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17
사르트르의 <구토>에 이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은 뒤, 다시 사르트르의 두 희곡 <닫힌 방 / 악마와 선한 신>을 읽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도서관 셔틀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 책을 또 빌려 온다. 이번이 끝일 듯. 딸의 치료가 다 끝난 후, 다시 가자고 하기 전까지.
행여나 항암 치료 중인 딸에게 감기나 독감이라도 옮길까 봐 요즘 수영을 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심신의 안정을 찾는 곳은 서점 밖에 없는데, 그걸 알고 그랬는지 본격적으로 딸의 치료가 시작되기 전 아내는 내 통장에 용돈을 제법 넉넉하게 넣어줬다. 덕분에 최근 서면과 센텀, 우리 동네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락거리면서 신형철, 에밀 시오랑, 최정우, 한병철, 에리히 프롬 등의 책을 샀다.
결국 책 빚이 늘어만 가는 형국인데, 도서관에서 대출까지 해오니 마치 기존 빚에 또 빚을 얻어오는 것과 같다. 이중 도서관에 빌려 온 책은 채권 회수 일자가 가까운 빚과 같아서 먼저 읽을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연달아 읽고 말았다. 다시 말하건대, 딸이 가자고 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도서관에서의 “대출”은 삼가려 한다.
(그녀는 눈물 없이 오열한다.)
가르생 : 헛수고야. 여기선 눈물이 안 흐르거든.
<닫힌 방>, 민음사 판본, P.54.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은 이 희곡에 나온다. 희곡을 읽어나가면, 이 말을 부연하여 말할 수 있는데, 타인의 시선 앞에 놓인 주체는 지옥에 갇힌 자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세 명의 사람이 차례대로 낯선 방에 들어간다. 마치 영화 <큐브>나 <쏘우>에서처럼. 처음엔 가르생, 뒤이어 이네스, 마지막으로 에스텔. 세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관객 –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무대에 올리는 것을 상정하고 써진 희곡이다. - 은 이들이 들어간 방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 모른다. 정보 없이 이 희곡을 읽어나가는 사람은 관객과 비슷한 입장인데, 이 방이 어디에, 무슨 용도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도 그랬으니.
세 사람은 방 안에 놓인 세 의자에 흩어져 앉아 대화를 시작한다. 무난하게 시작한 대화는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게 하고, 연극적 장치, 즉 희곡의 설정을 통해 이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며 그 방에서 자신의 장례식은 물론이고 자신이 머물렀던 집과 직장을 볼 수 있음을 관객들은 알게 된다. 그렇다. 뒤늦게서야, 이들이 모여 있는 이 방이 지옥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나를 포함한 독자는 물론이고, 연극을 보는 관객들도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잠깐, 지옥이라면, 뭔가 무시무시한 형벌이 계속되어야 하는 거 아냐? 피가 튀고 근육이 잘리며 뼈가 으스러지는 그런 형벌들이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아니 그런데 이 제2 제정 풍의 방이라니. 급사의 공손한 안내까지 있는, 그런 방이라니.
방이 지옥의 형벌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나와 관객은 알지 못한다. 그 무지의 전제를 두고 세 사람의 대화는 이어진다. 그 지속되는 대화 속에서 관객과 독자는 그들의 죄가 낱낱이 토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우선, 그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타자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욕망의 가차 없는 실현을 위해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거나 거기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을 철저히 외면하여 그 타자의 삶을 지옥에 빠트렸다. 타자는 지옥이라는 말은, 우선 여기에서 그 합당함을 얻는다.
사실, 우리가 무심히 봐 넘겼지만 <범죄도시 2>와 같은 영화를 보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자의 존재와 생명을 지옥에 빠트리는 경우는 흔하다. 보이스 피싱도 그런 범죄이고, 엄밀히 말하면 음주운전이나 데이트 폭력, 어쩌면 거의 모든 범죄가 그렇다. 더 나아가 성매매와 같이 자신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타자의 시간이나 육체를 구매하는 행위도 궁극적으론 타자의 삶을 지옥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조차 지옥에 빠트리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주체, 혹은 존재의 무게는 나와 타자의 무게가 합쳐진 것이다. 타자의 무게 없이 자신의 무게만 지고 가는 존재(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고 말했던 예수의 말에서 그 짐은 삶 그 자체의 짐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숙명처럼 지고 가는 타자의 무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와 상반되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속의 십자가는, 그리고 자기를 부인함은 자기 인정 과정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타자에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말했던,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타자의 자리가 이 세계, 이 사회에서 없어진 건 아닌지, 그 원죄의 의식 속에, 그 타자에 대한 윤리를 갖고 살아가는 말인지도 모른다.
사르트르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간다. 사르트르의 주체론이 그렇듯이 타자의 인식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모순된 상황이 주체를 곤란하게 한다. 지옥의 방,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협박하고 증오하지만 말을 멈출 수도 없다. 침묵과 평화는 내 앞에 있는 존재, 두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고 있는 존재, 설령 눈을 감더라도 나라는 존재의 기척을 인식하여 인식되는 나도 인식하는 타자도 불편한 상황들이 주체를 지옥 속에 머물게 한다. 타자라는 지옥에.
이네스 :.... 붉은 반점은 없어. 하나도. 어때? 거울이 거짓말하기 시작한다면? 아니면 내가 눈을 감아 버리고, 널 쳐다봐 주지 않는다면, 이 예쁜 얼굴로 대체 뭘 할 거지? 겁먹을 건 없어. 널 쳐다보지 않고는 내가 못 배기고, 내 두 눈은 늘 활짝 열려 있을 테니까.......(P.42)
....
가르생 : 난 너무 일찍 죽었소. 사람들이 내 행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안 줬단 말이오.
이네스 : 우리는 언제나 너무 일찍 죽죠. 혹은 너무 늦게 죽거나. 하지만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줄은 그어졌고, 이제 결산을 해야 해요. 당신은 당신 인생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P.79)
...
가르생 : 그래. 이제 때가 됐군, 청동상이 여기 있고, 내가 그걸 바라보고 있고 난 내가 지옥에 와 있다는 걸 알겠어. 당신들에게 말하지만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이 벽난로 앞에서 손으로 이 청동상을 쥐고서 모든 시선을 받고 서 있을 걸 예견했던 거야. 나를 잡아먹는 이 시선들을....... (그가 갑자기 돌아선다.) 이런! 당신들 둘 밖에 안 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런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결국, 주체의 천국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도래하지 않는다. 행위의 완성은 물론이고 인생의 완성 같은 것도 없다.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 삶인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지, 내 삶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뭘 안 했어야 했는지 또는 뭘 더 해야만 하는지, 이 모든 걸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살아내고 살아 있으며 살아가다가 느닷없이 죽음을 마주한다. 결산은 내가 죽어 사라진 지상에서 산 자들이 진행한다.
어떻게 결산하든, 우린 누군가에게 죄인이고, 누군가에겐 천사이며, 누군가엔 의미 없는 존재다. 불행히도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 침묵을 지키며 살길 희망하는 이가 있을지라도 그런 “천국”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속세를 사는 동안 우리 타자 앞에서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아가야 한다. 살아있음을 나와 타자, 모두에게 납득시키며 살아가야만 한다. 사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의 맥락에서, 지옥이다.
만약 이 희곡으로 독서 토론을 한다면 몇 시간이라도 모자랄 것이다. 16세기,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수백 개에서 수십 개까지의 제후국들이 그야말로 합종연횡을 반복하면서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또, 이 희곡에도 등장하듯이 유럽은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까지 몰아쳤다. 게다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16세기는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을 중심으로 교회의 권위와 각 제후국들의 권위는 곳곳에서 충돌했고 막 싹이 트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기존의 계급 구분에 빈부 격차까지 가져왔다. 그 결과, 조선시대, 이 땅에서도 그러했듯이 곳곳에 민란과 내전이 끊이질 않았다. 이 희곡은 그런 수많은 내전 중 하나를 배경 삼아 전개 된다. 독일 보름스를 배경으로.
내용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대주교에 대항하기 형성된 군대가 있다. 그 군대는 보름스를 공략하기 위해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묘하다. 보름스 자체가 타깃인지, 부르주아가 타깃인지, 사제들이 타깃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분명, 자신의 이복형제의 군대는 대주교의 군대에게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으니 서민 편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는 그 패배에도, 이복형의 죽음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이복형제라고 해도 자신은 사생아였기에 복수에도, 그렇다고 신앙심도, 또 그렇다고 애민의식도 없다. 누구에게도 적일 수 있고, 누구에게도 같은 편일 수 있는 모호한 존재. 그에게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쥐어지고,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각기 다른 존재의 생존을 부탁받는다. 누구를 죽이든, 이젠 그의 마음인 것이다.
괴츠 :.... 난 전능하신 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지. 내 안에서, 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소름 끼쳐하거든!... 가끔은 내가 상상하는 지옥이 오직 나만을 기다리는 어떤 사막 같아....
하인리히 : 지옥은 시장터야. 멍청아!
그는 명분 없이, 성을 공략하려 한다. 그야말로 순수한 악으로써, 신의 안티테제로써 지옥과 악을 구현하려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독보적 악, 지옥 그 자체가 되려 한다. 그러나 하인리히, 자칭 가난한 이들의 사제는 그에게 지옥은 만연해 있다고 말해 준다. 선은 없고 오직 악인만 있는 세상, 하인리히가 말했듯이 “단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증오하기만 하면 증오는 충분히 인류 전체로” 퍼질 수 있는 세상, 그런 인간들이 가득한 곳, 그 시대에 아무도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인리히는 단언한다. 그러자 괴츠는 내기를 하여 선과 악 중 하나를 실천하기로 한다. 내기에 진 그는 순수한 선을 실천하기로 한다.
여기서부터 더 오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복형의 죽음으로 영주가 된 괴츠는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 일 년 간 선을 행하면서 진짜 선이 존재한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이었지만, 그는 실제로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수혜를 받은 농부들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영주와의 관계가 평등하게 됐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형제라고 부르는 영주의 말조차 명령처럼 들린다.
한편, 도시에 면죄부를 팔기 위해 온, 그 방면의 전문가(실제로 교황 레오 10세에게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인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등장한다. 그는 농부들에게 일상적인 죄의 저지름, 그 유무와 횟수를 묻는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면죄부를 사라고 한다.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언한다. 이후 죄를 짓고 사함을 받지 못한 채 죽은 형제나 친척이 있는지 묻는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면죄부를 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구매를 통해 농부들은 기쁨과 평안을 얻는다. 심지어 행복해 보인다. 괴츠는 묘한 부조화를 느낀다.
사태는 이어진다. 누군가는 농민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누군가는 그걸 진정시키려 한다. 누군가는 그 폭동을 통해 세상을 바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 한다. 소요와 진압은 반복되고, 그 와중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은 희생된다. 신도 멀리 있지만 새로운 세상은 더 멀게만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그 세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지도.
결국, 이상주의자인 나스티 같은 혁명가들은 농민들의 폭동을 혁명으로 바꾸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그때마다 엄청난 전사자가 발생하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삶은 더 궁핍하고 황폐해진다. 어렵게 만든 괴츠의 이상적인 마을도 이런 냉혹한 현실 앞에서 그 존재를 위협받는다.
한 사람의 선의도, 악한 세상을 구원한 신의 은총도 낮은 곳까지 오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오직 선함을 실천하여 선의 존재를 입증하겠다는 일 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괴츠는 이제 새로운 선택 앞에 선다. 사랑이 불가능해진 세상, 선함의 그것 자체로 수용되지 못하는 세상, 신의 전능함과 공포가 오히려 작동하는 세상, 괴츠는 다짐을 한다.
괴츠 : 염려 말게, 나는 약해지지 않을 테니. 나는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할 걸세. 그들을 사랑할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걸세. 복종한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머리 위에 저 텅 빈 하늘을 이고 혼자 있을 걸세. 모두가 함께 있을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치러야 할 전쟁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치르겠네.
선이란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2만 5천 명의 죽음 앞에서 왜 신은 침묵하는지 묻는 괴츠의 질문에 하인리히는 인간은 무(無)라고 일갈한다. 또, 괴츠의 내기가 이겼는지, 졌는지, 그 재판의 결과를 묻는 힐다에게 괴츠는 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뒤이어 “우리한테는 이제 증인도 없어. 너의 머리카락과 네 이마를 보는 건 나 혼자야. 그가 없어지고 나니까 당신이 얼마나 진짜 같은지 모르겠군. 날 쳐다봐. 단 한순간도 멈추지 말고 날 쳐다봐. 세상이 장님이 되어버렸거든. 만일 네가 머리를 돌려 버리면 내가 사라져 버릴까 봐서 겁나. (그가 웃는다.) 드디어 우리뿐이야.”하고 고백한다. 그 후는 그는 위의 다짐을 하고 봉기의 장군으로 나선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르트르의 인간에겐 신이 부재한다. 있다 하더라도, 아주 멀리 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고 선택하고 살아간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누가 신이고 악마인지 명확히 구분하지도 못하고, 그럴 새도 없이 선의와 악의 여부를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신을 체감하려 한다. 신의 은총을 실감하기 위해 기도를 하고 교회를 나가고 손과 목에 십자가를 지닌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교적 행위로 인해 위안을 받으며 만만치 않은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기만적인 신을 향한 열망은 선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관건은 생존 아니겠나. 더 나아가 존재함일 테고.
역으로 말하면 그 모든 간단한 위안과 손쉬운 선택지를 거부한 채, 인생의 모든 순간, 그 선택의 순간, 갈림길마다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주체의 힘으로 헤쳐 나가는 삶이 괴로운 삶이라면, 그 삶은 스스로에게 악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을 던진 후 저자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라면, 위에서부터, 권력으로부터, 편협한 종교로부터 오는 그 손쉬운 질서와 해답을 거부한 채, 그 편리한 선을 거부한 채 기꺼이 불편한 악, 삶의 고통, 고통스러운 삶과 동행하며 인생에 숙명적으로 악마가 동행함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은 이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