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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06. 2023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43

비 오는 주말, 어쩐지 구독자들이 집에 있을 것 같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불쑥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가 생각났다. 그래, 이 책의 리뷰를 올려야겠다 하고 블로그를 뒤적였는데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없다. 안 썼던 모양이다. 대신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올리기로 했다. 꽤 오래전에 쓴 총 세 편의 글을 하나로 묶었다. 사십 대 초반에 쓴 글이라 요즘의 글과는 느낌이 다르다. 아,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는 다시 읽고 리뷰를 써 올릴까 한다. 기다려주시길...


몇 안 되는 고마운 여인들에게 감사하며-2015. 6. 25     

하루키의 소설이 문학적으로 대단한지, 아니면 대중소설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아 마땅한지는 잘 모르겠다. 난 그저 그의 소설이 마흔 넘어서 맘에 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꾸준히 읽고 있다.     


열일곱에서 스물하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우정, 연애, 섹스, 대학, 그리고 시대의 고통 등등... 종종 하루키가 정치 참여 의식이 없다고 비판받는데 그는 그런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의식의 허위성, 가식성을 혐오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됐든 노르웨이의 숲은 사랑 이야기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이며 서툰 사랑 이야기. 정상인 사람도 비정상인 사람도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선 누군가에게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 뭐 그런 이야기다.     


불행히도 난 열일곱에서 스물하나 사이가 최악이었다. 정확히는 스물셋까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정말 무능했고 여자도 없었고 집은 가난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허름한 기지촌에서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중졸학력이라 방위를 받았다. 그 사이에 난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 내가 여자의 손을 잡아보건, 그래서 스물넷이나 되어서였다.      


그 후로 몇 명의 여자를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다. 섹스의 횟수는 셀 수 없지만 섹스한 여자의 숫자는 셀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다. 만취한 상태에서 모르는 여자와 섹스를 한 적도 없고, 돈을 주고 여자를 사본적도 없다.


다행히도 기꺼이 날 사랑해 준 몇몇의 여자가 있어서 마시멜로 같이 포근하고 달콤한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와타나베처럼 어떤 노래를 들으면 주저앉아 울만큼 강력한 기억을 남겨준 사람들이다. 아무런 좋은 기억도 없는 십 대와 비참했던 이십 대 초반에도 불구하고 미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은 건 어쩌면 그녀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은 정말 가난하고 아무런 비전도 없는 나를 그야말로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발되지 않고 사금 채취 하듯 쓸데없는 모래를 걷어낸 후의 빛나는 금을 발견하는 것처럼 쓰인다면 아마 그 몇 명의 여자와의 관계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소모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들은 나 때문에 인생이 꼬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를 안 만났으면 훨씬 반듯하고 정석적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와타나베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미도리가 결국 그를 구원했듯이... 마흔이 넘은 레이코가 요양원에서 팔 년 만에 나와 열아홉 살이나 어린 와타나베와 밤새 네 번의 섹스를 하고 기운차게 새 출발하듯이 나도 그녀들 인생의 어느 날에는 힘이나 위로가 될 만한 추억의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나에 서툴렀던 젊은 날의 섹스를 떠올려 봤다. 의욕만 앞서는 아마추어.... 그래도 용케 들 참아줬다. 그래도 뻔뻔하게도 바람이 있다면 언제라도 그녀들을 우연히 만나 차라도 한잔 하게 되면 "내가 만난 남자 중에 당신같이 멋진 남자는 없었어."라는 칭찬을 듣고 싶다. 그게 빈말이든 거짓말이든 난 또 그 말을 위안 삼아 중년을 버텨낼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새삼 여자들 덕에 살아남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다. 아내도, 딸도 결국 여자니까... 그야말로 기생하고 있다.     


파편잡담 - 2016. 10. 20.      

석사시절 동기와 내가 나누는 대화를 듣던 선배가 한마디 했다.

“너 네 대화는 파편적이야.”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고 있다. 상실의 시대로 번역된 것을 몇 년 전 읽었는데 불쑥 노벨문학상을 못 받은 위로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하루키의 소설을 사주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 번역된 걸 정가에 사서 읽고 있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와타나베의 매력이 뭔지... 그리고 그게 만약 하루키의 젊은 시절이라면 그의 매력이 뭐였는지 알 것 같다. 그의 소설이 환상인 것 같지만 분명 거짓말은 아니라는 게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며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멋있고 팔리는 글을 쓰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정직하게 써 내려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만들려고 한다고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조니 워커를 살려낼 만한 작가는 흔치 않다.     


중간쯤 읽는데 불쑥 남은 삶은 최대한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성적 흥분과 사랑을 혼동하곤 했다. 또 성적인 소유욕임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으로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스스로도 속을 만큼 많이 하곤 했다.     


이젠 ela savanas-내가 좋아하는 멕시코 모델이다. 검색해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같은 핫한 라틴 모델이나 플로리스트 이해리 같은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유혹-물론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해도 몸이 느리게 반응하는, 반응이나 할지 의심스러운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쩌면 더 편안하게 여자를 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후배의 전시회에서 거기서 일하는 스텝 한 명을 소개받았다. 자기 여친의 친구고 나랑 같은 동네 산다고. 그런데 요즘 여대생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인사했다. 내 나이나 신분-신분이랄 것도 없지만-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주며 대화를 했다. 그날 소개받은 젊은 여기자와 대화를 할 때도 편하게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했다.     


모든 수컷은 암컷 앞에서 나름의 전략이 있다. 새는 날개를 펴고 멋지게 울고... 사자는 다른 수사자의 씨를 받은 새끼를 몰살시킨다. 고릴라는 터프하게 동료들을 제압하고 아프리카의 큰 뿔 달린 사슴조차 머리를 들이박으며 경쟁한다.     


어쩌면 수컷으로의 기능 종료 램프가 켜진 것 같다. 그래서 참으로 담담하게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여자랑 얘기를 해도 편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뭘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없으니 대화의 전략도 없고 표정의 전략도 없다. 그냥 똑바로 보고 웃기면 웃어주고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해준다. 애초에 과시할 것-돈이나 자동차, 사회적 지위-도 없으니 말에도 표정에도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다.     


전력 잔여량이 표시되는 1.5 볼트 배터리처럼 나도 정력의 잔여량이 표시되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초에 허세 같은 건 없는 인간이라 깜빡이며 부족한 정력의 경고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스무 살 언저리 사랑과 추억에 관한 소설을 읽으며 이제는 와타나베처럼 담백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혹할 것도, 유혹받을 일도 없는 삶 밖에 남지 않게 돼서야 겨우 담백과 정직에 대해서 생각하다니 한심하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에 안도감도 느낀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안고 싶다, 라면 먹고 갈래, 쉬었다 갈래와 같은 형용사를 훅 걷어내고 살 생각을 하니 조금은 삶이 더 가벼워진 거 같다. 사랑이란 없고, 그저 타자와 주체 간의 분열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감정, 성기, 눈빛, 호르몬, 심장박동의 분열, 흔들림, 변화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포장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책 덮듯이 툭 하고 덮는다.          


그동안 나를 안아줬던 몇 안 되는 그녀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고, 아무 미래도 없던... 그저 불안하고 복잡한 생각들과 과거의 상처로 생긴 날카로운 청춘의 날들을 말없이 보듬어준 착하고 착했던 그녀들에게 고맙다. 그렇다. 참 착한 사람들이었다. 생각하면 할 수록 나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착함이 동반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 이쯤 되니 와이프는 성자의 반열인 것 같기도 하다.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2016. 10. 21.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이 발표된 후 며칠 후... 하루키가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물론 영문으로... 저 대사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가사와가 와타나베와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다.         

      

#기숙사     

와타나베가 묘사한 기숙사는 내가 살았던 기숙사와 닮은 듯 다르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기숙사는 해방 직후에 지어진 단층짜리 일본식 건물이었다. 얼핏 보면 수용소 같기도 했다. 방은 12개. 학생 수는 많을 땐 서른 명 가까이 적을 땐 스물다섯 명 안팎. 난 이곳, 403호에서 4년을 살았다. 스물넷에 들어간 대학. 거의 10여 년 만에 해보는 학교생활. 그리고 단체생활.     


그러나 그 4년을 빼버리면 내 청춘에 대해선 별로 할 얘기가 없다. 날 거쳐 간 네댓 명의 방졸과 1년 반의 동장 생활. 처음 배운 술, 현미녹차, 립튼의 홍차도... 015B와 신해철과 넥스트도, 너바나와 RATM, 후티 앤 더 블로우 피쉬도. 밤 9시부터 있던 학습의 시간과 열한 시의 점호도... 새벽 6시 반의 축구와 다 같이 몰려가서 먹던 아침식사도. 오픈하우스 때마다 수줍게 찾아오곤 하던 기숙사생 여친들의 풋풋한 꾸밈도. 기숙사 앞에 있던 페인트가 다 벗겨진 두 개의 하늘색 벤치에서 나누던 밑도 끝도 없던 수다도. 함께 보던 한일전-이민성이 결승골을 넣었던-과 박찬호의 역투, 그리고 X파일의 멀더도... 카라 한 다발을 들고 날 찾아왔었던 1학년 때 애인과 말도 안 되는 기숙사 동료들의 농담에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잘 웃어주던 4학년 때의 애인도... 모두 그 4년 안에 있다. 거기에 두고 온 것만 같다. 실제로 그곳은 대형 아파트 단지 밑에 묻혀 있다. 마치 댐으로 인해 수몰된 고향 마을처럼...     


#특공대

다시 읽으며 특공대가 궁금해졌다. 와타나베의 룸메이트.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이름도 없이. 그는 어디 갔을까? 지도를 만들고 싶어 했던 국립대 지리학과 학생. 그러다 불쑥 <다자키 쓰쿠루>가 생각났다. 그는 철도에 빠져서 철도역의 권위자가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기차역을 짓는 회사에서 그걸 지으러 다닌다. 특공대는 자신이 기차역을 좋아했다는 걸 불쑥 자각하고 그의 성격대로 꼼꼼히 전과를 준비해서 단호히 실천하건 아닐까?          


#미도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생각나게 했다. 나오코와 미도리, 그리고 와타나베. 조제, 카나에, 그리고 츠네오. 청춘의 그늘과 역동성의 양 극단의 두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선택이 아니라 그 둘을 포용해야 어른이 된다는 걸 깨닫는 청춘.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자살로 인해 그걸 받아들이지만... 츠네오는 더 성숙한 조제의 결단으로 그걸 받아들인다. 시작과 끝은 극단이 아니라 이야기, 삶, 영화, 사랑...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사건에 포함된 것이라는 것을.    

 

#비틀즈

내가 처음 비틀즈를 들은 건 초등학교 4, 5학년 때였다. 다행히도 막내 이모가 근처에 살아서 테이프로 들을 수 있었다. 앨범은 아니었고 흘러간 가수들의 명곡을 모아놓은 일종의 편집 앨범이었다. 거기서 난 사이먼 앤 가펑클, 비틀즈, 존 덴버, 카펜터즈 등을 들었다.     


와타나베가 대학에 와서 듣기 시작한 재즈들을 나도 그맘때 들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s of Blue를 내방 403호에서 틀어 놓으면 주말에 텅 빈 기숙사에 남아 있던, 재즈에 관심 없던 학생들도 그걸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빨래를 하고 현미녹차를 마시곤 했다. 내가 처음 산 삐삐의 신호음은 Lee Morgan의 The Sidewinder였다. 그걸 녹음할 때 어머니조차 어이없어하셨다. 좀 잘 풀리면 오디오를 하나 사야겠다. CD 수백 장, LP 수십 장이 날 원망하고 있다.    

 

#수영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수영을 좋아한다. 다자키 쓰크루도 와타나베도... <태엽 감는 새>의 오카다 도오루도, <해변의 카프카>의 카프카도...  수영은 혼자 해도 어색하지 않은 운동이다. 그러니까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수영장에 가서 혼자 몸을 담그고 자유형 몇백, 배영 몇 바퀴. 여기에 접영, 평영 번갈아... 그리고 IM(개인혼영) 두어 번을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몸을 이미 만든 사람이라면 일주일에 서너 번의 수영만으로도 몸을 유지할 수 있다.     


#68세대, 그리고 사적인 삶들

386세대든 IMF세대든, 그리고 유럽과 미국, 일본을 뒤흔들었던 68세대(일본에선 전공투 세대)든... 아무리 격변기를 살았던 사람이라도 사생활은 있다.     


미도리의 아버지가 관동 대지진 때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면서도 그 지진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집에 와서 다들 떨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던 것처럼 그 시대를 살았다고 다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산건 아니었다. 심지어 맞춰 산 사람도, 그 세대와 운동의 최전방에 있던 사람들도 사랑하고 섹스하고 밥 먹고 결혼했다. 그래서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은 전혀 그 시대의 고민을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대를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깨에 힘줘가며 "미시마 유키오가 도쿄대 전공투와 토론할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라고 얘기하는 인간이야말로 어쩌면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와타나베처럼 묵묵히 강의실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강의를 듣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애를 하고 책을 읽으며 그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시절을 제대로 살아낸 것일지도.  

    

#유시민, 전원책     

대화가 없는 삶에서 두 대화 고수의 대화를 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둘은 맞수지만 둘이 있기에 어쩌면 외롭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싸워도 수준이 맞아야 싸우는 건데 둘은 체급도 실력도 맞는 상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김구라도 그 둘의 대화에 제법 오래 끼어들지 않고 듣고 있다. 그 인내심이 느껴진다.     


요즘 친구들은 이 소설을 읽어도 와타나베의 고독을 이해 못 할지도 모른다. "난 카톡 친구가 몇 백 명인데.", "페이스북 좋아요가 몇 백 개인데.", "과 동기들하고 수다 많이 떠는데." 하면서...   그러나 와타나베가 가장 길게 대화를 나눈 상대는 마흔을 바라보는 레이코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의외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자살, 아사히카와     

이 소설에선 세 번의 자살이 나온다. 기시키, 하쓰미, 나오코... 여기에 나오코가 얘기하는 언니의 자살까지 더하면 네 번이다. 동기도 없다. 조짐도 없다. 기시키와 나오코의 언니의 자살은 더 그렇다. 나오코와 하쓰미의 자살엔 그나마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의외로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레이코는 십 년 가까이 있던 요양원을 나온다. 그리고 와타나베와 50곡이 넘은 곡을 기타로 연주하며 제대로 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러 준다. 그리고 길게 섹스한다.      


그녀가 다음날 떠난 곳은 대학 때 친구가 음악학원 일을 도와달라고 간청하며 초대한 아사히카와. 홋카이도에 있는 곳이다. 올여름 삿포로 여행을 갔을 때 딸 때문에 이곳의 동물원을 간 적이 있었다.     


산 사람만이 섹스를 하고 여행을 하고 인생의 2막을 열 수 있다. 레이코와 나오코가 있던 아미사는 일종의 중간계 같은 곳.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들이 머물던 곳.     


삶은 선택이고 그것은 50곡의 연주 목록만큼 다채로운 것. 노래가 끝날 때마다 켠 성냥개비처럼 우리의 선택들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고 후회되고, 때론 환희로 다가오겠지만... 어떤 선택이든 끝이 있다는 것...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끝없이 성냥을 켜듯이, 주어진 하루를 계속 불태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비행기로 훅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꾹꾹, 덜컹거리며 레일을 힘차게 밟아가며 나아가야 하는 것. 그래서 레이코가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를 고집하며 아사히카와로 떠났을지도...     


아사히카와의 한자는(욱천旭川) 그러니까 굳이 풀어 해석하면 “아침 해가 뜨는 강”정도... 내일을 보기 위해선 밤을 버텨내야 한다. 물론 내일이라고 삶이 더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아직 연주해보지 못한 악보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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