중에서


사족

0. 이유는? 하고 물어놓고 답을 못썼다. 어쩌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었을 때, 그 의미가 전달되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단편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읽어갔다.


1. 내가 어떻게 레이먼드 카버를 읽게 됐는지 생각해 봤다.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 아닐까? 그는 두 레이먼드, 그러니까 레이먼드 챈들러와 레이먼드 카버의 팬이니까. 심지어 이 소설집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우물 에피소드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러나 저러나, 난 왜 이 두 레이먼드 중 추리소설가인 챈들러보다 카버를 사서 읽게 됐을까? 심지어 아직도 챈들러의 소설은 없다. 여전히 답은 미궁....


2. 이 소설은 베란다 독서실에서 읽었다. 날이 좀 풀린 덕분이다. 오늘 이 책의 마지막 단편 <대성당>을 읽는 동안 딸은 학원에서 빌려 온 영어 원서를 읽고 있었다.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중창을 뚫고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가 마치 십 대 시절 즐겨 들었던 AFKN 라디오처럼 들렸다. 백색 소음과 소음(엄밀히 말하면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몰랐던 미군 DJ들의 멘트) 사이에 들리던 음악들이 생각났다.


3. 당연하게도, 이 책은 집에서 읽었다. 감독은 촬영 겸, 휴가 겸 해서 지금 동남아 어딘가에 있다. 덕분에 이번 주는 본의 아니게 휴가 아닌 휴가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마냥 멍만 때릴 수는 없고. 나름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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