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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회 - 한병철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8

by 최영훈

딸이 함께 가자고 할 때까지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는 쉽게 꺾였다. 걸어가면 이십 분 정도 걸리는 우암도서관, 혼자서 책을 반납하려 나서려는데 아내가 딸이 받아온 예비 중학생 권장 도서 목록 중 두어 권만 빌려 오라고 했다. 한 오십 권 정도 되는 데, 그중 절반 이상은 읽었다고 미리 표시를 해 놓은 딸은 그 표를 슬쩍 보고 두 권의 대출을 부탁했다. 그렇다면, 대출하는 김에 나도, 하는 생각으로 그나마 궁금하면서, 동시에 뭘 읽어도 실망한 적이 없었던 한병철의 책 두 권을 빌려 왔다.


예술은 어딘가 다른 곳에 머무른다. 예술의 집은 낯선 곳에 있다. 다름 아닌 낯섦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이다. 완전한 타자의 부정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반면 만족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킨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소름은 최초의 미적 형상이다. 소름은 타자의 침투를 표시한다. 전율할 줄 모르는 의식은 사물화 된 의식이다. 그런 의식은 경험을 할 능력이 없다.,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P.16.

고통의 출처, 그리고 연대

고통은 밖의 것이다. 상식의 밖이고, 일상의 밖이며 주체의 밖에 있는 것이다. 또, 고통은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안은 사적 역사의 안이고, 공동체 역사의 안이며, 신체와 주체의 내부다. 고통의 진원지가 어디든, 그 체감은 내적이다. 내적이기에 설명할 수 없다. 자식이 아파도, 부모가 아파도 같이 울어줄 수는 있어도 그 고통을 같이 겪을 순 없다. 당연하게도 그 고통을 겪은 주체 또한 자신의 고통을 마음대로 떠넘길 수 없다. 같이 느낄 수 없는 타자와 고통을 할당해 줄 수 없는 주체는 전능함을 내려놓고 겸손해진다.


결국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그 고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의 기원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또, 그 기원 없음을 확인한 고통에 대해선, 순순히 받아들인다. 반면 타자는 그 나눠질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연대의 손을 내민다. 아픈 이의 손을 잡아주고 지쳐 쓰러지는 얼굴에 어깨를 내어준다. 그렇게 고통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성숙하게 하며, 그 고통을 함께 겪는 이들을 연대케 한다.


무조건 고통을 퇴치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고통이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고통은 사회경제적 불화를 반영하며, 이런 불화는 사람의 심리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각인된다. 대량으로 처방되는 진통제는 고통을 낳는 사회적 상황을 덮어 감춘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과 약학으로만 처리하는 것은 고통이 언어가, 나아가 비판이 되는 것을 막는다. 고통의 대상성이, 더욱이 사회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약이나 매체로 둔감하게 만듦으로써 진통사회는 비판에 대해 면역된다. 소셜미디어나 컴퓨터 게임도 진통제처럼 작용한다. P.23


고통의 거부

이 사회는 고통을 거부한다. 고통을 진정시키고 없앤다. 고통을 겪는 것은 낭비다. 돌아서 가는 것, 방황하는 것, 실패하는 것, 위험한 것은 제거되고 권장되지 않는다.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으면 그리로 가는 루트를 가야 한다. 그 루트의 유지와 최단 시간 정복을 위해 건강은 “관리”된다. 아픔은 낭비니까.


그래도 아픔이 온다. 진통제가 처방된다.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아파할 틈을 주지 않는다. 내일 출근해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하며 학원에 가야 한다. 아픔에 대해 성찰할 여유가 없는 주체는,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말한 매끈한 사물을 닮은 매끈한 주체가 된다. 흠이 없다. 정신에도, 육체에도. 들뢰즈가 말한 깊게 파인 경로를 따라 굴러온 삶엔 새로운 홈과 흠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걸 상상할 수도 없다. 삶은 예술이 될 가능성을 폐쇄당한다.


결국, 이 고통의 출처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 생각이 금지당하면서 이 사회는 완벽한 외관을 유지하게 된다. 비판은 허락되지 않는다. 생각의 언어 또한 금지당한다.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세계처럼, <더 기버>의 세계처럼, 치료용 복제인간이 사는 <아일랜드>의 내부처럼.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준다. P.25
생존을 위한 투쟁은 좋은 삶을 위한 염려와 대립한다. 생존의 히스테리에 지배되는 사회는 좀비의 사회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오로지 생존만을 염려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살지도 않으면서 증식하는, 다시 말해 생존하는, 덜 죽은 존재인 바이러스와 닮았다. P.31


좀비, 고통 없는 존재

좀비는 죽지 않는 메타포다.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돌아온다. 6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생산된 좀비 영화는 자본주의 시대, 그야말로 생각 없이 사는 소비자에 대한 냉소를 위해, 파시즘적 광기로 치달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조롱을 위해 그 쓸모가 요구될 때마다 어김없이 재등장했다. 이러한 좀비 영화, 혹은 좀비 영화적 장치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고통 없는 삶,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데 사용됐다. 멀게는 <죽어야 사는 여자>, 두 번이나 영화화 됐던 아이라 레빈의 동명 소설 <스텝포드 와이프>, <트루먼 쇼>와 최근의 <비바리움>까지.


종종, 인스타그램을 보다 보면 자신의 사진이 끝도 없이 나열된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대체로 비슷한 사진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자신의 취향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된 공간 – 헬스장, 필라테스/요가 스튜디오, 수영장, 도서관, 서점 등-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열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각기 다른 장소에서 늘 같은 포즈, 같은 표정의 자신을 같은 배율로 찍어 올리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의 기록인가? 자기 증식의 반복인가? 의미 없는 성장, 양적 성장의 기록인가?


오늘날 자해하는 태도가 급증하고 있다. “자상刺傷”이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번지고 있다. 자신의 몸에 낸 깊게 베인 상처를 찍은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런 사진들은 누구나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기 자신으로 짐으로 짊어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이 지배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자상은 이런 자아의 짐을 내던지고, 자신으로부터, 파괴적인 내적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가망 없는 시도다. 이 새로운 고통의 사진들은 셀카의 피 흐르는 뒷면이다. P.47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살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P.93.

고통과 연대의 경험

이번 법원 난입 사태 인원 중, 2,30대 남성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나름의 진단을 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려는 젊은 여성들은 광장에 앉아 아이돌 노래를 부르며 긴 시간 동안 시위를 하고, 심지어는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농민 시위대와도 연대하며 같은 방법으로 시위를 하는 반면, 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려는 극우 젊은 남성들은 폭력적인 방법을 썼을까? 아니, 그전에 이들은 왜 극우에 빠져들게 됐을까?


고통의 맥락에서, 어쩌면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원인과 출처에 대해 담담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 적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더 나아가 고통을 터부시 하고 외면한 채, 여전히 상당히 구시대적이고 전근대적인 남성상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어 들었다. 또, 자기 원인으로 돌려야 될 고통과 사회적 원인으로 돌려야 될 고통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모두 사회의 탓으로 돌리거나, 반대로 모두 자신의 탓으로만 돌려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엔 자신을 피해자라 여기고 후자의 경우엔 자신을 패자로 여기는 이들이, 사회와 타자를 향한 절대적 공격성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그 양극의 공격성을 가진 이들이, 그 각각의 혼자만의 과대망상에 기반한 그 공격성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어 공통의 적을 향하여 발산된 사례가 이번 사건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들은 고통을 얘기하는데, 털어놓는데 여전히 서툰 것은 아닌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 연대의 경험이 없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또, 궁극적으론 죽음과 운명에 마주 선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 그 연약한 존재 기반에 대한 성찰이 없을지도.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논리도, 설득력도 없는, 하지만 흔들림 없는 신조와 확연한 결말을 보장하는 광신과 파시즘에 이끌렸던 건지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자신의 삶과 운명을 그러한 이념과 종교에 떠넘겼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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