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

최카피의 딴생각 05- 칼럼 156

by 최영훈

품격 있는 어르신

9월에 우리 반에 새로 합류한 어르신이 있다. 그 어르신은 9월 첫날, 고급 B반의 1번과 풀 밖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다. 다른 수영장, 혹은 다른 시간대에서 오셨기에 자기 수준에 맞는 레인을 물으셨던 모양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B반 1번의 설명은 상세했던 모양이다. 어르신은 잠시 생각하시는 듯하다, 우리 레인을 선택하셨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려나? 예순은 당연히 넘었고 일흔도 넘어 보인다. 여든까지는 안 되는 것 같고. 여하간 어르신은 완전한 백발에 숱이 적었다. 오랫동안 운동을 꾸준히 하셨는지 나이에 비해 배도 안 나왔고 몸 여기저기에 근육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따라올 수 있을까? 의심이 됐다. 처음엔 내 뒤에 서는 젊은 여자 회원들 뒤에 자리를 잡으셨다. 약간 느리긴 했지만 쉬는 랩은 없었다. 당연히 거르는 세트도 없었다. 분명 우리의 평균 속도보다 느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쳐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들지 않으시려나? 며칠 해 본 뒤엔 반을 바꾸시겠지? 내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였다. 어르신은 한 달 내내 우리와 함께 운동을 했다. 심지어 우리 속도의 감을 잡으셨는지 처지는 거리도 짧아졌다. 순번도 빨라져서 이젠 종종 내 뒤에 서곤 하신다. 하체 근력의 문제 때문인지, 핀 수영을 하는 날, 핀을 안 끼고 일반 수영으로 함께 하는 걸 제외하면, 그야말로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의 실력과 체력이다. 그 어르신은 라커룸에서 먼저 나가실 때면 “수고했어요.”하고 먼저 인사를 하고 나가시고, 주말이면 “주말 재미있게들 보내세요.”하고 말하고 나가신다. 중저음 성우 같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하고 나가시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그 살아오신 날들이 궁금해졌다. 어떤 생각으로 삶을 살아내면 저렇게 안팎으로 탄탄한 분위기를 보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다른 생각을 불렀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고급반의 강사는 대체로 말이 없다. 가타부타, 이래라저래라 지적하지 않는다. 가끔 정말 나쁜 버릇이 있는 사람만, 그것도 슬쩍 다가가서 몇 마디 해줄 뿐이다. 할 만큼 한 사람들이라 좋은 버릇이든, 나쁜 버릇이든 몸에 박혀있어서 고칠 수 있을 거라 크게 기대를 안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해주는 것이 강사의 의무이자 책임이기에, 심지어 권리이기도 하기에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그도 알고 나도 아는 것처럼 강사의 “슬쩍 코칭”을 들은 사람이 영법의 수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최소한 몇 년, 길게는 이십 년 이상 수영을 한 사람이 자신의 굳어진 폼에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나쁜 버릇과 폼 때문에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하던 대로 한다. 고쳐야 할걸 그대로 두니 수영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다.


고급반 정도 되면 수영 체력은 어느 정도 올라온 사람이기에 약간의 수정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물을 제대로 잡거나 상체가 나오는 타이밍을 좀 더 기다리거나 킥의 각도나 리듬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다른 수영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손의 각도와 킥을 차는 발의 각도만 살짝 바꿔도 훨씬 효율적인 수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얼마 전 본 수영 영상에선 자유형을 할 때, 물을 잡는 순간 새끼손가락을 벌리면 견갑골을 포함한 등근육이 활성화되어서 더 많은 근육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스트로크가 시작되기 직전, 엄지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세워준 상태에서 물을 당기면 물을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의 근육을 써서 물을 당길 수 있다고도 했다. 실제로 신경 써서 해보니 그랬다. 아주 사소한 동작이지만 스트로크의 효율면에선 큰 차이를 만들었고, 운동의 효과는 더 좋아졌다. 당연히 상체, 특히 광배와 활배근 등에 더 많은 운동이 됐다.


변화의 과정

우린 변화를 A에서 B로의 전환으로만 생각한다. 그야말로 전환기적 사건이 있어야 변화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터널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오듯이. 그러나 인생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변화는 점증적이고 점층적이다. 뭔가를 하는 동안엔 인지되지 못하는 변화가 어느 순간 이뤄져 있다. 결국 우린 전환기적 사건을 기다리고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 “동안”에 뭘 해야만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새끼손가락을 살짝 벌리는 것과 같은 아주 작은 것들부터. 결국, 그 작은 것들의 중요함을 간과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면 나는 반복된다.


다시 그 어르신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려보자. 환갑이 넘은 뒤, ‘자, 이제부터 품위 있는 노인으로 나이 들어보자.’하고 다짐한들, 그게 될 리 없을 것이다. 생의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몸과 마음, 그 안팎으로 꾸준히 쌓고 닦아온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반의 그 어르신처럼 품격 있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은 일종의 결을 만드는 시간이다. 당연하게도 지금의 나의 결을 만든 건 지금까지 살아온 나다. 당연하게도 미래의 나의 결을 만드는 것 또한 살아갈 나다. 그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내가 선택한 작은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드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하고 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법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최대한 유사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로 부족하면 두 개로, 두 개가 부족하면 세 개로, 연이어 사물과 서술을 덧대어 가며 의미의 성곽을 만들어 가야 한다. 클리포드 기어츠가 <문화의 해석>에 실린 첫 번째 논문 『중층기술 : 해석적 문화이론을 향하여』에서 말한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 소위 말하는 “두텁게 쓰기”처럼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말한 소확행도, 그리고 그의 수많은 소설 속에서 다림질과 요리와 운동과 음악과 섹스와 의외로 근면 성실한 일의 태도를 꼼꼼히 기술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종종 우물이나 어떤 문을 통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볍게 넘나들지만 현실에서의 인간의 변화는 그렇게 간단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세월이 지난 후, 그 변화를 실감하기 위해선 사소하고 하찮은 것의 지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털이 있는 모든 동물엔 그 결이 있다. 각자의 환경에서 살아낸 동물만이 그 결을 완성시킬 수 있다. 그 결과 같은 종이라도 그 결은 다를 수 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늑대와 야생의 늑대는 멀리서 보면 같은 털의 같은 결을 가진 듯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른 결을 갖고 있다. 야생의 존재만이 털 안에 상처와 계절의 변화와 사냥의 흔적을 지니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사람의 결 또한 마찬가지다. 그 결이 몸의 결이든, 마음의 결이든, 지성의 결이든, 물리적인 결이든, 정신적인 결이든 그 결의 이루어짐은 세월과 환경, 살아가면서 수없이 내린 주체의 결정을 통해서다.


성장과 계발은 더디게 온다. 글을 써서, 책을 읽어서, 운동을 통해서 발생하는 변화라면 더욱더 더디게 온다. 변화된 자신, 좋은 결을 갖은 자신을 만나가 위해선 사소한 것들부터 무심히 지나치는 것부터 신경 써야 한다. 묵묵히 꾸준히 해야 한다. 어떤 결이든, 결국엔 낱개의 것들이 모여, 낱개의 나나들이 모여, 큰 결, 인생의 결을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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