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el Dec 09. 2021

당근이 쓰다.

분에 넘치는 건 덜어내기.


나는 청소, 정리정돈에 잼병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바꿀 에너지도 뜻도 없었다.


반대가 끌린다고 했던가

서른셋 깔끔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연애 시절, 그의 자취방에 가지런히

말라가고 있는 빨랫감에 호감을 느꼈었다.


육아가 시작됐다.

분명 오은영 박사님이 정리되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상상력이 자란다고 하셨다.

나이쓰! 나는 육아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아이가 콩을 다 쏟아 바닥이 쑥대밭이 되어도

아이가 먹다가 흘려서 식탁 주변이 초토화가 되어도

나의 멘탈은 단단했다. 심리적 타격 제로.

대충 닦으면 돼지. 치우면 돼지.


그 옆에 썩어가는 한 영혼이 있었다. 남편.

나는 몰랐다 나는 괜찮았으니까.


함께 살아가는 것은 배려가 필요했다.

나는 바뀌기 위해 힘을 내봐도

며칠 지나면 도루묵이었다.


나는 두 가지 결론을 냈다.

첫째, 치울 거리를 없앤다. 고로 집의 물건 자체를 줄인다.

둘째, 정리 정돈이나 청소를 노동이나 내가 하기 싫은 일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로 정의를 바꾼다.


첫 번째를 위해 무언가 사려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물건인가 10번 심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두 번째를 위해 남편이 퇴근 전 귀에 콩나물을 꽂고

오디오 북이나 강연을 들으며 지금은 남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중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퇴근 해 돌아온 남편에게

“여보, 내가 여보를 사랑해서 설거지와 빨래를 해두었어!”

라고 꼭 얘기를 해줬다.


그리고 물건을 줄이기 위해 당근마켓을 애용 중인데..


사실 이 글을 쓴 이유는

당근 마켓을 하다가 겪은 이야기를 해볼까 해서였다.

(하! 또 주제가 뭔지 딴 길로 빠질 뻔!)


정말 무지할 때.. 아이 돌 무렵 전집 세트를 들였다.

4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3년 할부로 긁어서 아직도 매월 12만 원씩 내는 중이다.

잠시만요, 피눈물 좀 닦고 갈게요..


아이는 책을 안 좋아한다.

나는 깨끗하게 인정했다. 남편도 책 별로 안 읽었단다.

당근에 올렸다. 중고 시세 찾아보고 그보다 낮게 헐값으로 올려뒀다.


연락이 왔다.

난 6만 원이라고 했고 컨디션을 묻길래

낙서 없이 깨끗하다고 했다.

에누리를 원하시길래 5만 원에 드린다고 했다.

다음날 오셔서 가져가셨다.


문제는 오늘 아침, 당근은 알람을 꺼둬서 들어가 봤는데

문자가 28개이다..?

요지는 책 사진 3장을 보내며 낙서와 스티커가 있단다.

제발 답장 좀 달라며..


내가 보자마자 딱 든 생각은 뭘까?

‘아 나 또 실수했네.. 분명 낙서했던 기억이 없는데.. 별로 읽지도 않았었는데.’

‘근데 사람을 사기꾼 취급하네. 낙서 아주 조금이고 있어도 그 가격이면 저렴한 건데..’

‘그리고 내가 6만 원이었는데 에눌해달라셔서 5만 원에 해드린 건데..’

‘뭐지 나 무시하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불쾌하다.

당장 답장을 보내고 싶지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흘려보내 본다.. 개뿔 안된다!!!


30분 후,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제대로 안내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깨끗하다고 해서 샀는데 낙서가 있으면 사기당한 기분일 거야.


답장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정말 몰랐어요. 오늘 제가 받으러 갈게요.”


그리고 한 참 또 생각하니 다시 열 받는다.

꼬치꼬치 캐묻고 가격을 깎아 사가더니

흠만 보려는 사람 같다. 왜 감사할 줄 모르지?


흠칫, 나 또 판단했네. 나 이 사람에 대해 잘 아나?

아니, 이 사람은 나 아나? 모르지. 우리 서로 모르지.


나도 내 사정이 있듯이

이 사람도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부정적으로 단정 짓고 있는 거야.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편하신 시간 알려주시면 제가 찾으러 갈게요. 제가 중고 시세 알아보고 가격 더 저렴하게 올린 거라 만약 6만 원에 올렸다가 낙서 여부 알았어도 5만 원은 받았을 거 같아요. 그래도 제가 안내를 잘못해드려서 놀라시고 기분이 언짢으셨을 거 같아요.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그제야 마음의 평온이 찾아온다.

이제 상대방이 어떤 대답을 해와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다.

나도 내 사정이 있었고.

그녀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겠지.


그녀의 사정은 지금은 이해가 안 돼도

그녀로 태어나 그녀의 삶을 살았다면

이해가 안 되는 게 이상할 테니까.


오히려 그녀는 나를 낙서 확인도 안하고

사기 판매한 파렴치한으로 알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실수한건 사실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건 내 생각뿐.


나는 오늘도 이렇게 수행 중이다.





+실시간 후기.


그녀에게서 사과해주어 마음이 괜찮아졌단

연락을 받았고 그 말에 나도 녹아

2만원을 돌려주고 거래를 마쳤다.

우리 둘 다 마음이 편해져서 기쁘다!

후, 첫 내 반응대로 대응했으면

얼마나 최악으로 치닫았을까 아찔하다.

명상 만세~

작가의 이전글 미라클 모닝의 함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