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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햇살씨 Nov 10. 2021

공포의 노랫소리

수업자료로 쓸만한 노래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예민의 "산골소년의 슬픈 사랑얘기"라는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쩜 이렇게 가사도 예쁘고 가락도 예쁠까~!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한 이 노래. 한참을 따라서 흥얼흥얼 불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노래를 완벽하게 배우게 되었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96년. 고2 어느 날이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날은 토요일.


기숙사에 있던 친구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고 기숙사엔 학생들이 몇명 남지 않아 적막과 고요만이 가득해서 왠지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그런 주말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친구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늘 북적거리고 시끄럽던 기숙사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니 아무리 친구와 함께 있다지만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던 찰라에 친구가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


거기에서 예민의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때 그 노래를 처음 듣고는 그 노래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당시에 인터넷이 있었는가 뭐가 있었겠는가!


노래가 너무 좋다면서 신이 난 나는, 친구에게 이 노래를 배우자며 노트에 가사를 받아적기 시작했고 친구는 내가 받아 적을 수 있도록 일시정지와 플레이 버튼을 연달아 눌러댔다.


어렵사리 가사를 베껴적고 난 후 본격적으로 한 구절씩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배워가기 시작했다.


이미 점호까지 마친 상태였기에 모두 잠들었는지 너무 조용해 큰 소리를 내면 곤란했다.


빛이 새어나가는 창문엔 까만 비닐봉지를 붙여두었고 문 아래쪽은 신발을 나란히 놓아서 불빛을 막았다.


그리고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구요~ 그애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 주고파~♪♬


몇 번이나 따라 불렀을까?


드디어 한 토막씩이 아닌 전곡을 따라부를 수 있게 된 순간, 어찌나 기쁘고 뿌듯한 마음이 들던지, 우리는 마주보고 키득거리면서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몰랐다.


잠이 들기 전까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잠이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점호시간.


층별로 줄을 서서 점호를 받는데, 여기저기서 수군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얼핏 들리는 소리가 '귀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 같다.


왜? 무슨 일이야?



친구와 나란히 서 있던 나는 다른 친구들과 후배들이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인가 궁금해 물었더니, 어젯 밤에 귀신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명도 아닌 여러 명이.


밤 늦게까지 굉장히 높은 톤으로 흐느적거리는지 노래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여자 귀신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서 무서워서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돌았다.

 


순간. 친구와 나는 마주보고 웃고 말았다.


그네들이 이야기하는 그 '귀신소리'는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래연습 소리였던 것임이 틀림없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에 다니러 가는 토요일 밤이면, 샤워실에서 혼자 샤워하다가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는 아이들도 있었고, 샤워실에서 나는 울음 소리를 듣고 맘이 여리고 약한 후배가 쓰러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것은 기숙사를 지은 그 자리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많이 묻혀있는 곳이어서 그렇다는, 아무도 근거는 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랬기에 지난 밤에 들려왔던 정체불명의 여자가 높은 톤으로 이상한 소리(우리는 분명히 노래를 불렀지만)를 내는 것을 혼자 잠을 자는 아이들이 들으면서 겪었을 공포감은, 아마도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거기에다 대놓고 '사실, 우리가 노래 배우려고 계속 노래 불렀던 거야' 라고 말하면 몰매를 맞을 것만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친구들이 모두 떠난 토요일 저녁.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이 들었다는 그 '울음소리'는 모두가 '귀신의 울음'이 아닌. 남아있는 어느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아니었을까?


북적대며 함께 생활할 땐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다가 홀로 있는 그시간에 토해내야만 했던 성숙하기 위해 겪어내야만 하고 통과해 내야만 하는 그 울음소리 말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나와 친구에게는 좋은 노래 한 곡을 배운  추억의 날로 기억되고 있지만, 우리의 노랫소리는 아직까지도 '정체불명의 귀신소리'로 남아 후배들에게까지 으스스하게 전해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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