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데리다와 역사 - 김민호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9

by 최영훈
데리다에 따르면 생은 물질적 죽음과 이념적 죽음 모두를 미루는, 즉 차연 시키는 ‘죽음의 경제’로, 저 죽음들과 시시각각 얽히면서 마치 샌드위치 같은 꼴로 유지되는 것이다. 해체의 관건이 시종일관 역사성의 갱신이었던 한에서 나는 데리다를 생애 내내 추동한 동기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직관이라고, 데리다의 철학에 입문하려는 이가 여전히-혹은 영원히-유효한 진리로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저 정식 속에 있다고 믿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을, 역사를, 생을 다르게 사유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삶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의미심장하게도 데리다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대담은 추후 『마침내 사는 법을 배우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PP.10-11.

선명한 삶, 죽음의 기척

병원에 있다 보면 삶은 죽음과 동행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암병동과 암센터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기척을 느끼며 아침을 맞을 것이다. 나 또한 딸의 곁에서 잠들 때마다 딸이 아무 탈 없이 일어나길 바라며 잠든다. 딸이 겪고 있는 병은 확률적으로 죽음보다는 생존 쪽에 압도적으로 치우쳐 있지만 그 일말의 가능성이 마음을 뒤흔들 때가 있다. 그 일말의 가능성이 우리의 현재를 덮쳐서 내 삶에서 딸의 부재함을 만드는 걸 부지불식간에 상상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하물며 내가 이런데, 죽음에 더 가깝게 다가서 있는 환자의 손을 붙잡고 투쟁을 하고 있는 가족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자연스레 겸허해진다. 삶과 죽음, 살아냄과 죽어감, 이 모두는 우연적이며, 우발적인 사태다. 밤도둑처럼 급습한 죽음의 징조 앞에서 삶은 쉽사리 무너져 내리고, 절망과 좌절은 그 자리를, 삶의 희망이 썰물처럼 밀려나간 자리를 바특하게 메우며 치고 들어온다.


한편에서는 이념적인 필연성에 의한 죽음, 즉 진리에 의한 죽음이 가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적인 필연성에 의한 죽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그리고 그런 두 죽음 사이에, 두 죽음의 변위로서 필연성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생이 있습니다., P.38


아주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아무런 위험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삶을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저 두 필연성의 체계 사이에서, 우발성을 승인해야 합니다. 우발성이나 우연성을 경유하지 않는다면 아예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간 의아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데리다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40.


삶의 우연성

저자는 “텍스트-밖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화두를 데리다를 모르는 일반인과 함께 생각한다. 세 차례에 걸친 강연을 통해 그 화두의 오해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데리다의 진심을 찬찬히 꺼내 풀어놓는다. 우리는 역사적 존재다.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며 우발적 존재다. 저자가 자신의 보조개와 자기 자식을 예로 들어 설명했듯, 나 또한 그리한다면, 요 근래, 딸을 찬찬히, 오래 본다. 나를 닮았다고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은 발뿐이다. 그 외에는 엄마도, 삼촌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심지어 이모를 닮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그 이목구비의 원 출처의 판별이 쉽지 않다.


DNA의 마술이다. 아이를 품고 있는 아내도, 그 아내에게 사정을 한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우연에 기댄 마술이다. 그 마술로 인해 마술 같은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의 존재로 인해 우리의 지루했던 일상이 마술처럼, 환상처럼 변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은 기록에 집착한다.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고 육아일기를 쓴다. 그 기록은 엄마이자 한 여자의 역사이자 아직 자신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는 무력하고 무지하고 무능한, 그 연약한 존재의 시간을 대신 기록하는 또 다른 역사가 된다.


저자가 데리다의 말을 빌려와 반복해 말했듯이,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히 남을지도 모르는 기록을 남긴다. 그것이 역사다. 나를, 그리고 당신을 설명할 방법은, 그 존재의 흔적을 남길 방법은,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면, 에르리튀르, 쉽게 말하면 텍스트,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기록 밖에 없다. 그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자기 역사의 사관(史官)이 되길 자처한다.


임의적이자 우연적이며 우발적 존재, 궁극적으론 역사적 존재, 그러나 언젠간, 이후 사라질 존재인 주체는 그 덧없음을 외면하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 이 존재의 덧없음을 이겨내기 위해, 아니 견뎌내기 위해 삶의 의미를 존재하는 내내 찾으려 한다. 철학은 그 찾음의 도구가 된다.


아이들 또한 그런 존재이지만, 그 존재의 불안을 겪지 않는다. 부모는 그 존재의 불안을 지우고 잠재우기 위해 사랑으로 그 존재의 당위성을 증명해 준다. 아이는 훗날 어른이 됐을 때 맞이할 시간, 그 보증인의 역할이 다한 시간, 혹은 그 보증인인 부모가 죽은 후의 시간을 그 사랑의 힘으로 견뎌낸다. 부모는 그 견뎌낼 힘을 함께하는 동안, 살아 있는 동안 전력을 다해 준다.


그러니까 데리다가 알제리, 프랑스, 미국... 그 모든 곳에서 이방인처럼 살았다고 하면 과언일까. 그는 어디에서도 제 집처럼 편안하게 머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르게 사는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 무지, 이 무력이 데리다의 생애와 사유를, 역사와 철학을 한꺼번에 규정한다. “저는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프랑스어를,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이 언어를, ‘모국어’라고 부를 수조차 없습니다.”, P.143.


철학의 이유

철학은 인생의 덧없음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 덧없음을 은폐하거나 그 덧없음을 잊을 수 있는 (종교와 같은) 환각제 대신, 그 덧없음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한다. 존재하는 동안 의미 있게 살아내는 방법 또한 가르쳐 준다. 더 나아가 나와 같은 이 덧없는 삶은 견디며 살아가는 타자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또 내가 다 살아낸 뒤에도 존재할 세상에서 나와 같이 그 덧없는 인생을 살아낼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 뭘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준다. 내가 없을 시공간을 살아낼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 어떤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 고민의 단초도 제공해 준다.


들뢰즈는 폐암으로 고통받다가 연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였다. 푸코는 동성애자였고 에이즈로 사망했다. 데리다는 췌장암으로 죽었다. 학자든, 작가든 자신이 처한 운명, 다른 형태의 삶을 받아 들고 그것의 현존과 과거와 미래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 고민의 궤적이, 어쩌면 학문적 사유로 드러났을지도.


앞선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데리다는 디아스포라였다. 그가 알제리에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결심했을 때, 그의 미국적인 이름이었던 재키를 자크로 바꿨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안쓰러움을 느꼈다.


십 대 후반의 똑똑한 청년이 고향 알제리를 떠나 파리로 들어설 때,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적으로 바꾸는 그 상황, 그리고 분명 자신도 프랑스어를 쓰는 데, 처음 마주한 파리의 고등학교 선생과의 프랑스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을 그 당혹스러움. 그리하여 자신의 알제리 스러운 프랑스어를 파리스러운 프랑스어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


그의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고 공감하며 한참, 그 어리 날의 데리다를 안쓰러워했다. 후에, 백인 여자랑 결혼할 때, 집안 어른들에게 배교자로 욕을 먹고, 훗날 미국에 갔을 때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와 그의 가족을 생각하며, 역시 같은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모국어를 모국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그의 언술을 보며,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텍스트를 통해 역사를 구성하고, 텍스트 밖에 있는 뭔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그 이유에 대해서, 약간은 공감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오직 기록뿐이다. 내가 죽어도 남아 있을 그 무엇, 나보다 수명이 긴 무엇을 세상에 남기고, 내 후손이 그 기록에 기록을 이어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 그 가능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희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족

저자 김민호는, 한 두 페이지로 한 학자의 삶을 요약하여 그 학자의 정신세계를 백일하에 드러내 보이는 글 솜씨를 갖고 있다. 이 글 솜씨를 얼마나 오래 볼 수 있을까 궁금하여 그의 나이를 알려 애써 봤는데, 여전히 그의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다만 나름의 검색을 통하여, 그의 파리 시절 유학 기간과 서울대학교에서의 학사, 석사 기간을 유추하여 봤을 때, 그가 최소한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리거나, 어쩌면 아직 삼심 대 후반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만약 그의 나이가 실제로 이러하다면, 학계에도, 나 같은 독자에게도 희소식이리라.


이 책은 에디스코 출판사에서 나온 필로버스 총서 2권이다. 난 이 시리즈의 3권인 김선형 학자의 <들뢰즈와 칸트>를 몇 주 전 구입하여 갖고 있다. 들뢰즈의 저서를 읽어나가던 중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잠시 주춤거렸던 차에 눈에 들어온 책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의 젊은 학자들에 그 학문의 역량을 펼쳐 보이는 장이 되길 자처하고 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돈 안 되는 일에 이렇게 사활을 거는 이들이 있어 그나마 세상이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나 같은 한량이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일 테고.


엄밀히 말하면, 최근 몇 개의 서평은 병원에 입원한 딸의 곁에서 읽은 것이라 <병원에서 읽은 책>이라 부르는 것이 맞으나, 봄이면 마무리될 투병을 고려하여 따로 매거진을 만들지 않고 기존의 매거진에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에 양해를 구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