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서쪽 하늘의 호박색 빛 조각을 먹고 일렁이는 자작나무.
그 잎새들을 바라보며 가까이 걸어감이 좋다.
물에 비치는 햇살을 윤슬이라 하는데 나뭇잎에 비치는 햇살의 반짝거림은 무어라 부를까?
바람이 휘익 불면 자작나무 잎새들은 더욱 반짝거린다.
마치 나 여기 있다고 두 팔 벌려 반갑게 흔드는 손처럼.
바람이 잔잔하면 잔잔한 대로 그윽하게 아른거린다.
휘청거리는 환희의 춤이기도 하고, 비틀대며 기억을 품는 모습같기도 하다.
여러 다양한 조경수들과 섞여 있어도 유독 더 흔들거리며 반짝인다.
언젠가부터 더 궁금해졌다. 자작나무는 왜 저렇게 빛이 날까? 하고.
같은 바람이 바로 옆의 다른 나무에게 불지 않을 리 없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자작나무의 이파리를 가만히 만져봤다.
나뭇잎 두께가 더 얇은가? 크기가 더 작은가? 더 반들반들한가?
옆의 다른 조경수로 가서 잎사귀들을 만져본다.
모양새는 엄연히 다 다르다. 자작나무 잎의 크기가 작은 편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나무들도 적지 않다.
또 다른 어느 날, 바람이 아주 잔잔했던 날이었다.
다른 조경수의 나뭇잎들은 거의 흔들림이 없었는데, 자작나무의 잎사귀들만 이리저리 움직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봤다. 대체 무엇이 다른걸까.
그 때 나무의 몸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조경수들의 나무기둥은 훨씬 굵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굵은 곁가지들이 안정적으로 뻗어나가서 수형이 넓다.
하지만 자작나무의 하얀 기둥은 가느다랗고 중간까지 곁가지가 거의 없다. 수형이 가늘고 길쭉하다. 잎사귀가 작기도 하지만 가느다란 몸뚱아리 하나로 서 있기 때문에 유독 더 잘 흔들렸던 것이 아닐까? 그동안은 반짝이는 나뭇잎만 쳐다봤던 것이었다.
아마 단지 안의 모든 조경수목이 자작나무로만 되어 있었다면 이 다름을, 이 특별함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생긴 모양을 그대로 인정하고 삶이 던져주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살면 다양함 속에서 자신만의 빛으로 반짝거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흔들리면 어떤가. 흔들리기에 이렇게 존재 자체로도 반짝일 수 있는 것임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큰 시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작나무가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 힘을 거기에만 썼다면 우리는 나뭇잎의 반짝임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해 기우는 서쪽 햇살로 윤슬처럼 반짝이는 물결의 자작나무 잎새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라벨의 물의 유희가 생각난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로 감상해 본다. 역시 잘 어울린다. 반짝이고 일렁이는 빛과 거침없이 아름답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녀의 손끝에서 흐르고 있다.
https://youtu.be/nSNGK6dJ0qs?si=GBAVcxVLb_PMOBmg
라벨 - 물의 유희, 마르타 아르헤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