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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Apr 19. 2023

해외살이 10년 동안 나의 자존감 변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과정은 계속된다

외면적 자존감

우리 엄마는 딸들의 자존감을 본인도 모르게 (?) 깎아내리는 대한민국의 엄마들 중 하나이다. 2남 2녀 중 첫째 장녀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하여 그녀가 처음 갖게 된 직업은 백화점 여성복 판매원이었다고 한다. 충남 깡촌에서 올라온 19살 소녀는 그렇게 깐깐하고 콧대 높은 서울사람들 사이에 껴서 보이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말로는 그 당시 촌년이라고 무시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아마 그 때문인지 그녀는 아직까지도 보이는 것에 집착 아닌 집착이 있다. 살집은 그냥 당연한 베이스이고 소수점단위까지 따지는 몸무게, 키, 머리스타일, 자세 등등 이 리스트는 끝이 없다. 우리 엄마왈 사춘기가 지나는 순간 자기 관리는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란다. 이 자기 관리는 쉽게 말해 늘 표준에서 표준미달의 몸무게를 유지해야 하고 피부는 하얗고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엄마의 신념이다. 


그녀는 본인의 신념을 보란 듯이 잘 지키며 살아와 언니와 나를 출산한 이후에도 단 한 번도 몸무게 55KG를 넘지 않은 채 30년 이상 같은 체형을 유지 중이시다. 피부관리는 물론 그냥 자기 관리 자체에 집착이 있는 편이다. 그러니 본인에게 이 '당연'한 라이프스타일의 잣대를 남들에게도 너무나도 쉽게 들이미는 것 같다. 이렇게 날씬하고 피부 좋은 우리 엄마는 어딜 가나 몸매 및 피부칭찬을 많이 듣는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외부적인 인정요인은 그녀의 자기 관리를 위한 원동력으로 전환되어 우리 자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예상할 수 있겠듯이 우리 자매는 이 때문에 자라면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나보다 3살 위의 언니는 뽀얗고 매끈한 피부를 타고났지만 강력한 유전자의 힘으로 인해 몸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체형이다. 정 반대로 나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언니보다는 좀 더 마른 체형이지만 큰 키 탓에 조금이라도 몸무게가 늘어나는 순간 엄마에게 한소리를 듣는다. 너, 관리 좀 해야겠다. 생각해 보면 어쩌면 엄마에겐 우리 둘은 본인이 한평생 수행해야 하는 과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큰 딸들이 있어?" 


우리가 가장 싫어하지만 슬프게도 가장 자주 듣는 말들 중 하나이다.


그것에 더해 나는 어려서부터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이국적인 외모의 아빠를 닮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지금 생각하면 꽤나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들을 짓궂은 남자아이들에게 듣기도 했다. 엄마는 어린 내게 늘 선크림을 꼭 챙겨 발라야 하며 절대 햇볕을 쬐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곤 했다. 엄마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크림을 아무리 발라도 아주 잠깐 햇볕에 노출이 되는 순간 곧장 타버리는 살결에 자라면서도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백크림이며 래시가드며 피부를 태우지 않기 위한 제품들이 줄줄이 나오는 한국에서 안 그래도 큰 키와 덩치에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더해진 여고생은 그냥 못난 이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 3년 내내 짝사랑하던 남자애에게 용기 내어 고백했을 때 내게는 공부하느라 연애할 마음이 없다더니 고작 일주일 후 나보다 훨씬 왜소하고 하얀 피부의 여자애와 사귀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아 그냥 못난이구나 절망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물론 내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고, 그 전말은 알 길이 없지만 어린 마음에 꽤나 상처를 받았다. 


그러다가 10대 말미에 호주에 가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은 180도 바뀌었다. 한평생 한국에서는 키 큰 깜순이라고 불렸는데 호주에 와보니 나의 큰 키는 호주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다지 크지도 않았으며 분명히 한국에서는 라지사이즈도 작다고 느끼며 살았는데 호주에서는 미디엄, 심지어는 스몰사이즈의 옷도 내게 충분했다. (한국의 옷 사이징은 지금까지도 천차만별에 미스터리다... 프리사이즈가 누굴 위한 프리사이즈며 대체 어디가 어떻게 프리 하다는 건지)


게다가 안 그래도 어두웠던 피부색은 작렬하는 호주의 태양의 힘으로 나날이 어두워져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부정적인 코멘트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태닝 한 피부가 부럽다는 말까지도 들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평생 맞추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엄마의, 그리고 사회의 미의 기준은 정말 무의미했다는 걸. 


처음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지난 평생 동안을 엄마의 기준에 맞춰 한창 자라날 시기에도 저녁 6시 이후엔 금식이었으며 자기 전엔 다음날엔 피부가 하얘지길 바라며 미백크림을 발랐으니까. 그런데 사실 엄마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무엇을 해도 어떻게 생겨도 충분하지 않은 그냥 사회의 미적 잣대가 어린 시절의 엄마에게 적용되었고 그 잣대는 어렸던 엄마를 통해 나와 언니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을 뿐이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남들을 재단하고 판단하길 좋아한다. 왜냐? 그게 본인 스스로를 검열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호주에서의 깨달음은 나의 외면에 대한 자존감을 수직상승시켜 주었다. 너무 크다고 여겨지던 몸집이 딱 벌어진 어깨, 건강한 몸매로 여겨졌고 그에 더불어 호주에서 서핑을 배우며 나날이 피부는 태닝이 되어 코코넛 껍질의 색을 갖게 되었다. 큰 몸집이 싫어 늘 움츠리고 다니던 한국에서의 삶과는 상반되게 고개를 올리고 가슴을 쫙 펴고 당당히 걷기 시작했다. 당당한 태도는 저절로 좋은 아우라를 가지게 해 주게 된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호주생활을 마무리지으며 겉모습은 같지만 그를 해석하는 알맹이는 완전히 달라진 채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면적 자존감

호주에서의 시간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내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새까매진 나를 보고 기겁하던 엄마는 나를 쫓아다니며 바깥에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그녀가 일컫는 미적기준은 한도 끝도 없고 나는 그를 충족할 의무도 없음을 깨달은 후라 그녀의 잔소리는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여전히 괴롭히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호주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보니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너도 나도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래봤자 20대 초반으로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주변 모두는 이미 졸업 이후 취업전선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모든 곳에는 취업준비니 자격증이니 토익이니 시험 등등 광고가 넘쳐나고 대학교 홍보전단지에도 취업률을 대문짝만 하게 붙이니 청년들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이에 더불어 호주까지 다녀온 작은딸에게 더 큰 기대를 걸며 당장 앞으로의 5년 계획을 가져오라며 닦달하는 부모님의 성화는 당연히 도움이 되질 않았다. 당장 다음 달도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5년이라니? 호주에서 동네 마실하듯 평온하고 여유로운 삶을 정리하고 오자마자 마치 시속 200km 자가용에 안전벨트도 차지 않고 실려진 것만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환경이 눈코 뜰 새 없이 그리고 쉴 새 없이 바뀌고 있었다.


이는 내게 엄청난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넌 충분하지 않아"라고 모든 사회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호주에서의 꿈같던 시간은 곧 '낭비'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을 포함해 나 자신마저도 빨리 '제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우울감의 소용돌이에 다시 한번 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할 줄 아는 것들 중 하나인 영어로 어찌저찌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집에 일정량의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역할은 했지만 퇴근 후나 주말에는 집에 있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밖으로 나돌았다. 술도 많이 마시고 클럽도 많이 다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감을 나만의 방식대로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쓴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고 호주에서 얻어온 에너지는 점점 불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호주에서 사귄 친구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영국인이었는데 네덜란드로 유학을 간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대부분의 영미권 출신이 그렇듯 그녀는 모국어인 영어를 제외하고는 다른 언어를 할 줄 모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어를 쓰지 않나? 오랜만에 영상통화를 하며 잘 알지 몰랐던 네덜란드에 대해 이것저것 묻다 보니 어느새 나는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을 잡고 있었다.  유럽행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는 처음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표를 예매했던 것 같다. 아마 일탈이 조금은 필요했었나보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 나온 그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수다를 떨며 그녀가 유학하던 네덜란드 남부의 도시로 떠났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기억 중 하나가 그녀는 호주에서도 참 밝았던 친구였는데 그 당시에도 여전히 행복함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에 비해 나는 마치 잊혀 변색되어 버린 은반지같이 느껴졌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짐을 푼 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본인이 재학하게 될 학교를 포함해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몰랐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참 친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게다가 더 놀랍게도 모두가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씩 웃더니 이 이유 때문에 본인도 유학 결심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닌 행복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고 마치 머릿속에 전구가 켜진 것 같았다. 나는 한국에 돌아오던 그 길로 곧장 네덜란드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100% 도피성이 맞았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 선택이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답답하게 옥죄어오는 주변의 기대와 시선은 정말 말 그대로 끝도 없는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숨이 차오르던 차에 네덜란드의 여행은 나를 살렸다. 


시간은 흘러 흘러 4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나는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4년 동안 나는 내 안에 변색되어 잊힌 은반지를 잘 닦을수 있게 되었고, 다시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고 모든 것이 적당한 것이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이곳에서 나는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하나의 개별적인 인격체로 또다시 성장하였다.


호주에서와의 다른 점은 가장 첫 번째로 이곳에 왔을 때의 마음가짐이 상당히 달랐다는 것이다. 호주로 향했을 때는 호기심이 주된 마음이었다면 네덜란드에 올 땐 내 안에 부족한 무언가를 찾아내서 채우고 싶다는 욕구가 주된 마음가짐이었고, 당연히 그 결과도 달랐다.


물론 모든 인간들이 자신을 남들에게 비교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네덜란드, 아니 적어도 내 주변에서만큼은 그 비교의 잣대가 본인 혹은 자녀의 외면적 특성 (키, 몸무게, 피부 등)이나 학업적 성취나 대기업 재직의 유무가 되진 않는다. 비교의 잣대가 오히려 본인의 진정한 행복함이면 모를까. 그래서 와인 한두 잔을 곁들인 지인들과의 대화는 종종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관한 것일 때가 많다. 


이곳에서는 끊임없이 행복의 원천을 내면에서 탐색하고 찾아낸다. 외면에서 오는 인정에 대한 욕구는 별로 중요시 여겨지지 않는다, 일시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면에서의 충족은 보통 더 장기적이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20대에 부자가 되지만 50대에 요절하고, 어느 누군가는 50대에 대박을 쳐서 성공하여 100살까지 산다. 어느 나라에선 20대 후반에 나이엔 직장을 가지고 정착해야 한다지만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10대 초반에 부모가 되고 20대 후반엔 조부모가 되기도 한다. 남들과 나의 시간은 참 다르게 흐른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타임라인, 그리고 자신만의 혼돈 속에서 방향을 찾아내는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아직까지도 나는 매일매일 내 안에 숨어있는 불안정함과 불안함을 달래며 산다. 가장 쉬운 예시로는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는 순간 쏟아지는 다른 누군가의 성공적인 (혹은 그렇게 보이는) 라이프스타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나, 뭔갈 잘못하고 있나? 나, 뒤처져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을 깨닫고, 한발 물러나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요령까지는 생겼다. 그래서, 내면적 자존감이 조금이나마 더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먼 길이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혹은 빠르게 (시간은 모두에게 상대적이니까) 하지만 꾸준히 내면의 힘을 키워나가고 싶다.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토대로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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