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생의 운명?
현과 준이는 연년생이다. 오늘은 현. 준이와 함께 책 읽는 날. 형 현이가 5분 먼저 도착해 자석 블록으로 만들기를 시작했다. 전에는 디폼블록으로 팽이도 뚝딱 만들어 놀고, 구슬로 모양을 내어 물로 고정시키는 아쿠아비즈도 재미있어했다. 플레이도우를 조몰락거리면 조금 더 안정감을 느끼는 듯 보이기도 했다. 현이는 그렇게 손으로 하는 활동을 좋아했다.
동생 준이가 책 읽는 날을 깜박했다며 5분 늦게 도착했다. 녀석은, 소파에 앉아 있는 형 옆으로 다가가 테이블 주변에 있는 블록을 낚아채듯 쓸어갔다. 가져가지 말라며 순식간에 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러다 현이가 날린 주먹에 배를 맞고 준이가 바닥으로 쭈욱 늘어졌다. 처음엔, 현이보다 덩치가 큰 준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번을 재촉한 끝에 몸을 일으켜 앉은 준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형이 배를 너무 세게 때려 화가 났다는 것이다.
"고작 고것 가지고 우는 울보냐?"
"명치 맞아 죽는 사람도 있어! 나도 한 번 때려 볼까?"
"너도 나 맨날 때렸잖아!"
"내가 언제!"
격해지는 상황에서 책을 펴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대신 논리를 펴기로 했다. 준이가 먼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현이는, 여전히 '맞아도 싸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잘못했을 때 맞는 게 정당하다는 논리는, 현이 네가 잘못했을 때도 적용되는 것일까?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준이가 먼저 잘못했잖아요!"
논리는커녕, 성난 마음에 불만 더 지핀 것일까. 그래서 현이에게는 생각해 보라 하고 준이에게, 형에게 사과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다. 준이는, 좋은 말로 하면 될 것을 '내놔'라고 거칠게 말하고 폭력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단, 네가 먼저 묻지 않고 블록을 가져간 것에 대해서는 사과할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너랑 12년을 살았어. 좋은 말로 하면 네가 듣냐? 그냥 두면 내가 만들어 놓은 것도 부숴놓을걸!"
현이는 그동안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지 억울함에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울지는 않았다.
형은 '원래 나쁜 놈'이라며 준이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원래부터 나빴을까... 언제부터 나빠진 걸까? 왜 나빠진 걸까? 좋았던 기억은 없어? 지난번에 형 간식도 잘 사다 주던데?' 하고 물으니. 준은 형이 8살 때부터 자기를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준이가 8살 때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며 현도 지지 않았다.
준: 내가 한 살 때는 기저귀도 갖다주고 착했는데.
현: (목에 핏대 세우며) 그땐 내가 어리석었어!
준: 예전엔 귀엽다고 뽀뽀도 해준다 하더니!
현: 내가 언제 너한테 뽀뽀를 했냐!
준: 엄마 핸드폰 동영상에 다 찍혀 있어.
거실 바닥과 소파에 앉아 대거리를 하던 형제는 어느샌가 내가 앉아 있는 큰 테이블로 와 점잖게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인신공격 하지 말고, 서로 말 자르지 말라는 요청에, 손을 들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차례를 기다렸다.
현이는 동생이 자기를 '야'라고 불러서 준도 나쁜 놈이 되기 시작한 거라며 자기가 계속 계속 참아야 하느냐고 했다. 이에 준은, 삼국지 제갈량도 맹획을 계속 참아주었다고 했다. 현과 준의 제갈량이 용서해 준 횟수가 서로 틀리면서 인터넷으로 일화를 찾아보고, '칠종칠금'이란 고사성어를 배우게 되었다.
서로의 억울함을 실컷 풀어낸것일까. 형제들은 조금씩 진정을 했다. 시간이 되어 준이가 먼저 집으로 갔다. 현이는 집에 가면 준이를 봐야 한다며 집에 가기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다 풀리지 않은 마음을 쏟아냈다. 준이 녀석이 잘못해 놓고 엄마한테 일러서 억울하게 혼난 적도 많다고 했다. 동생들이 어지른 거 자기가 치워야 한다고도 했다. (분명, 자기는 청소하다 정신을 딴 데 팔아서 하다 만다는 이야기를 초반에 나와 나누었던 녀석이다.) 그러다 말끝에... 자기도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동생이 자꾸 덤비니까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고 했다. 자기 마음도 있는 건데, 준이가 자기 마음을 무시한다고 했다.
책장 선반에서, 현이가 만들었던 삼각형의 아쿠아비즈를 건네주며 말했다. 첫째들이 좀 억울한 일들이 많긴 해. 양보도 해야 되고, 내 장난감도 부서지고, 내가 안 그랬는데 혼나기도 한다고.
"어떻게 아세요? 첫째세요? 다음생엔 외동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가려운 곳이 시원하게 긁어진 듯. 현이가 원래의 장난기 많은 얼굴로 돌아와 웃었다. 아쿠아비즈를 보며, 자기가 왜 그걸 만들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가 만든 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억울함을 들어주는 삼각형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서러울 때마다 얘기 나눠 보라고.
사건전말을 전해 들은 현이 엄마가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현이와 준이가 두세 살 즈음이나 되었을까. 족발고기 입에 물고 서로 나눠 먹는 장면이었다. 동생 먹여주고 좋아라 웃는 현이. 커다란 족발 들고 순하게 웃는 준이. 세상 귀엽게 웃는 두 아가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고하다니.
태권도에서 오는 아들 데리러 나가는 길에 다시 만난 형제들.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킬킬거리며 놀고 있었다. 우리 셋이 더 가까워진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