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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13. 2024

들뢰즈 다양체-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동해선에서 읽은 책 102

“어떤 책이 존재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빠르게 세 측면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다음의 경우에만 '가치 있는' 책이 쓰였다 할 수 있습니다. ①동일한 주제 혹은 관련 주제에 관한 책들이 일종의 전면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경우(책의 논쟁하는 기능), ②그 주제와 관련된 필수적인 무언가 간과되었던 것들을 생각하는 경우(책의 발명하는 기능), ③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경우(책의 창조하는 기능)." 질 들뢰즈, '아르노 빌라니에게 보낸 편지', <들뢰즈 다양체>, P117.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편지, 중반부는 서평과 <안티오이디푸스>와 관련한 대담, 후반부는 20대 시절 쓴 글들이다. 먼저 편지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또한 크게 세 가지 종류인데, 하나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업계(학계) 선배와 주고받은 편지, 다른 하나는 업계(학계) 동료와 주고받은 편지, 마지막으론 업계(학계) 후배와 주고받은 편지다.      


편지들 1

우선 첫 번째 종류의 편지에선 순수함이 전해진다. 존경하는 학자와 예술가의 업적과 작품, 결과물에 대한 경탄과 찬사, 열광을 아낌없이 보낸다. 그들에게 칭찬을 받은 후(들뢰즈는 자신에게 온 편지는 다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내용의 칭찬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답장으로 가늠할 뿐이다.)에는 수줍음과 겸손, 열정과 추종을 함께 보여준다.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의 작품을 본 후의 감동은 가감 없이 표현된다. 그런 인물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 순간의 기쁨 또한 고스란히 전한다. 참 순수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편지들 2

두 번째 종류의 편지에선 치열함이 전해진다. 푸코와 주고받은 편지는 물론이고 <안티오이디푸스> 작업을 함께 한 과타리와의 편지에서도 그 치열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보내진 원고에 각주를 달고 의견을 붙인 뒤 다시 보내고, 필요한 책을 보내면 읽은 후 다시 돌려보내고,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그 책을 다시 보내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하고, 참조할만한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가장 먼저 구할 수 있는지 아는 출판사와 출판인과 학자들, 여하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통해 수소문하고, 잡지에 나온 하나의 텍스트에 꽂히면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찾아가서 집요하게 찾고. 그가 기관지도 안 좋고 결핵에 걸렸었으며, 그래서 폐 관련 수술까지 했다는 걸 감안하면, 애초에 약간 허약한 신체를 갖고 태어났다는 걸 감안하면 그의 열정, 학문에 대한 열정, 철학에 대한 열정은 더 놀랍다.

      

편지들 3

이 부분의 편지들은 의외로 재미있다. 그리고 학자로서, 선배로서 들뢰즈의 면모를 알 수 있다. 후배들의 편지들은 대부분 그들이 들뢰즈와 들뢰즈의 저서를 주제로 석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개념과 이론에 대해 들뢰즈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것들이다. 또는 그렇게 석, 박사를 취득한 이들이 들뢰즈에 관하여 책을 쓰기 위해 그의 의견을 구하는 내용들이다. 이런 편지를 받은 들뢰즈의 반응이 재미있다. 우선 논문을 쓰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쓰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주제로 논문을 쓰는 것을 당신들의 지도교수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당신의 진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면서 말이다. 당시 들뢰즈가 학계에서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그런데 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질문에는 아주 성실하게 답한다. 그야말로 엮은이의 표현을 빌리면 “질문 뭉치”를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질문 하나 가벼이 넘기지 않고 세세하게 답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연을 맺은 후배들하고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내용이 참 담백하다. 교수 자리는 얻었느냐, 책은 잘 진행되고 있느냐, 내가 아는 출판사에 추천을 해달라고 했는데 난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으니 00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런 내용들이다. 당연히 건강과 날씨도 들어 있고 자신의 이사 이야기와 후배의 출간과 임용의 축하 메시지도 들어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욕망의 정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파시즘적, 편집증적,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재영토화하는 정치, 즉 좌표화하고 통괄 조정하고 영토화하는 정치가 있고, 무언가가가 삐거덕거리고 탈주하는 순간 그것에 투자하는 다른 정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 P269     


마지막 세 번째 논점, 즉 그것에 의해 우리가 정신분석에 완전히 반대하게 되는 표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언제나 그 말의 본래 의미에서 협상하는 것, 즉 돈과 바꾸는 흥정, 체험된 상태를 다른 것과 바꾸는 흥정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환상 문제가 재발견됩니다. 환상은 실제로 체험된 상태였던 적이 없습니다. 정신분석가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지요. 환상은 완전히 날조된, 완전히 위조된 상태입니다. (결국) 화폐인 셈이지요. 정신분석가는 대체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제안하는 계약은 당신이 체험한 상태를 환상으로 번역하는 것이고, (그 대가로) 나는 당신에게서 돈을 받을 것이다., P290     


"당신에게 무언가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좌표 체제 안에 있는 것입니다. ", 291     

 

벨루 : 환상은 강도가 끝난다는 뜻인가요?
들뢰즈 :  바로 그때 강도들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멈춰 섭니다. 강도들은 가로막히지요.
과타리 : 그것은 관조이며, 침잠이며, 이미지의 영토성에로의 선회입니다.
들뢰즈 : 강도(intensity)들이 지나갈 때는 어떤 이미지도 없습니다.
과타리 : 그건 단순합니다. 섹스를 하고 있을 때, 오르가슴에 할 때....
들뢰즈 : (그때)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지요.” P. 292      


두 명의 혁명가, 안티 오이디푸스에 다가가는 작은 열쇠

역시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는 대담이다. 이 속에서 두 사람(들뢰즈와 과타리)의 면모, <안티 오이디스푸스>에 대한 프랑스 지성계의 비판과 열광, 그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 쏟아지는 질문에 대한 냉담하면서도 간결한, 그러면서도 진지한 답을 들을 수 있다.      


우선, 당시(전후에서 70년대에 이르기까지)엔 라캉을 앞세운 정신분석이 임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꽤나 파워풀했었던 모양이다. 뭐 잘 알다시피 소위 구조주의의 시절 아니었나. 그런데 두 사람은 그게 상당히 마뜩잖았던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간략히 말하면 정신분석은 이미지의 해석과 위치 재조정만 할 뿐 근본적인 원인, 그러니까 분열분석, 약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미쳐버린 이의 근본 원인을 마치 재귀대명사처럼 그 본인에게, 그 본인의 과거와 그를 낳고 키운 부모와 유년기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일까? 거칠게 말하면 두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이미지의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술을 하면 “아 그건 말이죠.”하고 해석을 하고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이라는 것은 당연히 이미지의 회상에 의거하는데, 이 회상된 이미지는 늘 현재적일 수밖에 없기에 과거를 있는 그대로 소환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이미지를 소환하는 이로 하여금 선택적으로 불려 나온 것이기에 원인 분석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더 짜증 나게 했던 건, 정신분석이 분열에 대한 근본적 원인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그대로 놔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시 한번 거칠게 말하면, 내담자의 정신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료/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어울리게 살 수 있도록 적당히 조정/조율하여 돌려보낸다는 점이다.      


결국, 두 사람이 인터뷰에서 강조하는 건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시도하는 분열 분석, 그리고 멈춤 없이 오로지 강도로서 살아나가는, 살아냄으로써 존재의 지속적 강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미지로 포착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으며 좌표를 허락하지 않는 삶 말이다. 들뢰즈가 분석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살덩어리처럼. 그 규정할 수 없는 폭력적 힘과 찰나들의 연속처럼 말이다.      


인용한 인터뷰의 마지막 단락에서 그 강도를 섹스와 오르가슴과 비교했을 때 난 그 강도라는 것을, 어쩌면 두 사람이 책에서, 여러 글에서, 그리고 이 대담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생각해 보라, 회상되는 섹스가, 돌이켜 본 뜨거운 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심지어 방금 끝난 섹스의 쾌감을 진술을 통해 재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 최고의 섹스 같은, 그런 회상 또한 의미 없다. 관건은 현재 하는 그것이다. 삶이든 섹스든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강도로든, 멈추지 말고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 투쟁하듯이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바 마사야의 표현을 빌리면 멈추지 마라, 그렇다고 “너무 움직이지 마라.”, 질주하지도 마라,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을 정도로 꾸준히 움직여라.    


들뢰즈를 읽어도 될까?

어쩌면 지금부터 쓰려하는 것이 진짜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들뢰즈가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청춘을 바쳐, 시간과 열정을 쏟아 쓴 책들을, 학문적 업적을 나 같은 사람이 읽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로운 중년 사내가 취미 삼아 “들뢰즈”를 읽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모욕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만큼 들뢰즈는 치열했다. 학문적으로 엄격했고 그 엄격함으로 자신을 닦달했다. 이 편지에 등장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이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분명했고 학문적 입장과 이데올로기가 선명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연대했고 차갑게 결별하기도 했다. 적당한 탐구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이나 책도 없었다. 논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논지를 세상에 내놓고 평가받는 것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던 시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들 그렇게 치열했겠지.     

 

그래서, 읽어도 될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학자들이 부지런히 책을 내고 있다. 뭐랄까 점점 더 학문과 학제의 틀을 나와 대중과 만나는 시도를 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그런 학자들의 생계와 그런 시도의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읽어야 “만”하지 않을까? 비록 취미지만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이 학자들을 돕고 그 도움을 받은 학자들이 세상에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통해 세상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읽어야 하지 않을까? 또, 안 읽으면 뭘 하겠나?


사족

-도서관의 악순환(?)을 근래에 경험하고 있다. 집에서 구립도서관까지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리기에 딸이 원하지 않는 이상 잘 가지 않았고, 그래서 도서관 회원증도 없고 당연히 대출도 한 적이 없는데, 얼마 전 딸이 대출한 책을 대신 반납하러 가면서 아내의 회원증(아내는 도서관에 거의 가지 않는데 만들긴 만들었다.)을 들고 갔다. 반납한 김에 눈에 띄는 책을 빌려 왔고, 그걸 반납한 김에 또 빌려 왔고, 그걸 반납한 김에 또 빌려 왔다.      

-들뢰즈의 이 책 중, 후반부, 20대 시절의 글은 읽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랄 듯해서 그렇게 마음먹고 읽었다. 딸에게 물었다. “2주에 몇 권까지 빌릴 수 있어?”, “다섯 권.”, “야, 2 주에 다섯 권은 너무한데, 아빠는 두 권도 힘들던데.”, “아빠 같이 그런 책 빌리는 사람 거의 없어. 다들 소설 같은 거나 빌리지. 나도 그렇고.”      


-도서관의 좋은 점 하나는... 서가를 서성이다. 우연히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을 보고 꺼내 봤는데, 엄청 두꺼웠다. 빌리든, 사든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맨 처음 인용한 단락의 질문자는 아르노 빌라니로, <들뢰즈 개념어 사전>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들뢰즈 사후, 유고를 모은 <무인도와 그 밖의 텍스트들, 1953~1974>,  <광기의 두 체제: 텍스트와 인터뷰 1975~1995>에 이은 세 번째 유고집이다. 두 개의 전작은 각각 2004년과 2006년 출간됐다. 세 번째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Lettres et Autres Textes(Letters and Other Texts)"이다. 직역하면 <편지와 기타 텍스트> 정도 되려나. 한국에선 <편지와 청년기 저작,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텍스트들>이라는 부제가 책의 내용을 대신한다. 이 책의 학술적, 학문적 의의가 더 궁금한 이에겐 다음의 기사를 권한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72515335440708     


-진짜로 사족 하나를 더하면, 이 언론사의 제법 높은 분은 나와 대학원 동문으로 함께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뭐, 그렇다는 거다. 물론 그 선배는 날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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