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과 늦여름밤에 들리는 풀벌레와 귀뚜라미 소리가 참 좋네요. 여름에서 가을로 가고 있는 문턱에서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담고 싶은 음악이 있습니다.
막스 리히터가 재작곡해서 발표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입니다.
https://youtu.be/VvJZzWT6Qwc?si=CYrjqyPO-lXVPUb7
with Elena Urioste solo violin & Chineke! Orchestra
가끔씩 이 앨범을 꺼내서 듣습니다. 특히 봄 1악장, 여름 3악장, 가을 3악장, 겨울 1악장을 더 듣게 되는데요. 계절마다 이 앨범을 듣는 다기보다 마음의 어떤 계절이 파도처럼 덮쳐올 때 듣는 것 같아요.
작렬하는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는 초록의 강렬한 생명력, 마음의 결절은 이 선율 안에서만큼은 지금 이 순간의 여름으로 맘껏 질주하며 뿜어져 나갑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음악을 빌려다가 잠시라도 속 시원함을 채우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요? 이따금씩 신호 없는 한강변 대로를 운전하면서 메탈리카의 Sad but True나 Enter the Sandman를 소환할 때가 있는데, 그때도 비슷한 마음일 거고요.
막스리히터는 애플 뮤직과의 인터뷰 중에서 비발디 사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맘껏 말하고 있습니다.
'사계'는 어릴 때 제가 가장 먼저 접했던 클래식 음악이었죠. 멋진 멜로디와 극적 전개, 이야기, 아이디어 등 이 음악의 모든 것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로고송이나 광고 음악으로 사방에서 들리니까 좀 식상해지더군요. 제게 'Recomposed'는 처음 이 곡에 대해 가졌던 경이로움과 애정을 되찾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한 존경심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 막스리히터는 그것을 재작곡해서 2014년에 발표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사운드를 시도하고 접목시켜 재녹음해서 2022년에 다시 발매했어요. 그 마음과 태도를 결과물로 만들어 낸 것이 황홀하도록 멋집니다. 원래 막스리히터를 좋아했지만, 이 앨범소개 글을 읽으며 더 좋아하게 되었죠.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바로 셀린 시아마 감독의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입니다.
이 곡은 영화의 메인테마처럼 존재하고 있어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열게 된 순간에도, 시간이 흘러 그 사랑을 되돌아볼 때도 이 음악이 뜨겁게 관통하고 있죠.
되돌아보고 기억한다는 2가지 관점으로 이 음악을 영화 안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재해석 한 ‘ 되돌아본다 ‘ 는 사랑의 관점입니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신 아폴론이 인정한 당대 최고 음유시인이자 음악가입니다.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와의 사랑 이야기는 비극이죠. 오르페우스는 죽어서 지옥으로 간 아내를 구하려고 지옥까지 갑니다. 천신만고 끝에 저승의 왕 하데스에게까지 음악연주로 감동을 주고, 마침내 그녀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갈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가 있었지만, 거의 마지막 순간에 잘 따라오는지 궁금해서 돌아보았고, 결국 아내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예요.
영화에서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뒤돌아 봄으로써 추억을 선택했고,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렇게 반문하죠.
에우리디케가 “ 뒤돌아봐요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 구조를 그녀가 바꿀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 상황에서 에우리디케가 스스로 파멸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성이 있는 거라고 이동진 평론가는 말합니다. 결국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끝맺음은 그녀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말이겠죠. 신화를 오르페우스의 주체에서 에우리디케의 주체로 바꾸는 관점인 것입니다.
영화의 끝무렵, 마리안느가 저택을 떠나며 헤어지는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말합니다. 마치 이 신화이야기를 자발적으로 되새기기라도 하듯이 “ 뒤돌아봐요 “라고. 그렇게 그들은 이별했지만, 서로를 가슴속에 묻고 아로새기며 사랑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훗날 마리안느는 이 신화의 그림을 출품합니다. 어느 감상자는 " 멋진 오르페우스예요. 보통 뒤돌아보기 전이나 아내의 사후를 그리는데 여기서는 작별하는 것 같군요."라고 말합니다. 죽음과 운명이 선택한 이별이 아니라, 서로를 영원 안에 간직하기 위한 이 사랑을 보며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 돌아봄을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으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던 여러 순간 중에 이 음악도 존재했습니다. 하프시코드 앞에 나란히 앉아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이 곡을 알려줄 때가 그랬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그들에게 시간은 많이 흘러 있었습니다. 엘로이즈는 음악회에서 이 연주를 관현악으로 들으며 마리안느가 하프시코드로 연주해 주었던 그때를 되돌아봤을 겁니다. 반가워하고, 숨을 몰아쉬며 사무치게 눈물을 흘리다가도 이내 다시 벅찬 감동의 미소를 띠기도 하지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라고 말했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천국이 되었던 그때를 이 음악 안에서 돌아보며 지금은 없는 다른 한 사람을 음악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엘로이즈를 멀리 건너편에서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마리안느. 또 하나의 초상화를 그려내기라도 하듯 그녀를 시선으로 감싸 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비발디 사계의 여름 3악장 선율을 강한 이끌림의 감동으로 섬세하게 풀어내며 아름답게 종결합니다. 아, 음악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대체할 수 없는 여운을 짙게 드리워주네요.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풀벌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오늘 밤산책길에도 풀벌레 소리와 음악과 함께 걷고 뛰다 왔는데요. 요즘은 밤이 시원해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더 많이 북적이는데, 땀내며 건강하게 뛰는 분위기에 이끌려 한 번이라도 더 뛰게 돼서 좋습니다. 그 소소한 위안들을 머금고 비발디의 사계 여름 전 악장을 들으며 이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한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