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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의 종말 - 한병철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3

by 최영훈

졸업식의 리추얼

딸의 졸업식은 수요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오전으로 예정됐기에 입원하고 있던 딸은 외출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시간, 그러니까 오전 일곱 시 반에서 여덟 시 반 사이의 광안대교의 교통 혼잡도는 최고조에 달한다. 아내는 그 시간대보다 조금 일찍 출근을 하는 사람이어서 그걸 몰랐었는데, 최근 나와 교대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그걸 알게 됐다. 결국 아내는 담당의사인 교수님에게 “외박”에 대한 허락을 구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나도 있었는데, 오후 회진 시간이었다. 교수는 메디컬 드라마에서처럼 대여섯 명의 스텝을 대동하고 딸의 병실에 들어섰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돌아서는 그에게 아내는 광안대교의 사정을 말하고 외박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심플했다. “그러세요.”, 그 후 아내의 어깨너머로 병상에 앉아 있는 딸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졸업식 하고 자장면도 먹고 와.”, 그는 이 말을 던지고 유유히 돌아서 나갔다. 난 혼자 웃었다. 졸업식 날 자장면이라.


같은 세대의 리추얼이다.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짐작하건대 그의 나이는 나와 아내와 비슷할 것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사십 대 중반이리라. 그 나잇 대의 사람들은 졸업식 날 중국집을 갔다. 운동회를 끝나고도 갔던 거 같은데, 여하간 학사 일정 중 특별한 날에는 중국집에 갔다. 자장면에 탕수육을 먹었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언제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적이 있다.


“이 에세이에서 리추얼 Ritual은 그리움이 향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리추얼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윤곽을 대비를 통해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을 구실을 한다. 나는 리추얼이 소멸해 간 역사를 향수 없이 간략히 서술할 것이며 그 소멸의 역사를 해방의 역사로 해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재의 병적 현상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침식을 뚜렷이 드러낼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를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법한 다른 삶-꼴 Lebensform들을 숙고할 것이다.”P.7
리추얼은 상징적 행위다. 리추얼은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들과 질서들을 반영하고 전승한다. 리추얼은 소통 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대조적으로 오늘날에는 공동체 없는 소통이 만연하지만 말이다...... 리추얼이란 상징적인 집안에 들이기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P.P8~9

리추얼의 경로

우리는 어디서 만나야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도시마다 만남의 장소가 있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도 우리의 경로는 어긋날 일이 없었다. 약속 장소는 용도에 맞게 정해져 있었고, 때문에 어디서 만나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덕분에 여기저기 살았던 필자에겐 그 도시마다 중요한 장소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의정부에선 <중앙극장>에서 만나 <신포만두>를 가곤 했다. 평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택극장>이나 <책사랑>이라는 서점에서 만났다. 대전에서도 그랬고, 부산에서도 그랬다. 처음 아내를 만나러 부산에 내려온 날, 아내는 서면에 있는 롯데백화점의 조각상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땐 다들 그랬고 그것은 리추얼이었다.


소통 없는 공동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소통이 필요 없는 공동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예식과 의식, 상징적 장소와 그런 사물이 존재하는 공동체는 공동체 대 개인, 공동체 내부의 개인 대 개인 간의 긴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공동체의 철학과 가치관은 계절마다, 그 공동체의 주요 산업의 핵심 일정마다, 더 나아가 구성원의 성장 과정에 있어 중요한 시점마다 펼쳐지는 축제와 엄숙한 의식을 통해 전해진다. 그것은 텍스트 없는 상징으로, 상징 안에 들어찬 텍스트로 일순간에 전달됐다.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련이야말로 성과의 본질이다. 나르시시즘적 성광주체는 자아 리비도의 치명적 축적으로 파열한다. 그 주체는 자유의지와 열정으로 자기를 착취하여 결국 붕괴한다......... 리추얼이 규정하는 사회에서는 우울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영혼은 리추얼 형식들에 완전히 흡수된다. 그야말로 영혼이 텅 비게 되는 것이다. 리추얼을 세계를 성분으로 함유한다. 리추얼은 강력한 세계 관련을 산출한다.”, P.25


리추얼과 공동체

리추얼이 살아 있는 공동체는 소외도 없고 낙오도 없다. 물론 미신이 있을 수 있고 터부가 있을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상징으로 수렴될 수도 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개인을 붙잡아 두려 한다. 개인 또한, 거기에 닻을 내리려 한다. 정처 없이 떠도는 부유물이 아니라 견고하게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 존재. 그 존재의 뿌리를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리추얼이다.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일본은 리추얼의 사회다. 축제를 봐도 그렇고 과도한 포장지를 봐도 그렇다. 그들의 다도와 분재를 보라. 일본의 정원 형태 중 하나인 가레산스이(枯山水)를 보라. 강렬히 쓸모없음을 주장하는 것들이다. 마츠리는 또 어떤가.


엄밀히 말하면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는 고교야구 대회조차 그런 것들 아닌가. 일본의 고교 야구 선수들 중 프로야구를 꿈꾸는 선수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뭘 의미하겠는가?


일본의 야구를 하는 소년들에게 프로야구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한신 타이거즈의 고시엔 구장의 검은흙 위에 서보는 것이다. 졸업할 때까지, 불과 3년 안에 말이다. 프로에서의 커리어 따위는, 어쩌면 그 검은흙 한 줌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이행 의례, 곧 통과의례는 삶을 계절들처럼 구조화한다. 문턱을 넘는 사람은 삶의 한 단계를 끝맺고 새 단계에 진입한다...... 우리는 더 많은 공간과 시간을 생산하려 노력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상실한다. 공간과 시간은 언어를 잃고 침묵한다. 문턱을 말한다. 문턱은 변화시킨다. 문턱 너머에는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이 있다. 문턱의 환상이 없으면, 문턱의 마법이 없으면, 오로지 같음의 지옥만 남는다.”, PP. 49~50


문턱과 마디

문턱은 성장통을 발생시킨다. 문턱은 이곳과 저곳을 구분한다.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고, 지금과 나중을 구분한다. 그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문턱, 혹은 상징적이며 심리적인 문턱은 시기와 시기, 시점과 시점, 사건과 사건 사이의 마디를 만든다. 인간은 그 마디를 책갈피 삼아 자신의 역사의 낱장들을 기억하고 소환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역사 “책”, 선명한 마디가 있어 언제든 소환 가능한 자신만"역사"가 있는 주체는 타자와의 대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나무처럼, 옹이가 있는 나무처럼, 살아온 흔적을 갖고 있는 인간은 고유의 삶-꼴을 드러내 보인다. 아니, 드러나고 우러난다. 보이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우라다. 반면, 당연하게도, 그것이 없는 이는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 당장, 여기서 요란하게 펄럭이는 한없이 가벼운 키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리추얼을 밀어낸 것

이천 년대 초반, 광고홍보학과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몰링(malling)에 대해 얘기했었다. 크리스티안 미쿤다의 책으로 “제3의 공간”에 대해 얘기했었다. 무엇을 사거나 공간을 소비하는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의 무엇의 가치에 대해 논의했었다. 지금은 그런 게 없어지고 있다. 백화점은 문을 닫고 있고 마트는 철수하고 있다. 필요한 건 여전히 존재하나 그것을 사는 의식적인 행위는 멸종 위기다. 카트를 끌고 가는 아빠와 아동용 자리에 앉은 아이, 그 옆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집어 담는 엄마.


그것은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주말 여가의 한 방편이었다. 불과 십여 년 전, 우리 가족사진 중에도 그런 풍경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이상 마트를 가는 게 쉽지 않다. 그야말로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주문은 스마트폰이 하고 배송은 택배가 한다. 파는 이와 사는 이 간의 흥정도, 파는 이의 호객 행위도, 다른 이의 카트를 훔쳐보며 갖게 되는 소비 충동도 없다. 오직 필요만 있을 뿐이다.


리추얼의 삭제는 본질만 남겨 놓는다. 글을 쓰기 위해 잉크병과 펜을 준비하고 특별히 주문한 원고지를 정성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의식을 치렀던 문인들의 시대는 끝났다. 대신 커서가 밀고 나가는 낱말들이 있을 뿐이다. 종교 행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사는 양복을 입는다. 파이프 오르간도 없다. 절차는 간소화됐고 남은 건 설교와 헌금 시간뿐이다. 어차피 그게 본질이기에 소비자인 교인들은 반길지도 모르겠다.


리추얼의 실종, 그 후유증

리추얼의 실종은 사건이다. 그저 예식과 의식의 간소화나 절차 하나의 소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징의 상실이다. 상징은 A를 대신하는 B가 아니다. 학창 시절 배웠던 기호학 이론에 기대어 말하면 기표와 기의의 단순한 조화, 그것의 현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징은 언어처럼 일종의 거대한 약속이다.


약속은 양자, 혹은 다자간에 성립되는 것이고 그것이 세대와 세대, 시대와 시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될 때 그 약속의 굳어진 상징은 민족성, 국민성, 종교적 특성, 지역성 등을 형성하는 자양분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리추얼과 같은 고유한 상징의 상실은 역사와 문화의 상실이다.


그 상실이, 다시 말하건대, 일종의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을 상실한 민족이나 국민은 터전은 있으나 삶의 형태는 없는, 일종의 다른 형태의 디아스포라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광고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의 행태를 정처(定處) 없이 떠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저자가 저러한, 디아스포라의 불길한 운명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추얼을 토대로 한 상징의 상실, 그리하여 주체의 실존을 근거가 되는 뭔가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은 그것을 닮은 유령을 끝도 없이 쫓으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 유령은,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지치지도 않고 만들어내는 성과들이거나, 때로는 수명이 짧은 유행, 때로는 금세 반짝였다 사라지는, 소위 지금 이 순간 핫하다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그 무엇들은 상징으로 고착이 되기도 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에 사람들은 쉴 새 없이, 그리고 정처 없이 그 유령의 흔적을 좇을 수밖에 없고, 그 유령을 많이 목격하여 그 유령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 사람일수록 시대를 앞서가거나, 최소한 뒤처지지는 않는 사람이 된다. 그 유령은 스마트폰에서 출몰한다. 다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치 못하는 이유다.


우리가 잃은/잊은 것들

우리는 많은 걸 상실했다. 상징과 리추얼은 어느 해, 어느 순간에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다. 몇 해 전 딸의 운동회가 예고됐을 때, 무심히 아내에게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기마전하고 고싸움이지.”하고 말했다가 옛날 사람 취급들 당했었다. 심지어 아내는 그런 걸 본 적도 없다고 했다. 난 봤었다.


파주에서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 다닐 때, 그러니까 내가 1, 2학년 일 때,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고학년 형들의 기마전과 고싸움이었다. 마지막 이어달리기가 아니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 한 판 승부를 보기 위해 앞줄을 차지했다. 형들은 비장했다. 서로를 마주 보는 대열엔 열 살도 안 된 저학년 남학생도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있었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기마전과 고싸움이었다. 이어달리기가 하이라이트인 행사는 체육대회는 될 수 있어도, 최소한 내겐 운동회가 될 순 없다.


앞서 썼듯, 리추얼이 사라진 빈터를 효율성과 성과와 절차적 간소화와 어딜 가도 똑같은 내용의 축제와 놀이와 꽃놀이와 단풍놀이가 차지했다. 리추얼이 사라진 교회의 빈자리를 록밴드를 흉내 낸 밴드와 고성능 스피커와 마이크와 현란한 조명이 차지하고, 스테인드글라스가 사라진 창문을 현대식 창호가 차지한 것처럼. 묵직한 마호가니 나무 책상의 자리를 이케아의 가벼운 책상이 차지한 것처럼.


그 한없이 가벼운 것들이 덧 없이 순환할 때, 그러다 끝낸 그 가벼운 것들조차 우리의 일상에서 자취를 감출 때, 그리하여 돈이 안 되는 것들, 시간 낭비인 것들, 몸을 보호하고 햇볕을 가려주고 물건을 잠시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는, 그러한 옷의 기능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장식 같은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 어쩌면 우리는 <이퀼리브리엄>과 <더 기버>에 나온 세계를 살아갈지도 모른다. 마음을 흔드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동일한 건물과 동일한 옷과 동일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전수의 이유

남은 리추얼이 없다. 남은 것들도 희귀해지고 있다. 아나운서 김대호의 대가족이 모이는 명절 식사는 이제는 희귀해진 리추얼이다. 사라진 리추얼을, 희귀해진 리추얼을, 우리는 <한국인의 밥상>이나 김대호 같은 대가족 행사를 통해 간접 경험한다. 그렇다. 리추얼은 이제 문화재가 되어 버렸다. 졸업식의 눈물이 사라진 지금, 자장면을 기억하는 이들만 자기 자식을 중국집에 데리고 간다. 그 기억을 갖고 있는 누군가는 자기 자식의 졸업식 날 중국집에 가겠지.


앞서 말했듯, 리추얼의 전승은 공동체의 문화를 계승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리추얼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시장의 논리만 남는다. 효율성과 성과 주체만 남는다. 삶의 휴식과 마디가 사라지고 오로지 끊임없는 연결과 확장과 성공과 상승만 남는다.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될 수 없는 이들이 세상을 가득 메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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