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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09. 2024

가끔은 전속력, 가끔은 제정신?

수영장에서 건진 생각 76

실력의 가늠자

동호인의 수영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폼이 될 수도 있고 체력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속도와 속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완급 조절이야 말로 최적의 잣대 아닐까? 완급 조절엔 크게 두 가지 맥락이 있다. 하나는 체련 안배를 위한 페이스 조절, 다른 하나는 자기와 속도가 다른 사람과 함께 운동하기 위한 맞춤을 위한 조절이다. 전자는 거리감과 자기 체력에 대한 파악, 그리고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의 실력을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입력된 정보는 강사의 운동 지시와 함께 출력된다. 예를 들어 강사가 자유형 50미터 6개를 시켰다면 당연히 속도가 빠를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마침 오늘, 여자 회원은 적게 오고 남자 회원이 절대적으로 많다면 그 속도는 더 빠를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세트에 돌입한다. 반면 웜업으로 자유형 2, 300미터를 하거나, 강사가 자유형 100미터 네 개를 시키면 속도는 자유형 50미터를 할 때보다 훨씬 줄어든다. 또, 가끔, 자유형 풀대시 25미터, 50미터를 서너 개를 시키면 당연히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낸다. 숨도 거의 안 쉬고, 팔도 안 꺾고, 그야말로 앞사람이 일으킨 포말을 헤치며 나가는 것이다.  


후자는 이런 경우다. 강습이 끝나고 다른 레인에서 개인적으로 마무리 운동이나 쿨다운을 겸한 드릴 연습을 할 때가 있다. 우리 시간대에서는 고급 A반이 가장 실력이 좋으니 다른 레인에 있는 회원들의 속도는 우리와 많은 차이가 난다. 자유형의 경우엔 그야말로 산책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앞에 사람의 발을 친다던가, 추월해 가진 않는다. 그건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땐 피치를 늦춘다. 그야말로 기어를 내리고 물에 떠 있을 정도로만 스트로크를 하며 가는 것이다.      


아주 가끔, 다른 수영장이나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레인에 있는 사람의 실력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그 사람이 어떤 기분, 어떤 의도로 수영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대체로 앞에 가는 사람의 속도에 맞춘다. 내가 속도를 더 내고 싶을 땐 그 사람이 쉴 때, 즉 내가 선두에 설 수 있을 때 그렇게 하거나 아예 레인을 옮겨 버린다.


가속의 이유

11월엔 처음 보는 사람이 합류했다. 그리고 올 초까지 함께 운동했던, 수영 경력이 오래된 어르신(나보다 최소한 열몇 살은 많지 않을까? 딸이 이번에 대학에 갔으니 말이다.)도 다시 나왔다. 전자의 사람은 190cm가 넘는 키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을린 피부를 가진 남자였는데, 마치 90년대의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 등장하는, 여름에 잘 놀은 젊은 야쿠자를 연상시켰다. 후자의 어르신은 바다 수영 동호회에서 꽤 오래 활동했던 이로, 특이하게도 코마개로 코를 막고 수영하는, 그냥 한눈에 봐도 수영 경력이 오래되어 보이는 회원이다. 앞의 남자가 야쿠자의 말단 같다면 이 어르신은 야쿠자의 보스 같은 풍채라고나 할까?     


서로의 실력을 몰라 순서를 놓고 양보와 사양을 거듭하며 일주일을 보낸 뒤, 둘째 주 목요일, 운동양이 많은 날, 하필 여자 회원들이 적게 나왔다. 때문에 앞쪽 라인업이 남자들로만 이뤄지게 됐는데, 웜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로 간 양보와 사양을 거듭한 끝에 순서를 정했다. 1번이 1번을 서고, 새로 나온 키 큰 남자가 2번, 바다수영 경력의 어르신이 3번, 덩치 좋고 넉살 좋은 기존 멤버가 4번, 내가 5번을 섰다. 그 뒤로 서너 명이 섰다. 결론적으로 이 날의 스피드는 최근 몇 달 중에서, 그러니까 원래 1번, 카리스마가 작렬했던 그 1번이 두시 반으로 옮긴 후 가장 빨랐다. 그야말로 치열한 속도전이 전개됐던 것이다.    

  

그 이유를 나중에 1번한테 들었다. 2번과 3번을 선 두 남자가 1번의 뒤를 바짝 쫓으면서 그의 속도를 테스트했던 것이다. 그는 수영장 밖에서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 같아 보이고, 수영장에서도 하회탈 같은 웃음을 보이며 전체 속도와 템포를 안정되게 이끌어간다. 또, 좀 운동량이 적다 싶을 때는 피치를 올릴 줄도 알아서 여러모로 회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도 새로 들어온 회원이 바짝 쫓아온다는 건,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에, 그 도전에 기꺼이 응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 또한 오래간만에 킥을 열심히 차면서 자유형을 했고 말이다. 물론, 이런 속도전은 이날 한번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여성 회원들이 많이 나왔고, 특히 여자 1번이 자신의 순번인 3, 4번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속도가 균일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반은 평소의 속도로 돌아갔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청춘들

후배의 권유로 시작한 SNS 덕분에 치열하게 사는 청춘들의 양상을 엿보곤 한다. 요즘 나오는 써모스 텀블러 광고는 이런 청춘들의 일상과 심리를 잘 보여준다. 요즘 친구들 말로 “갓생”을 살기 위해 매일 전력을 다하는 청춘들의 속내를 말이다. 우선, 지키는 루틴이 많다. 일어나면 군인처럼 잠자리를 정리한다. 매일 달리기를 한다. 바쁜 아침, 잠시 짬을 내 영어 단어를 외운다. 아무거나 먹지 않기 위해 끼니때마다 뭘 먹었는지 사진을 찍어 기록한다. 그렇게 모든 루틴을,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고 맞은 저녁,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만 같다. “내가 자랑스럽거나, 사랑스럽거나.”, 마지막 카피가 나온다.


이 광고를 볼 때마다, 그리고 SNS 속 쉼표 없이 살아가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불안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독서모임에 몇 개씩 나가고 한 달에 수십 권의 책을 읽고, 그걸 기록한다. 과거의 사법 고시생 같다. 자기 계발과 성공과 스펙과 갓생을 위해 매일 전력을 다해 사는 이들은 이런저런 학원과 강연, 강습을 순회한다. 뭐만 했다면 "0친자"라는 말을 듣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친자”라는 말을, 수영을 시작한 사람은 “수친자”를,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은 “런친자”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에게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려면 어떻게,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그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시작할 때부터 그야말로 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마치, 오직 속도를 내기 위해 개조된 두 대의 차량이 딱 4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려 승부를 겨루는 드래그 레이스에 참가한 드라이버처럼 말이다. 이런 친구들, 주말엔 좀 마음 놓고 쉬려나?      


그마저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모임을 나가고 여행을 가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여자라면 쉬는 주말에도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쉴 때도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해야 된다는 얘기고 남들이 어떻게 볼 지도 고민한다는 얘기다. 남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몇몇 학자들, 예를 들어 고병권이나 지그문트 바우만과 같은 학자들은 이 사회 시스템이 정상이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적응자인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시스템이 비정상이고 여기에 적응하는 사람이 그야말로 “미친 자”일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그런 것이 자본주의의 역사가 인류 역사 전체로 봤을 때 길면 얼마나 길겠나? 우리나라 사회의 시스템이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로 개편된 것 또한 아직 30년이 안 됐다고 봤을 때, 더 극단적으로 달려만 가는 이 체제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간주해도 되는 것인지는, 난 확신이 없다.     


설령 그것이, 그러니까 이렇게 매 순간 “미친 자”처럼 살아내는 것이 정상적인 청춘의 삶이라 해도 남아 있는 생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한 분야나 어떤 일이나 취미에 마음이 끌려 발을 담근 뒤, 한창 열정을 쏟아부으며 기술과 기량을 급속히 성장시키는 시기가 있으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후엔 그것의 맛을 알고 깊이를 알아 느긋이 만끽하면서 그야말로 참맛을 음미하는 시기가 있다. 전자의 시기가 성장과 발전의 시기라면 후자의 시기는 수양과 깨달음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자의 시기를 사는 사람은 전자의 시기를 사람이 초보자 시기의 가파른 속도로 인해 못 보고 지나치는 뭔가를 통찰하여 가르쳐 줄 여유가 생기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각각의 시기의 시간적 길이와 그 시간 동안 쏟아야 될 적정한 열정의 크기와 강도를 가늠할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의 에너지의 총량도 알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을 사는 모든 이들의 난제 중 난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난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이 불명확함을, 시간의 양과 열정의 크기와 강도, 그리고 내게 갖고 있는 체력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매 순간 전력을 다하며 사는 것은 불안하다. 적절한, 자신만의 페이스를 알지 못한 채, 일단 힘이 닿는데까지 전력을 다하는 청춘을 볼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든다.     


마치 자유형으로 가야 할 거리가 1킬로미터인데 출발부터 50미터 단거리 선수처럼 전력으로 킥을 하고 스트로크를 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철인 3종 경기에서 첫 번째로 하는 종목인 수영에서 너무 오버 페이스를 해서 행여나 사이클 40킬로미터와 달리기 10킬로미터는 엄두도 못 내고 시합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까, 초조해하며 선수를 바라보는 코치의 마음과 같다.      


쉼표와 완급

상투적인 얘기지만, 인생은 길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턱 없이 짧을 수도 있는 것이 또 인생이다. 인생이 길든, 짧든 청춘은 누구에게나 짧다. 그 청춘의 기억과 템포와 열정으로 남은 인생을 다 살아낼 수는 없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자신을 너무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건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의 한국어판 서문은 그의 아내 앤 드루얀의 글이 대신했다. 그 첫 문단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칼은 자연에 묻혀서 사색하며 글쓰기를 즐겼다......... 칼은 몇 시간씩 뜰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꼼짝도 않고 앉아 있고는 했다.”


문장에도 쉼표가 있듯이 인생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같은 악보라도 느리게 연주하라는 악상기호에 따라 여유 있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심지어 되돌아가서 연주하라는 악상기호도 있지 않은가. 한가하게 사는 사람이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전력을 다해 사는 청춘들에게 별 도움 안 되는 조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 같은 조언, 당부 같은 부탁을 하자면.......


너무 자기를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린 4백 미터만 달리면 되는, 속도에 못 이겨 뒤집어지고, 심지어 엔진이 터지기까지 하는 드래그 레이스에 참가한 자동차가 아니다. 인생은 그런 단거리 대회가 아니다. 자동차 대회에 비유하자면 3주가량 험난한 지대를 가로지르는 다카르 랠리와 비슷하다. 자동차의 내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르망 24시 레이스와 비슷하다. 자전거 대회에 비유하자면 매년 여름 3주간 펼쳐지는, 알프스 산맥과 도시와 고즈넉한 중세 도시를 두루 들르며 프랑스를 관통해 나아가는 투르 드 프랑스와 닮았다.      


수영을 사랑하고 달리기를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고 등산을 사랑하고 자신의 공부와 직업을 사랑한다면 천천히 사랑에 빠진 뒤 오래 연애하자. 그렇게 연애하는 동안 뜨거운 날은 또 뜨겁게 사랑하자. 그러나 늘 뜨거워야 한다는 강박은 내려놓자. 그저 오래, 오래 사랑하자. 사는 날까지 함께 할 동반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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