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Oct 18. 2024

수영의 이유 - 보니 추이

동해선에서 읽은 책 103

수영을 하기 전

육지에서 하는 운동 중, 하고 싶은 운동을 돈 내고 배워본 적은 없다. 달리 말하면 레슨이 필요한 운동은 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십 대와 이십 대, 삼십 대 중반까지 축구와 농구에 전념했고 십 대 시절엔 이걸로 체대를 가볼까도 생각했었다. 삼십 대에 들어선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했고 이후 몇 년 간 심취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포츠 클라이밍이 배우고 싶어 암장을 수소문했다. 회사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암장은 한 때 공장이었던 곳을 개조한 곳으로 복잡하기로 유명한 연산 로터리에서 한 블록 정도 들어가 있었다.


그곳은, 찾아야만 하는 사람에겐 눈에 띄는 건물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구도심에 흔히 있는 쇠락한 공장 건물에 불과했다. 난 그곳 2층에서 몇 년을 보냈다. 심지어 토요일에도 갔었다. 아무도 없는 암장에서 혼자 벽을 타곤 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그만뒀다. 나를 잘 아는 아내의 부탁 때문이었다. 당신은 언젠간 고산과 고벽을 갈망할 것이라고, 그때가 오기 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 후 아내가 권한 운동이 수영이었다.      


수영과의 만남, 이별, 재회

2010년쯤이려나? 2년 정도 수영을 배우고 익혔다. 한참 수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데, 당시 일주일에 한 번, 대전의 모교에서 세 시간짜리 강의 두 개를 연이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대전의 수영장을 검색했고, 대전역 근처에 시립수영장을 찾아냈다. 대전역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 간 뒤 조금 걸어가야 했지만 당시엔 대전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 주부터 오리발을 들고 기차를 탔고, 다시 대전도시철도를 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한 뒤, 다시 그걸 들고 대전도시철도를 타서 대전역으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시립수영장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대전역으로 다시 돌아와서 기차를 타고 집에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다. 이렇게 미쳐 있던 수영을, 딸이 태어난 후 그만뒀다. 아내의 육아 휴직이 끝난 뒤, 딸과 함께 온전히 모든 시간을 보내줘야 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십여 년이 흐른 후, 집에서 간단한 근육 운동 외에는 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다시 수영을 권했다. 그렇게 다시 수영을 시작한 지, 삼 년째다. 이 삼 년 동안 수영이 지겹게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영장에 가지 않은 날은 작업실에 가는 날, 가족 여행, 주말과 공휴일 뿐이었다. 이 동안, 다행히 크게 아프지도 않았다.


수영을 향한 찬가

단언컨대 수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책이 정말 재미없을 것이다. 아니 수영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수영의 역사를 짚어나가기 위해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 사실 좀 오버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진지하다. 우리의 DNA에, 신체의 어딘가에 양서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는 수영 마니아이자 서퍼인 저자는 정말 수영이라는 종교에 교리를 만드는 사람과도 같다.     

 

책은 핀란드 어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선이 침몰한 후 살아남은 유일한 어부의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머리 삼아 생존을 위한 수영을 소개한다. 이후 건강을 위한 수영, 공동체를 묶어주는 수영, 경쟁을 위한 수영, 수영만이 선사하는 몰입에 대한 장으로 이어진다. 특히 공동체에 관한 챕터를 읽으면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을 느꼈다. 


이라크에서 후세인을 몰아낸 뒤, 유엔군과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우리가 <그린존>이라는 영화에서 봤듯이 그들은 근무지를 제외하면 주로 그린 존이라 불리는, 옛 후세인의 왕궁 중 하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 그리고 어이없이 큰 수영장에서.      


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던 한 미국인 주재원이 꼴사납게 수영을 하는 다른 나라 주재원을 보다 못한 나머지 수영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미국인, 왕년에 수영 선수였고 방학 때마다 수영장 안전요원까지 한 사람이다. 그러니 오죽 잘 가르쳤을까? 옆에서 보던 다른 사람이 나도 좀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 사람이 친구를 데리고 오고, 친구의 친구, 친구의 동료, 동료의 직장 상사, 여하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강생이 이어진다. 후세인의 왕궁에 사치스럽게 자리한 수영장에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인종과 종교와 직업을 뛰어넘어 수영으로 소통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왕궁을 이라크 정부에 넘겨주게 되자, 미군과 UN은 아주 신속하게 체육 센터를 짓고 당연히 수영장도 마련한다. 물론 사이즈가 좀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디냐. 이 수영 교실, 그 미국인의 근무 기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세계 평화와 연대가 전쟁이 막 끝난 중동의 사막 한 복판에서 구현된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사건이다.      


그다음으로 눈길을 끈 건, 경쟁 챕터에 등장하는 사무라이 수영이었다. 난 챕터 제목만 봤을 땐 일본 국가대표 특유의 수영 훈련법인 줄 알았다. 읽어보니, 응, 진짜 사무라이들이 하는 수영법이었다. 심지어 이 수영이 오늘날까지 전수되고 있었다.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검색해 봤다. 글만 읽어서는 도대체 갑옷을 입고 어떻게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니,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일본인들 특유의 경건함이랄까, 소위 무슨 무슨 도라고 이름을 붙이는 걸 좋아하는 그들답게 이 수영을 생각하고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아주 진지했다. 스포츠가 아니라 종교적, 정신적 행위 같았다.      


재미있는 건, 이 수영이 실전 무술 중 하나였다는 것. 그러니까 사무라이가 되려면, 일본 무사가 되려면 이 수영을 배워야만 했다. 왜냐, 일본의 성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성을 둘러싼 해자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해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건너가서 담을 타고 올라가려면 그야말로 닌자의 움직임 뺨칠만한 수영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섬나라 일본에서 배를 타고 움직이는 일이 많으니 해전에서도 용이했을 테고, 배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배로 침입하는 일도 많았을 테니, 이 사무라이 수영은 그야말로 무사의 필수 과목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정신 수양을 겸한 운동의 맥락이 더 커졌지만. 시합 영상도, 훈련 영상도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영어로 Samurai Swimming을 검색해 보시길. 무시무시하다. 갑옷 입고 수영을 하다니.   


권고 사항

내 서평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말하지만 수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수영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도 쓸모없는 책이다. 수영 외에 여러 운동을 하고, 그 여러 운동 중 수영의 선호도가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무용(無用)하다. 바다 수영과 실내 수영, 그리고 미국과 호주에서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실외 수영장에서의 수영, 서핑 등을 오가며 저자는 오직 수영만 찬양한다.


그렇다. 아주 철저한 수영 찬가다. 다른 운동과의 비교 평가도 없다. 오직 물에서 시작해서 물에서 끝나고, 수영으로 시작해서 수영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니 수영에 약간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박태환과 황선우의 몸매에 반했다고 해서 이 책을 집지 마라. 그건 기독교인이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서 절밥을 먹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니까.


변화의 시점과 기원

2022년 7월에 수영을 다시 시작한 이래, 아직 30개월이 안 됐다. 그동안 몸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엔 살이 5,6 킬로그램 빠졌다. 현재는 68킬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 어깨가 넓어졌다. 당연하다. 심박수가 떨어지고 심폐지구력이 좋아져서 힘들 때 나타는 증세가 변했다. 올 초만 해도 힘들다 싶으면 폐가 졸아 들고(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 실제로 그러면 큰일 난다.), 근육이 마비(이 또한 실제로 그러면 큰일 난다. 어디까지나 느낌이다.) 되거나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올 하반기부터 이런 느낌이 없어졌다. 힘들어도 근육은 제 할 일을 했고, 오히려 마지막 세트를 할 때는 힘이 빠져서 더 부드럽게 할 수 있게 됐다.

     

요즘, 우리 반에 새로 합류한 어르신(일흔에서 여든 사이로 보인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한다. 그 생각들을 모아 칼럼을 썼을 정도다. 그 어르신의 말투와 풍겨 나오는 인품과 함께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건 어느 날 갑자기 그러기로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환갑을 맞이했을 때, ‘자, 이제 앞으로 품위 있는 노인이 되어보자.’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노인은 평생 그렇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어떤 직업과 종교를 갖고 있는지, 무슨 운동을 해왔으며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오늘의 그분이 몇 년 전의 결심과 실행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뭘 하든-그게 운동이든, 독서든, 직업이든-꾸준히, 생애 내내 하면 그렇게 사람이 만들어진다. 독서로 만들어진 사람, 00 직업으로 만들어진 사람, 수영(혹은 다른 운동)으로 만들어진 사람, 좋은 가족과 배우자로 만들어진 사람 등등. 그걸 하는 동안, 그것, 혹은 그 사람과 함께하는 동안 인생의 슬픔과 아픔, 환희가 왔을 테지만, 그것으로 슬픔과 아픔을 삭여 보내고, 환희는 담담히 다루어 과거로 보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인생을 만든다는 진실을.


사족

작가인 보니 추이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게시물의 대부분은 책과 수영, 서핑과 관련된 것이었다. 거기에 가족과 지인들의 사진이 약간. https://www.instagram.com/bonnietsui8/


이 책은 논픽션이다. 이런 책이 번역됐다는 것이 놀랍다. 보니 추이는 넓게 보면 뉴 저널리즘의 계보에 속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존 맥피나 조앤 디디온, 게이 털리즈의 그 위대한 논픽션과 뉴 저널리즘의 계보에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들뢰즈 다양체-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