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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Feb 22. 2022

당신과 하룻밤

내가 언제 당신을 찾아갈지 모르니 놀라지 마라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다기보다 쏟아져 내렸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질기디 질긴 내 생명줄은 융단폭격의 *화망(火網)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무차별 투하하는 포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필휘지 유언장을 썼습니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짓듯 얼기설기 엮어 지은 유서, 당신께 띄웁니다. 


언젠가 당신이 말했습니다. "내가 언제 당신을 찾아갈지 모르니 놀라지 마라." 설마 그 "당신"이 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난해 12월 7일 화요일이었지요. 온 세상이 설국으로 변한 첫눈 내린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며칠 전 선물 받은 귀한 커피콩을 수동 그라인더에 넣고 갈았습니다. 자동 그라인더도 있지만 커피콩 가는 소리도, 커피콩이 부서질 때 뿜어내는 커피 향도 즐길 겸 바쁘지 않은 날엔 수동 그라인더로 커피를 갑니다. 조금 거칠게 간 커피를 프렌치 프레서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커피가 우러나는 4분 동안 지난밤 딸아이가 구워놓은 크로와상을 미니 오븐에 넣고 빠삭하게 다시 한번 구웠습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머그에 악마보다 검다는 커피를 쪼르르 따르고, 하얀 접시에 갓 구운 크로와상 한 개를 올려 들고 흰 눈 내린 창가에 앉았습니다. 


진한 커피 향과 버터향이 고소한 빵 냄새를 맡으며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노트 북위에 수없이 많은 발자국…. 밤새 누군가 다녀갔나 봅니다. 셀폰에 기록된 시간을 보니 밤새 걸었고 지금도 걷는 중이었어요. 지금도 찍히는 발자국을 보며 나는 서둘러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마지막 발자국이 찍힐 때 나도 "서프라이즈" 하며 내 마음을 찍어 드리고 싶었거든요. 당신이 마지막 하트를 누르실 때,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내 마음, 꾹 눌러 발행했습니다. 


"꽃이 없어 시를 씁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에

채석강 푸른 바다처럼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

소복이 쌓인 첫눈 위에 뿌리고 가신 

백만 송이 고혹의 장미

나는 꽃멀미를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든지 해도 좋을 꽃 멀미 속에서 

 밤새 뒤척이던 푸른 바다를 찍어 감사를 씁니다 

서툰 글 자위에 눌러주신 당신의 귀한 발걸음 

떼어 놓으시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장미가 피어나기를 

눌러주신 글 자위에 인디고 블루 푸른 입술로 봉한 나의 기도 눌러씁니다 

부디, 수취인 불명, 화인(火印)을 찍어 돌려보내지는 마십시오."


 고백한 자작시 "꽃은 없습니다" 였지요. 작전은 성공이었습니다.


"혹시....... 저.... 인가요? 저한테 주시는.... 아닌가요? 으음..... 밤새 다른 분이 다녀갔을 수도 있어서 저라고 딱 단정하기가 어려워서... 으음... 만약 저라면, 고맙습니다. 과분한 선물인데요"라며 본 적도 없는 그 예쁜  얼굴을 붉히셨지요. 온 밤을 온전히 바치신 정성스러운 발길에 내가 드릴 수 있는 건 한 수'시'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매일 브런치를 먹고 브런치를 읽지만 매번 라이킷을 누르지도 구독을 눌러 힘을 실어주지도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 누군가의 글방에 온 밤을 바쳐본 적이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날이 있다지만 내 시간은 언제나 소중하여 타인에게 바칠 시간은 없었으니까요. 짧다면 한없이 짧고 길다면 긴 하룻밤은 역사를 만들고 인연을 만들고 누군가는 길을 찾아 떠나는 운명의 시간입니다. 그날의 감동으로 아직 절필하지 못한 나는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했던 말 "내가 언제 당신을 찾아갈지 모르니 놀라지 마라."대신 "빨간 우체통"으로 당신을 찾아갑니다.


혹시 보셨는지요? 크리스 에반스와 앨리스 이브 주연의 영화 "Before We Go"를요. 자극적인 장면이나 큰 볼거리도 없지만 잔잔한 울림을 주는 영화 "Before We Go"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는 하룻밤을 같이 보냅니다. 그 하룻밤은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제와 상처를 치유하고, 각자 가야 할 길을 찾아줍니다. "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과 성씨네 처녀의 하룻밤은 허생원에게 평생토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각인되지요. 테레사 수녀는 생전에 "이 생에서의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짧은 이 생의 시간을 피력했지요. 어떤 이는 짧은 하룻밤 동안 만리장성을 쌓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하얀 눈 소리 없이 내리던 밤, 소리 없이 건네주신 하룻밤은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절필의 유혹이 손짓할 때, 다시 써 보라 속삭이는 천사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여차 저차 해서 브런치를 폭파하고 떠났다가 타코야끼"로 돌아오신 '그냥 몽상가'님!

폭탄 전문가이 신줄 알고는 있지만 지금도 폭탄을 제작하고 누군가의 밤을 폭격하시는지요. 외로운 일인 줄 알면서 외로운 길을 걷는 수많은 무명작가들의 절망에 폭탄을 던지시는지요. 그런 아름답고 황홀한 폭격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룻밤을 바쳐 누군가의 절필을 막을 수 있다면 이런 융단폭격은 도미노처럼 산불처럼 번져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가수 김종환은 외로워서 죄를 짓는다고 노래하지만 "외로워서 죄를 짓는 밤"이 아닌 "외로워서 외로운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는 '라이킷'소리, 당신도 듣고 계시지요? 


P.S. I Love You


*화망(火網):다수의 총이나 기관총, 기관포, 대공포 등으로 목표를 향해 화력을 집중시켜 화력으로 만들어진 그물 같은 살상 지대를 형성하는 사격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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