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동네 야채과일 가게에서 싸움이 났다.
이십대로 보이는 체격 좋은 청년과 호리 한 사십 대 후반의 아주머니 사이에 고성의 욕설이 오갔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지 않아 다툼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야채가게 계산대 앞에서 저 정도까지 화가 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못 들은 척 자신들의 일만 했다. 그들의 침묵으로 미루어, 아주머니가 실수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 나오라며 역정 내는 아주머니를 다른 손님이 만류하며 그만하라 하니 생각이 한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렇다 한들, 야채가게 감자를 다 삶아 먹은 것보다도 많은 양의 욕을 먹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청년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은 딱 세 종류였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뱉는 강도는 세지고 횟수는 증가했다. 불구경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싸움의 원인보다도, 아주머니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청년의 감정선은 무엇이었을까, 가 궁금해졌다.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의 저자 김열규 교수는 말한다. 욕은 발언되는 것이 아니라 폭발된다고. 좌절, 실망, 실의, 분노, 증오등의 감정을 품은 폭탄. 수많은 뇌과학자, 심리학자, 소통 전문가들이, 화가 났을 때 뇌상태를 설명한다. 90초 심호흡만으로도 감정조절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 순간 저 청년에게 그 이론이 통할 리 없다. 그는 이미 세 가지 욕을 번갈아 폭파시키며 분비된 아드레날린에 도취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힘없는 야채가게 점원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자가 된 듯한 쾌감.
<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의 저자 송상호 목사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실패를 경험하면 욕이 튀어나온다고 한다. 뜻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세상에서, 내 맘 같지 않은 손님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건드려졌다면.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욕밖에 없었을 거란 정당성이 생긴다.
김열규 교수와 송상호 목사가 말한 욕의 긍정적 힘 때문이었을까. 은행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 청년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너스레도 떨고, 이런저런 혼잣말도 꽤 크게 떠들어댔다.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야채가게 싸움은 끝이 났는데, 자꾸 석연찮은 마음이 들었다. 단지,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연장자에게 욕을 했다는 것만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송상호 목사는 욕에도 수준이 있다고 했다. 남의 신체적 장애나 상처를 의도적으로 건드리거나 상처를 주기 위한 하수의 욕. 할만한 할 상황에서 하는 중수의 욕. 김삿갓이나 마당놀이 마당쇠의 욕처럼 시대의 아픔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고수의 욕. 그리고 비뚤어진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최고수의 욕.
모세 율법에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란 말은 당한 대로 복수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함과 통제함을 가르친다고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눈을 상했으면 그 정도 선에서 갚아야지 눈을 상한 분노와 성냄으로 목숨까지 취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청년이 쏟아내는 하수의 욕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거침과 힘의 과함이 인간 대 인간으로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아주머니가 먼저 실수를 했다 해도 그의 행동이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라면 이 또한 나의 편파적 시선일까. 그래도 아주머니 옆에 풍채 좋은 남편이나 건장한 아들이 있었다면 다른 풍경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석연치 않음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