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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2. 2023

H마트에서 울다 - 미셀 자우너

동해선에 읽은 책 18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 마트에만 가면 운다.", 미셀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올 초, 우연히 지미 펠런쇼에 나온 미셀 자우너의 인터뷰를 보게 됐고, 이 책도 알게 됐다. 온라인 서점에서 저 첫 문장과 뒤이은 문장을 읽은 후...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주책맞게도,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결국 병원 도서관의 새 책과 올해 자신의 책 모임에서 읽을 책을 고르고 있던 아내에게 이 책을 권했다. 그 뒤, 올봄,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먼저 읽고 너무 좋다는 말을 했다고 내게 전했다. 환우들의 반응도 좋았고...


그렇게 한참 잊고 있었는데... 어제 아내가 책 두 권을 건넸다. 책 모임에서 읽을 책이 도착한 것. 내게 먼저 읽으라고 준 것이다. 다른 한 권은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


어제 받고...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오늘 아침, 펼쳐 읽었다. 역시 울컥했다.


사실..... 어제 오후, 딸이 주산을 하는 동안 서면의 ABC마트에 가서 써코니 조깅화(다시 달릴 궁리를 하고 있다.) 실물을 보고, 옆의 서점에 들렀다 오는 길에... 이 책으로 칼럼을 써야지 마음먹기도 전에 제목이 먼저 생각났다.


빈자리는 절대 비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초안을 구상했다. 백화점에 돌아가 딸을 기다리는 십 분 동안 초안 메모를 했다. 그러니까 책을 읽기도 전에 칼럼의 초안을 썼고, 영화의 시나리오(미셀 자우너는 지금 시나리오 초안을 쓰고 있다.)가 다 완성되기도 전에 <영화의 위로> 코너에 보낼 칼럼의 초안을 쓴 것이다. 이제는 내가 쓸 내용이 이 책의 내용과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읽어야 할 듯...


B형이어서 그런건 아니다.

-한 십 년 전쯤인가, 서면역, 2호선 승강장이었다. 거기선 양방향으로 탈 수 있다. 그날 제자 두 명, 아마도 정근이나 관덕이, 아니면 민우와 누구와 헤어졌다. 해운대 방향이 먼저 와서 내가 먼저 타러 갔다. 두 놈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난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렸다. "가라." 한마디 했었던 것 같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지하철을 타러 가자, "교수님은 B형이어서 그래." 하며 지들끼리 웃었다. 나도 뒤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B형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이별에 능숙하지 않아서다. 아니 이별에 능숙한 사람이 있을까?


몇 년 전 공항에서 헤어질 때, 아내는 시어머니를 보며 울었지만 난 견뎠다. B형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건 내 이야기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요즘 주로 읽는 책들은 이야기가 없다. 그 이야기를 멀리서 보는 글들이다. 이야기를 읽는다면 나하고 아주 먼 듯한 하루키의 소설을 읽거나 십 년 전까진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에세이도 거의 읽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가슴 아픈 사연이 넘쳐나는 뉴스로 족하다고 여겼다. 차라리 이야기 밖에서 그 이야기를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는 게 마음이 편했다.


올봄, 우연히 이 책의 첫 줄을 읽자마자 이건 내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최소한 내가 잘 아는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읽고 싶지 않았다. 읽으면 울게 뻔했다. 읽으면서 한 열 번 정도 책을 놓고 딴짓을 했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읽었다.


빈자리는 비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재 뒤,  없었던 것처럼 살 수는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부재는 빈자리를 남기고, 빈자리는 메워지지 않는다. 우린 저마다, 이 공백을 안고 살아간다. 때가 되면 그 공백으로 바람이 드나들고, 그 소리가 크게 울리면 우린 잠시 멍하니 앉아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자우너가 음식을 하고 김치를 만들고.. 결국엔 잣죽을 만들어 먹었던 것처럼.


공백은 결국은 사랑으로 채울 수밖에...

-자우너의 큰 이모는, 결국 두 동생을 암으로 먼저 보냈다. 그전에 할머니를 먼저 보냈고. 말이 안 통하는 이모와 조카는 각자에게 남긴 공백을 본다. 알아챈다. 사랑으로 메운다. 동생이 없고 엄마도 없지만 남은 사람의 필사적이고 애쓰는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을 살게 한다.


나이가 들면서 만나는 타인의 공백

-없는 사람은 없는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는 그의 몫이고, 그 자리를 응시하며 어떻게든 남은 자의 사랑으로 그 자리의 공허함을 메우며 사는 것은 산 자의 몫이다. 미셀 자우너의 글은 결국 모두가 있었던 이야기에서 공백의 현현으로, 그리고 그 현현을 이겨내는 남은 자들의 필사적인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을, 나이가 들 수록 더 자주 접하게 되는 장례식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관련된 죽음은 매번 무겁게 다가온다. 그것은 그 공백이 예고된 것도 예정된 것도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해 얼마나 전력을 다해 사랑에 힘쓰고 애쓸 것인지 예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어떤 이의 공백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크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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