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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로 철학하기-조르조 아감벤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1

by 최영훈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 게 무슨 뜻일까?”
만가넬리는 질문하는데, 나무토막이 그 작업장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스스로 ‘변형, 탄생’을 의도했기 때문이라 본 것이다.... 땔감용 나무가 존재 의미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졌다.’와 같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성서는 ‘새롭고 정확한’이라는 뜻의 카타볼레 katabolé라는 용어와 연관 깊다. 그러나 카타볼레는 그리스어로 ‘아래도 던지다 deicere.', '위에서 던지다 deorsum iacere'를 의미하는데 라틴어 번역자들이 적절치 못하게 창조 creazione로 번역했다” 그리고 20세기의 철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던져진’이라고 정의했을 때, 이 단어의 본래 의미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있다. P.45


동화 혹은 우화의 시작

어느 날, 나무가 떨어진다. 나타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칠레지아라 불리던 안토니오라는 목수의 집에 나무토막 하나가 나타난다. 그 나무토막은 칠레지아의 집에 놀러 온, 폴렌디나라 불리던 제페토 할아버지에게로 옮겨진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피노키오가 만들어진다.


잠깐만, 그러니까, 제페토 할아버지가 외로워서 나무토막으로 인형을 만든 것이 아니었어, 하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무토막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나타났다. 아감벤이 말했듯, 나타난 후 창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중의 창조인 것이다.


인간의 조건, 선택의 가능성

갑자기 나타난 나무토막은 형태가 없다. 존재도 없고 의식의 지향점도 없다. 그저 어딘 가로부터 떨어졌다. 그 나무를 가져다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든다. 그 후, 일련의 사태, 우리가 아는 그 모험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피노키오는 일종의 피카레스크 소설이다. 피카로, 즉 악인이 주인공인 서사인 것이다. <조커>와 <베놈>은 피카레스크 영화 중 가장 최신작이다. 멀리 보면 <대부>나 <좋은 친구들> 같은 마피아 영화도, <악인전> 같은 조폭과 형사의 협업을 다룬 영화도, 넓게 보면 피카레스크 영화라 할 수 있다. <다크나이트> 시리즈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잠깐만, 피노키오가 그런 류의 이야기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절반에 할애된 피노키오 원작의 전문을 읽어보길 바란다. 피노키오가 순진해서, 순수해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 아니다. 저자가 지적했듯, 반복되는 “그러나”와 이를 통한 사건의 반전, 그러니까 좀 원만하게 살아가려나 싶은 순간에 다시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은 순전히 피노키오의 “악”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악한 존재다. 읽는 내내 분노를 느낄 정도로. 당신의 기억이 다른 이유는, 어쩌면 "동화"로 편집된 걸 읽어서일지도.


다시 말하지만, 그가 제페토와 파란 요정의 선의를 번번이 배신하는 건 그의 선함이나 순진함이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악함에 끌리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그때, 언제나 최악의 선택을 한다. 좋게 말하면 모험, 나쁘게 말하면 고난은 그의 선택의 결과다.


멀쩡한 사람

그런데 그 악은 정말 "절대" 악일까? 학교에 성실히 다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모 말 잘 듣고 이웃에 사랑받는 아이가 되는 것. 그것이 피노키오 앞에 놓인 다른 선택지 중 하나였다. 물론 언제나 그 반대의 것을 선택했지만. 피노키오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고난을 겪을 때마다 “~걸”을 연발한다. 집으로 돌아갈 걸, 학교에 갈 걸, 요정의 말을 들을 걸, 책을 팔지 말 걸........ 후회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사태를 악화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주체를 훈육한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어 책망하고 벌한다.


엄밀히 말하면 근대 이후의 사회 시스템은,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말했듯, 자신을 스스로 성과주체로 내몰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 과정에서 주체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영화 <다음 소희>에서처럼 성과는 주체의 가치보다 우선한다. 심지어 주체의 자유는 그 성과의 달성 이후에 주어진다. 물론, 그 자유 또한 비자유, 유사자유에 불과하다. <매트릭스> 내에서 누리는 그런 자유.


피노키오는 시스템의 밖으로 나간다. 그때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당시, 이 신문 연재 동화의 독자가 어린이들이었음을 감안하면, 또 그 이후 축약되고 편집된 피노키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모든 텍스트(영화와 만화를 포함한)들의 소비자 또한 어린이들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 대가의 치름은 교훈적이다.


피노키오의 마지막 부분, 피노키오는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위한 우유를 사기 위해, 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성실히 일한다. 심지어 열심히 모은 돈조차 요정의 건강을 위해 사용한다. 반면 그런 기회가 없었던, 과거 함께 당나귀로 변했던 친구는 당나귀로 살다가 죽는다. 갱생의 기회를 얻지 못한 “밖”의 존재는 거기서 죽는다. 무서운 교훈이다.


결국, 시스템과 규율을 받아들여 거기에 걸맞게 사는 주체만이 “사람”이 된다. 근대적 존재가 된다. 피노키오의 결말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카를로 콜로디는 이 긍정의 결말을 통해 이탈리아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아감벤과, 그리고 피노키오를 분석한 만가넬리도 말한다. 그런가?


치른 값

그는 군인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 전쟁을 벌였을 때, 그는 토스카나 공국의 자원병으로 참전했었다. 그것도 육군 소령으로. 그의 군인으로서의 성향과 철학이, 통일 조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이 고스란히 이 “동화”에 담겨 있다고 보면 피노키오는 쉬운 텍스트다.


그러나 피노키오가 만나는 수많은 캐릭터들-사기꾼, 도둑, 진단을 뭉뚱그려 말하는 의사들, 아이들을 데리고 가 마음껏 놀게 한 뒤 당나귀로 만드는 마부, 거대한 물고기-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들은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 존재했던 인간 군상의 메타포다. 그들과의 부대낌, 그들로 인해 발생했던 수난과 고통은 자유의 대가였다. 시스템을 등진 존재, 시스템 밖의 존재로 살기 위해선 부득이하게 치러야만 했던 “값”이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삶,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치른 값은 없는가? 무료인가? 안정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다녀야만 하는 학교와 성실한 노동, 어른에 대한 복종, 신앙과 같은 권위에 대한 순응은 당연해 보인다. 아무런 희생도, 치른 뭔가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피노키오의 사람됨은 과거의 모든 자유와 모험과 즐거움과 쾌락을 유폐(幽閉)시킨 뒤 이뤄낸 것이라는 것을.


피노키오적 선택은 우리 앞에도 놓여있다.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와 시스템이 원하는 존재일 수는 없다. 그것은 거대한 물고기, 요나가 들어가 있던 물고기 안과 그 밖만큼 구별된 차원, 그 차원을 살아가는 존재의 차원이다. 마치 영화 <업사이드다운>에 나오는, 서로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세상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이 사회에서의 역할을 다한 후에 산으로 바다로 고향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그를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 용도가 다한 사회적 존재를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피노키오는 어린 왕자만큼 우울한 텍스트다. 책은 덮였고 생각은 이어져 당신의 질문으로 피어난다.


“책은 끝이 없다. 책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네모난 형태에서도 알 수 있듯 페이지는 책의 기저에 존재하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또 다른 문일 뿐이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었다는 건 마지막 문을 열었다는 걸 의미한다. 즉 마지막 문과 지금까지 문턱을 넘기 위해 열었던 문이 다시 닫히지 않을 때까지 무한히 열리고, 계속해서 열리고 있는 모든 문이 영원토록 경첩 소리를 내며 펼쳐질 것이다. 완성된 책은 무한하고 닫힌 책은 열려 있다. 책 전체가 우리 주위에 모여 있고, 모든 페이지가 한 페이지고, 보이는 문과 보이지 않는 모든 문이 하나의 문이다. 문은 정말 활짝 열려 있어 문턱을 넘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 자체가 문턱이 된다. 모든 문은 관통할 수 있다. 열린 문과 닫힌 문은 구별되지 않고, 문은 문에서 문으로 이어지고, 아무것도 닫히지 않고, 모든 것이 닫히고, 모든 것이 열려 있고, 아무것도 열려 있지 않다.”, 조르조 만가넬리, 조르조 아감벤의 <피노키오로 철학하기>, P.200에서 재인용.

이렇게까지 교정/교열이 안 된 책도 오랜만이다. "은, 는, 이, 가, 에, 의, 을, 를" 등의 조사가 틀리게 붙은 문장이 한 두 페이지마다 나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후반부, 피노키오 전문에는 그런 부분이 안 나온다는 것. 아감벤의 글과 피노키오의 교정을 각각 두 사람이 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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