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7
"기쁨과 고통을 마치 장부상의 흑자와 적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임계점을 넘어가는 극한의 고통은 나중에 그 어떤 기쁨이 주어지더라도 장부상의 숫자처럼 간단히 상계되지 않습니다.", <작별인사>, 김영하,. 149.
요즘 주로 읽는 책들엔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를 멀리서 보는 글들이다. 에세이도 거의 읽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가슴 아픈 사연이 넘쳐나는 뉴스로 족하다. 차라리 이야기 밖에서 그 이야기를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는 게 마음이 편했다.
올봄, 우연히 <H마트에서 울다>의 첫 줄을 읽자마자 이건 내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최소한 내가 잘 아는 이야기라고 확신했었다. 그래서 읽고 싶지 않았다. 읽는 동안 무겁게 읽었다. 그러나 <작별인사>는 가벼웠다.
처음 몇 장을 읽은 후, 이런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루키? 김영하의 단편이었나? 오후의 울산 작업실, 이런저런 키워드로 검색해 봤다. 오쓰이치의 <Zoo>라는 단편집에 실린 <양지의 시>였다. 소설을 제법 버렸는데, 그의 소설집 두 개가 아직 남아있어서 책장을 파라락 넘겨 읽어봤다. <작별인사>의 오프닝이 왜 이 소설을 떠올리게 했는지 이해가 갔다. 물론 <양지의 시>가 훨씬 더 암울하면서도 조용하지만...
읽는 내내 여러 영화와 소설들이 생각났다. 당연하게도 <블레이드 러너>, <바이센테니얼맨>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후반부 육체와 영혼에 대한 논의를 읽을 땐 <공각 기동대>도 생각났다. 온화한 버전의 <매트릭스> 같기도 하고, <업>의 암울한 버전 같기도 하고...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선 <더 그레이>도 생각난다. 여하간 동년배라면 비슷한 콘텐츠들이 생각날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철, 선, 민, 달마의 이름과 고양이들의 이름인 칸트와 데카르트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근본적인 질문 몇 개를 던지고 풀어낸다. 인간을 사람이게 하는 조건은 뭔가? 사는 건 고통인데, 그렇다면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태어났다면 그 존재를 세상에서 없애주는 것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 정신이 멀쩡하고, 뇌도 생생하고, 심지어 그것이 세계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어서 모든 정보와 지식을 알 수 있다면, 그래서 영혼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영원불멸의 존재 유지를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육체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이 유한한 생은 우주의 실수인가 운명인가?
김영하는 더 깊이 가지 않는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어려운 이론이나 논지를 풀어놓지 않는다. 읽을 땐 "적당히 넘어가는데." 하는 생각이었는데, 읽고 나니 그게 미덕이었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일은 독자에게 떠 넘긴다. 소설가는 문제를 던진다. 소설가가 장황하게 지적인 유희를 펼칠 필요는 없다. 유희와 탐구는 읽은 독자의 숙제... 김영하는 그 선을 지켰다. 그래서 독자들이 저 개별 질문들에 답을 얻겠다는 열망이 생겼다면...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효과일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작별인사는 누구에게? 인간과 삶의 존재와 이유, 사회의 존재와 이유 등에 대해 궁금해하여 그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매번 자기 자신의 과거에 작별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들의 이름에 담긴 철학과 선, 달마의 길은 그렇게 과거와 결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어제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나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은, 결국 작별이 반복되는 삶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류가 더 나은 인류가 되기 위해서도 문명을 비롯한 각종 성취를 의심하며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영원의 시>의 이야기의 전제와 엔딩은 <작별인사>의 후반부와 비슷하다. 모든 인류는 이미 죽고, 인간과 가장 닮은 존재가 최후를 맞음으로써, 육체의 부피로 대지를 밀고 나가며 살던 의식 있는 존재는 사라진다. <작별인사>에서, 인간이 사라진 지구는 건강해졌다. 인간이 신이 지구에 내린 축복인지 재앙인지 확신이 안 가는 요즘... 이 소설의 엔딩에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