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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한병철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0

by 최영훈

새벽

새벽 다섯 시 반쯤, 간호사가 들어온다. 나이트 근무를 한 간호사의 마지막 임무. 환자의 혈압과 체온을 재고 나간다. 딸은 다시 잠든다. 애니까. 소파에서 어설프게 들었던 내 잠은 사라졌다. 독서등을 켠다. 붉은색 빛만 은은히 나오는 단계로 조절하고 잠시 어둠에 적응한다. 해는 뜨지 않았는데, 그 빛의 조짐이 병실의 두꺼운 블라인드를 통해 전해진다.


동백섬에서 시작하는 해운대 해수욕장의 백사장은 파라다이스 호텔까지 이어지다가 청사포를 만나고, 이후 달맞이 언덕에 이르러 잠시 사라진다. 달맞이 언덕은 서서히 가파르게 오르다 신곡산을 만나고, 신곡산은 와우산과 만난다. 두 산은 어깨를 맞대고 해운대와 송정을 나눈다.


터널이 없던 시절, 해운대에서 송정을 가기 위해선 달맞이 언덕을 넘어, 신곡산의 옆구리를 스쳐 가며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언뜻 보이던 산중턱의 도로를 타고 가야만 했다. 지금은 드라이브 시간 동안 동승자의 마음을 떠보려는 음흉한 사내들이나 이용하는 경로로, 요즘엔 대부분 광안대교를 타다가 터널로 두 산을 관통하여 송정으로 넘어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을 패러디하여 말하자면, 터널을 지나면 바다가 나온다.


실루엣

병실은 그 두 산과 터널을, 그리고 달맞이 언덕 뒤쪽에 조성된 해운대 신도시, 그것도 1기 시절의 오래된 아파트를 마주 보고 있다. 때문에, 서퍼들이 막 떠오른 햇살의 옅은 빛을 마주하고 송정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시간, 그 옅은 빛은 산의 윤곽을 겨우 만들며 병실에 간신히 도착한다. 그 힘겹게 도착한 빛의 기운을 등지고 간호사가 나간 뒤에 남은 어둠을 잠시 응시한다.


어둠에 적응한 시선이 침대에 웅크리고 잠든 딸의 실루엣을 감지한다. 한동안 그 실루엣을 본다. 이젠 그 키가 아빠와 십여 센티미터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소녀가 잠들어 있다. 딸과의 거리는 불과 1미터 정도. 곤히 잠든 딸로부터는 어떤 소리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실루엣뿐. 몸을 일으켜 침대 곁에 선다.


딸의 볼을 살짝 만져본다. 딸은 아빠의 촉감을 느낀다. 안심하고 더 깊이 잠든다. 두 개의 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수건은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인다. 병실의 건조함과 싸우기 위해 늘 젖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두 수건. 만져본다. 말랐다. 다시 적셔 조용히 걸어놓는다. 딸은 잠들어 있다. 독서등을 켠다. 책을 본다.


항암 2회 차의 입원 주간, <데리다와 역사>와 <사물의 소멸>을 읽었다. 딸이 잠든 밤, 그리고 새벽, 혹은 딸과 나란히 앉아 저녁 시간을 보내며. 딸은 책을 읽고 있는 아빠의 어깨에 기대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때로는 아빠를 소파 한 편으로 밀어내고 누울 자리를 마련한 후, 아빠의 다리를 베고 누워 그랬다. 난 딸의 어깨와 엉덩이를 토닥이며 책을 읽었다. 내 강아지. 벌써 엄마보다 커버린 강아지.


충심

저자는 충심이라는 말을 쓴다. 충심(衷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마음이다. 충성을 부르는 충심(忠心)과는 그 마음의 결이 다르다. 저자도 인용했듯이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사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현대인을 걱정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들이 다 그렇듯, 전후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의 현상 - 대중문화, 소비문화, 주체의 분열 등 - 을 비판해 온 프롬에게 인간의 소비자로의 전락은 늘 걱정거리였다. 전후의 풍요 속에 사물, 물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소비자, 특히 미국 소비자들의 내적인 평화와 주체성 상실을 염려했다.


한병철은 오히려 그 “사물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 어떤 사물에도 애착을 보이지 않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전조는 있었다. 패스트 패션, 자동차의 페이스 리프트, 매년 등장하는 신형 스마트폰, 이케아를 필두로 한 쉬워지고 빨라진 가구 교체 시장, 수시로 변하는 다운 점퍼 길이의 변화 등등. 프랑스 사회학자 세르주 라투슈가 <낭비 사회를 넘어서>에서 말한 ‘계획적 진부화’를 한병철은 ‘새로움의 강제’로 바꿔 부른다.

새것은 여전히 새것인 것과 교체된다. 충심이 담긴 물건은 없다. 손 때 묻은 것도, 애착이 가는 물건도 없다. 흠집 있는 것도, 흔적이 남은 물건도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과 추억이 담긴 물건도 없다. 사물은 주인의 감정이 담기기 전에 사라진다. 어떤 물건이든 마찬가지다. 신상으로 바꾸지 않으면 낡은 사람이 된다. 신형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구형의 사람이 된다.


빈티지한 것도 새로 사들인다. 필름 카메라도 새로 사들인다. LP도 새로 사들인다. 오래 갖고 있어 낡아진 것들 대신, 낡게 만들어진, 과거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새것인 옛 것”을 사들인다. 거기엔 타인의 흔적도, 역사도, 이야기도 없다. 새 빈티지는 얼마 후 새로운 빈티지로 교체된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충심이 부재한 사물은 버려진다.


고요한 이야기

익숙하고 오래된 사물은 고요하다. 고요해서 평온하다. 새것처럼 시끄럽게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자랑해 달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 호흡, 내 체온을 나눈 사물은 그것을 다시 내게 돌려준다. 밖은 차갑고 건조하고 가차 없이 소란스럽지만 안은 내 것인 사물로 인해 따뜻하고 고요하다. 정적과 평화. 내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이 나에 실존을 증명한다. 내 역사를 말해준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일기처럼.


저자는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인용한다. 스투디움과 풍크툼. 그리고 그가 수없이 반복하며 말했지만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어머니의 사진에 대해서, 그리고 말없이 말하는 아날로그 사진들까지. 셀피, 그리고 아무 데서나 휘둘러 찍어 저장되는 스마트폰 속 사진들은 정보다. 자극이다. 그래서 잊힌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찍는 것들은 광고와 다를 바 없다. 반면 바르트의 사진은 "내"가 보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서, 영원히 남겨두기 위해서. 없는 사람, 세상에 없는 그 사람을 내가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


사물도 마찬가지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소각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여기 없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물을 살아 있는 사람들은 견딜 수 없다. 참사의 유가족들이 세상을 떠난 가족의 방을 그대로 놔두고 몇 가지 물건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유 또한, 역설적이게도 같다. 거기에, 그 물건에 곁에 없는 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을 열 때마다 울고 만질 때마다 운다는 걸 알면서도 남겨둔다. 차마, 버릴 수 없다. 비울 수도 없다.

사물과 리추얼

저자는 마지막 장을 주크박스에 할애한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진 후, 우연히 들어간 매장에서 마주한 주크박스. 그는 이걸 사들인다. 피아노와 철제 책상, 주크박스만 있는 공간. 주크박스는 음악을 틀어주는 기계, 그 이상이다. 주크박스에는 그것이 서 있던 모든 장소의 역사를 품고 있다. 그는 그 역사를 더듬어본다. 작은 싱글 판이 집어져 턴테이블에 오르기까지, 그 진공관 주크박스가 예열되고 음악을 틀기까지의 공백동안, 그 기계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이 부분을 읽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을 떠올렸다. 신형 핀볼 게임기에, 새로운 전자 게임기에 밀려 사라지고 멸종된 그 기계를 찾아 나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 기계는 그 남자의 추억을 몰고 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물과 음악과 리추얼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는 건 그것들이 주체에게 주는 충심, 그 충심으로 충만해지는 주체,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견고히 쌓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견고한 세계도 하나의 균열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더욱더 우린 그렇게 견고하게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그 앞장에서, 저자가 그렇게 길게 <어린 왕자>를 인용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여우와 왕자, 왕자와 장미의 관계. 서로가 서로를 길들인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사물로 인해 그 존재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사물은 그 굳건한 존재의 소유를 넘어 소장으로 인해 가치에 가치를 더한다.


사물과 리추얼이 사라진 주체는 정보 속에 떠돈다. 자극 앞에 무력하다. 소음 앞에 내던져진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안식처도 없다. 잃을 자기도 없지만 잃어버린 자기를 찾을 방법도, 조각난 자신을 재구성할 방법도 모른다. 마음을 준 것이 없으니 무엇이 있어야 자기 세계를 복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마치 유물 발굴 현장에 난데없이 파견된 비전공자가 호미 하나 들고 서성이는 꼴과 같다고나 할까.


사물, 사물의 기억

예전, 그러니까 90년대만 하더라도 남자들은 라이터에 집착했다. 난 담배를 안 피니 그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가끔 선배나 후배가 갖고 있는 지포 라이터를 손에 들고 그 부피와 촉감을 느껴보곤 했다. 하릴없이 불을 켜보기도 해서, 기름 떨어진다며 면박을 듣곤 했다. 또 어떤 이는 만년필을, 어떤 이는 가죽 표지의 다이어리를, 또 어떤 이는 지갑이나 벨트에 집착하기도 했다.


내게 그런 사물이 있던가. 한참 생각했다. 과거에도 없었지만 지금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만지작거리거나 앉거나 입을 때마다 내게 평안과 고요와 안온함을 주는 것에 대해. 스마트폰엔 관심이 없다. 내가 쓰는 스마트폰은 처남이 쓰던 노트 9다. 기억력이 떨어지시고 메모할 게 많으시다면 이걸 쓰시는 게 좋을 거라며,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면서 갖고 있던 것을 완전히 새것처럼 만든 뒤 준 것이다. 몇 년째 쓰고 있는데, 불만 없다. 스마트 워치는 아내가 쓰던 것이다. 컴퓨터는 감독이 기본 사양으로 맞춰줬다. 유튜브와 인터넷과 글만 써지면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옷은 있다. 가방도.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무조건 버리거나 기부한다는 게 내 철학이라면 철학인데(책을 그렇게 다뤘다면 아마 책장의 절반은 비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내 옷장에 있는 옷이 두 벌 있다. 둘 다 대학 시절부터 입고 다녔던 것이니 최소한 30년 가까이 된 것이다.


하나는 미군의 우드랜드 고어텍스 파카다. 찾아보니 공식 명칭은 US Army Gen 1 EWCS Woodland Goretex Parka라고 한다. 평택에서 부산으로 올 때도 가져왔으니 그 이전부터 입었던 것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입고 다닌 지 최소한 25년은 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초봄이나 늦가을, 집 앞 편의점에 갈 때 툭 걸쳐 입는다. 특히 촬영 현장에 갈 때는 꼭 챙겨 입는다. 주머니가 커서 콘티며 지갑이며 스마트폰 넣기 좋고, 야외 촬영일 때는 가벼운 비와 강한 바람까지 막아줘서 한 겨울에도 안에 얇은 경량다운 점퍼를 입고 걸치고 나간다.

다른 하나는, A2 FLIGHT JACKET이다. 이것도 대학 시절, 현재 어머니와 함께 살고 계시는 새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신 것이다. 색은 브라운. 그야말로 오리지널이라 가죽이 두껍고 무겁다. 대학 시절 즐겨 입다가 삼십 대에는 그냥 걸어두기만 했는데, 오히려 오십 대에 접어들어 입어보니 더 잘 어울린다.

가방은 세 개 있다. 두 개는 가죽, 하나는 합성 나일론 소재. 오래된 연한 브라운 색의 가죽 가방은 막 대학 강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아내가 사준 것이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새것은 몇 년 안 된 것인데, 미국에 계신 어머니가 우연히 발견한 뒤 내가 들고 다니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사서 보내신 것이다. Claire Chase의 messenger bag으로, 색이 진한 코코아 색인 데다가 들고 다닐 손잡이가 없어 그냥 놔두기만 했는데, 최근 한쪽 어깨에 걸치고 다녀보니 나름 편해서 종종 들고 다닌다. 특히 팀 차원이 아닌, 개인적으로 강연 같은 외부 활동을 할 때 주로 사용한다.


마지막 것은 일본 NOMADIC 브랜드의 TN-53 3 WAY Tote bag이다. 몇 년 전, 우연히 온라인에서 발견하고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했다. 백팩처럼, 서류가방처럼, 혹은 메신저 백처럼 멜 수 있다. 남자 고객 중엔 종종 이 가방을 어디서 샀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 이 가방엔 스마트폰, 지갑, 손수건, 세 개의 USB(저장된 내용이 다 다르다), 처남이 사준 20년 넘게 쓰고 있는 MP3 플레이어, 그리고 저 가방과 같은 해, 딸에게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한 말리 이어폰, 2백에서 3백 페이지 정도 두께의 책 한 권을 넣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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