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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l 05. 2024

타자에 대한 상상력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55

아래의 영상은 PR, 특히 위기관리 수업 시 사례 교재로 써도 무방하다. 이 영상에서 언급된 두 개의 사건, <무신사>의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의 오용과 <르노>의 손가락 사건은 나 같은 광고/홍보 및 관련 영상 업계 사람에게 미스터리를 안겨 줬다. 다들 알다시피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그것도 마케팅이나 홍보부서에 들어갈 정도면 제법 괜찮은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한 우수한 인재 아니겠나? 이런 전제를 놓고 생각해 보면, 이 직원들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당최, 이해가 더 안 가는 것이다. 그 이유, 내 경험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공과 사의 구분

관련 업계에서 20년 넘게 종사하면서 다양한 기업과 공공기관, 지자체의 홍보실 및 홍보부서와 그 직원들을 겪었다. 그러면서 느낀 점 중 하나가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영상을 만들든, 브로슈어를 만들든, 하다못해 배너 하나를 만들어도 개인의 취향대로 만들어달라는 이들이 꼭 있다. 개인 블로그나 유튜브 채널이 아니라 공중이 보고 소비자가 보며 민원인과 시민이 보는 영상이라는 걸 망각한 채 자기가 보기 좋은 게 우선인 것이다.


심지어 자기 좋아하는 문구나 카피를 넣어달라는 사람도 있다. 한 번은 자기가 좋아하는 골프 선수를 광고 모델로 사용해 달라는 제약사 대표도 만난 적이 있다. 정치적 성향을 반영해 달라는 요구는 너무 흔하다. 이런 욕구의 발현은 개인 미디어라면 상관없다. 거기에선 뭔 짓을 해도 괜찮다.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안 하면 된다. 그 외에는 다 허용된다고 본다. 오히려 자기 검열이 너무 심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러나 자기가 몸담고 있는 기업과 그 기업의 제품 관련 영상이면 그 영상 속에 자신의 취향과 신념과 지향점은 빠져야 한다. 그런데 그걸 넣을 수 있는 위치라면 넣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게 저런 사태의 첫 번째 원인이다.


타자에 대한 인식, 혹은 상상

직원이 몇 천명되는 병원에 다니는 아내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IT 기업에서 젊은 직원들과 일하는 처남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이런 사건과 유사한 사례와 그 기사들을 봐도 그렇고, 일 때문에 크고 작은 조직을 직간접적으로 겪어봐도 그렇다. 요즘엔 "자기"를 넘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생각의 범위가 넓어봐야 자기 부서원들 정도다. 매일 마주치는 옆에 부서도, 다른 층에서 일하는 부서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당연히, 자기가 출근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보이지도 않고 만날 일도 없는 생산 현장이나 다른 지역의 지사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협력업체, 하청 업체, 외주 업체에 대한 생각, 고려, 그들의 사정에 대한 배려는 기대할 수 없다.


말단 직원이나 중요한 업무를 맡지 않은 직원이 이렇게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이번 사례처럼 소비자와 공중에게 자기 기업과 제품을 홍보해야 되는 부서에 속한 사람이, 심지어 관련 홍보 영상에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직무와 직책의 직원이 이러면 문제가 된다.


이번 사건에서 정말 공포감을 느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자신이 한 행동의 여파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미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바로 그 점이 정말 무서웠다. 회사의 이윤을 임금으로 나눠먹는 전 직원들은 그야말로 식구라면 식구다. 그래서 내가 회사에 손해 되는 일을 하면 나뿐만 아니라 그 회사를 통해 먹고사는 식구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상상을,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상식적인 상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서웠다.


개발비의 증발, 혹은 그 이상

신차 하나가 나오는데, 그러니까 페이스리프팅이나 약간의 성능 개량을 통한 업그레이드 버전이 아니라 그야말로 세상에 없던 이름과 모양을 가진 신차가 하나 나오는 데는 긴 세월이 걸린다. 들어가는 돈은 말할 것도 없다. 인력은 셀 수도 없다. 관련 하청 기업의 수도 들어가는 부품의 수만큼 많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과 기업과 사람의 수고가 들어간 자동차가, 부산국제모터쇼라는 화려한 잔치 자리를 통해, 한국 시장은 물론이고 세계 시장을 향하여 막 첫인사를 하려는 순간, 이런 일이 터졌다. 그런데 수습이 너무 느리다. 영상에서 예를 든 <무신사> 사례처럼 신속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아마 누구한테, 뭘,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특정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의 심기를, 그야말로 불편하게 한 사건이니 말이다.


물론,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차가 동종 차량에 비해 성능이 탁월하거나 가격이 현저히 저렴하다면, 그래도 팔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고전적인 광고 이론으로 보면 자동차, 특히 승용차는 특이한 제품이다. 기술의 집약체이기에 이성적이고 관여도가 높은 제품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신분과 취향과 미적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향수나 명품과 같은 성격을 가진 제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직 가격만 보고, 오직 기능만 보고, 오직 디자인만 보고 선택되는 제품이 아니다. 그렇기에 미묘한 이슈와 작은 사건만으로도 제품의 이미지가 변하고 판매량이 변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한 기업의 두 브랜드가 거의 과점 상태인 자동차 시장 상황에서는 숨 쉬는 거 하나도 조심하면서 시장에 들어가야 한다.


며칠 전, 부산의 한 기업이 소위 밀양 사건과 관련된 직원을 해고했다. 이 기업, 일반 소비자들은 전혀 모르는 제조업이다. 철강 제품을 가공 판매하는 기업으로, 당연히 B2B기업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조치를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주 거래처가 자동차와 조선 관련 대기업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은 공중의 눈치를 본다. 거래처는 넘쳐나니, 이미지 안 좋은 기업과 굳이 거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납품업체에 불과한 이 기업이 이렇게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동탄 경찰서 사건도 그렇고, 각 지역의 시군구 의회에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도 그렇고, 카페와 식당에서 갑질을 하는 손님이나 카페의 자리를 몇 시간씩 차지한 채 공부를 하면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눈치를 주는 이상한 이들을 봐도 그렇고, 시청 앞 사건 사망자를 두고 상상 못 할 반응을 보여주는 여초 사이트 관련 뉴스를 봐도 그렇고....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까지 자기중심에만 머물 수 있나 싶은 일들이 수두룩 하다.


르노가 프랑스 기업이고, 그래서 표현의 자유와 페미니즘에 유독 신경을 쓰는지는 모르겠다. 직원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르노의 딸린 식구들이 미래를 걱정하는지를 염두에 두고 일 처리를 하길 바란다. 부산의 르노 공장에 투자를 유치했다고 좋아하던 시장의 심기도 지금쯤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는 것도 고려하고 말이다.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자동차 홍보를 위한 유튜브 채널과 거기에 올린 영상 몇 개가 일으킨 날갯짓이 폭풍이 되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됐는지도.


https://www.youtube.com/watch?v=MZAtfKmZF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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