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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삶 - 한병철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2

by 최영훈
“참된 행복은 목적 없고 효용 없는 것 덕분에, 고의로 장황한 것 덕분에, 비생산적인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는 아름다운 형식들과 몸짓들 덕분에 있다. 느긋한 산책은 곧장 걸어가기나 달려가기, 행진하기와 비교할 때 호화롭다. 무위의 예식성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활동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P.16

독서의 효용

목적 없는 독서는 무위(無爲)다. 모든 취미가 그러하듯 독서가 취미인 사람은 목적이 필요 없다. 그런 이에게, 다시 말하지만, 독서는 무위다. 무위의 취미는 즐거움, 쾌락으로 이어진다. 모든 쾌락이 그러하듯 독서의 즐거움 또한 설명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세간엔 독서의 기능과 효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고 몇 천 권을 읽은 뒤 떼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는 “인사이트”를 얻었다는 이도 있지만, 최소한 그런 독서는 내가 생각하는 독서와 결이 다르다. 그런 독서를 할 바엔 용하다는 무당을 찾는 게 나을 것 같다.

물론 뭔가를 “하는” 독서도 있다. 읽은 것에게 “일”을 시키는 “사역적”인 독서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독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취미인 독서는 유희여야 하고 그래야만 꾸준히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취미가 그러하듯. 결국 제대로 독서라는 취미에 빠진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당한다. “미친” 사람은 안 미친 사람에게 미침을, 그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한병철의 책은 무용(無用)하다. 그와 그의 책이 가진 매력이자 장점이다.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통하지도 않을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바타유, 들뢰즈, 보드리야르, 바우만, 헤겔, 칸트, 아렌트.... 일일이 다 셀 수도 없는 철학자들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며 생각을 전개한다.


이 사회와 시대의 밖에서 그 현상을 응시하는 철학자의 말은 짧고 굵다. 돌려 말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철학과 그 책이 돌려 말하고 은유에 기대고 심지어 독자가 알아먹기 힘들길 바라며 문장을 배배 꼬는 반면, 그는 권투 선수의 스트레이트처럼 직선으로 생각을 던진다.


그 펀치가 불쾌한 사람은 피한다. 그 펀치가 좋은 사람은 펀치 드렁크에 빠진다. 아니, 어쩌면 정신이 번쩍 나서 펀치 드렁크에 빠져 사는 듯한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행태가 명확하게 보일지도.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무위는 그 자체로 정신적 금식이다.”, P.21
"뭐 하러 세상에 태어났냐는 질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바라보러’라고 대답한다. 태어날 때 우리는 대상 없는 어둠에서 빠져나와 환한 세계에 이른다. 신생아는 행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라보기 위해서 눈을 뜬다..... 행위하는 삶은 틀림없이 나름의 타당성과 정당성이 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그 삶의 최종목적은 관조하는 삶의 행복에 종사하는 것이다. ” P91


관조의 뜻

관조(觀照)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것을 말한다. 불교에선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관조는 같은 관(觀) 자를 쓰는 관광이나 관찰하고 다르다. 관조는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비추어 보기 위해선 고요한 마음과 지혜가 필요하다. 둘 다, 시간이 필요하다. 고요한 마음은 일상의 부유물이 가라앉은 뒤에 찾아온다. 마음의 수면 위에 떠올라 잔바람에도 정처 없이 떠다니던 잡것들이 다 가라앉은 뒤에야 겨우 찾아오는 마음인 것이다. 당연히 사물과 현상 앞에서 이런 고요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고요한 적이 없으니 가라앉은 뒤의 상태도 알 수 없다. 그 상태를 알기 위해선 가라앉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한데, 세상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유물이 중간쯤 내려갔을 때, 어떤 부유물은 여전히 둥둥 떠다닐 때, 우리는 서둘러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 뒤흔든 스노 볼처럼 우리 마음은 다시 부유물로 가득해진다.


지혜는 말할 것도 없다. 지혜는 책상 앞에서 보낸 시간과 읽고 쌓아 놓은 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은 지식 획득의 과정이다. 지혜는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그중에선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지식의 해석도 필요하다. 자기반성도 필요하다. 오늘을 사는 이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한병철, 그리고 두 영화

한병철식으로 말하면, 요즘엔 정보와 데이터와 네트워크, 그리고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다. 모든 이와 얘기할 수 있지만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으며 모두와 만날 수 있지만 어느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궁금증을 바로 해결할 수 있지만 사는 이유에 대해선 누구도 확답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관조와 무위에서 더 멀어진다. 멈출 시간도, 쓸데없는 뭔가를 할 시간도 없다. 자기 착취와 과도한 커뮤니케이션, 무한한 성과 달성을 위해 시간의 브레이크는 떼어놓고 살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퍼펙트 데이즈>가 생각났다. 처음엔 <패터슨>이 떠올랐다가 그리 이어졌다. 마침 넷플릭스에 올라왔기에 봤다. <패터슨>은 <퍼펙트 데이즈>의 젊고 서양인 판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두 영화를 다 본 사람으로서, 결이 좀 다르다. <패터슨>엔 아픔이 없다. 관찰은 있지만 관조는 없다. 시를 생산하며 이야기를 생산한다. 반면 <퍼펙트 데이즈>엔 생산이 없다. 노동은 있지만 그 노동은 <리추얼의 종말>에서 언급된 성직자의 의례와 유사하다. 그의 청소는 노동이 아니라 성스러운 절차다. 평화로운 일과 후를 맞이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두 사람 다, 매일 같은 걸 보지만 <패터슨>은 해석하고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은 “본다.” 그게 다다. 해석하지 않고 포착한다. 같은 걸 반복해서 포착한다. 그 포착의 반복 속에서 다름을 찾아내어 저장한다. 결국 해석은 상징으로 옮겨지고 설명될 수 있지만 포착과 포착의 다름, 다름의 포착은 상징으로 옮겨질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결국 관조는 무한한 포착이며 무한한 자기와의 대화다. 거기서 삶은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대해선 조만간 더 길게 얘기하리라.


다시 말하건대, 한병철의 책은 무용하다. 이 시대에 아무 쓸모도 없다. 개발이든, 계발이든 도움이 안 된다. 그 도움이 안 되는 책을 통해 도우려 한다. 멈춰서 잠시 자신을 돌아보라고, 그를 통해, 그 멈춤만 있으면 가능한 자기 구원을 실천해 보라고 나지막이 얘기한다. 모닥불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떠는 친구처럼, 그저 그 시간 자체만으로 행복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삶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무책임한 지도 모른다. 선문답 같은지도 모른다. 쓸데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들 쓸모를 말하는 세상에서, 그 쓸모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려는 세상에서 이 쓸모없는 책의 메시지는 멀리,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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