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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Dec 15. 2022

동행의 조건

헤프고, 융통성 없고, 먹물도 없어야 한다

끊임없이 우는 새를 본 적이 있으세요? 먹이를 찾아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동안 큰 소리로 울어대는 기러기떼를요. 리더를 중심으로 V자를 그리며 4000천 킬로를 날며 쉼 없이 우는 이유는, 멀고 험한 여행길에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그들만의 응원 방식이라 합니다. 기러기들의 *아름다운 동행"... 이 아름다운 동행을 보고도 소름 돋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기러기들의 아름다운 동행의 소름이 사라지기도 전에 "I got goose bumps"를 또다시 경험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 고백했기 때문이지요. 이 나이에 사랑고백이라니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좋았냐고요? 아니요. "아꼈다 뭐하냐"며 "이제부터 막 퍼주려고요" 하는 이 사람, 무서웠습니다. 세상에나 "소름이 돋다 못해 등줄기에 또르르 땀방울까지 흘러내렸습니다. 커튼 뒤에 숨어도 책상 밑에 숨어도 나를 찾아내는 이 사람...


"말보다 손발이 먼저 나가는 ㅇㅇ파 두목이라 소개했습니다.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요? 내가 잠수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 새빨간 발자국을 잠수 정위에 찍어놓고 갔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낌없이 연애하고 사랑한다"가 삶의 모토라며 분홍빛 연서를 보내옵니다. "모르셨어요? 제가 자칭 타칭 사랑교 교주란걸" 이라 하니 신자 등록이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좀 헤퍼 보이는 아니 많이 헤픈 이 사람, 나에게만 편지를 쓴 게 아니었습니다. 내 귀를 열어주시고 내 마음을 붙들어주신 한때 내 삶의 파수꾼이셨던 분께도 '편지를 썼다' 합니다. 정확히는 제가 쓴 편지를 그대로 필사한 것이지요. 짧지도 않은 편지를 또박또박 손으로 옮겨 쓴 뒤 직접 전달했다 합니다. 지난 5월 " 풍월당 주인장 계십니까?"라는 제목을 달아 띄운 편지였습니다. 정작 보낸 뒤엔 나도 잊은 편지가 청록색 봉투에 담겨 전달되었습니다.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뽑아져 나올 것을 손으로 베껴 쓰고, 우표 한 장이면 가 닿을 것을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걸어올라 '풍월당'에 전달했다 합니다.  직접 전달해야만 하는 이유와 간략하게 적은 제 소개까지 동봉해서 말입니다. 융통성이라곤 깨알만큼도 없습니다.


헤프고 융통성 하나 없는 이 사람, 발타자르 그라시안을 읽은 적도 없나 봅니다.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갈 때 알아야 할 지혜들로 가득하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와 여러 가지 미덕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상대의 속셈을 간파하고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 상대를 적절히 이용하는 생활의 지혜도 알려준다." 고 소개하는 "사람을 얻는 지혜"를요. 발타자르는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마라"합니다. "자신의 패를 보여주고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진 돈을 모두 잃게 된다. 말과 행동을 아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물리쳐라.  사람들이 집요하게 당신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할 때는 먹물을 내뿜은 오징어처럼 당신의 생각을 감추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 모양입니다.


먹물도 없는 오징어 같은 사람... 막 퍼주고 아낌없이 주겠다며 자신의 속을 다 꺼내 보이는 이 사람, 알고 보니 촉수만 달린 연체동물이었습니다. 뼈대 없는 집안이라 그럴까요? 흐물흐물 무너져 안기는 이 사람. 막가파라 겁주던 사람, 안아보니 한없이 따뜻하고 촉촉합니다. 그러니 나도 그만 꼿꼿이 세우고 다니던 척추를 뽑아 던지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척추를 뽑고 나니 돋아나 춤을 추는 촉수를 뻗어 작가의 방을 더듬어 봅니다. 오후 햇살이 그려낸 나뭇잎 그림자가 한 폭 그림으로 걸려 있는 정갈하고 따뜻한 '이 작가'의 방을요.


방안은 정갈한 그녀의 방처럼 군더더기 없고 거침없으며 때론 비수처럼 뾰족한 문장들이 등댓불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날 선 문장들 속엔 엄마이기에, 더 살아내야 하기에 맘껏 꺼내 놓을 수 없는 속 울음이 여기저기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둘째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암 진단을 받고 "저 아이 중학교 졸업식만 보게 해 주세요" 라며 "신파 속 주인공처럼 그 소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작가의 장래희망은 '할머니'입니다. 가장 기분 좋은 날은 "약속이 취소된 날"이라며 "선물처럼 뚝 떨어진 시간을 받으면 아무것도 안 한답니다. 깨어있는 게 싫어서 전기 콘센트에 자신을 꽂고 "충전하듯 잠만 잔다"는 그녀가 나를 깨웁니다. "아직 다 쓰지 못한 당신 이야기가 될래요. 그러니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날 마저 써요."라 합니다.  말기암 환우인 그녀가 아이들이 주인공이라 너무 아플까 겁이 나서 보지 못했던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나를 깨웁니다. "어떤 기적을 원해요?"


그녀가 물음을 던진 영화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은 부모의 이혼으로 별거생활을 하게 된 형제(류노스케와 코이치)가 가족의 재결합을 꿈꾸며 기적을 향해 여행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입니다. 형인 코이치는 규슈 신칸센 노선의 두 열차가 서로 교차해서 지나갈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소원을 이루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갑니다. 드디어 두대의 기차가 달려오고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도 몽타주처럼, 번갯불처럼, 번쩍이며 지나갑니다.  


오늘은, 번개처럼 지나가는 생의 간이역에서 '이연'이라는 기적을 만나고, 기적을 꿈꾸던 코이치가 읽어주던 '시'를 내 손으로 적어봅니다. "산다는 건, 살아있다는 건, 목이 마른 것, 나무에 비치는 태양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 올리는 것, 당신과 손을 잡는 것."이라 읊어주던 시를요. 나는 이제 목이 마를 때, 태양이 눈부시거나 비가 올 때는 당신 생각을 하겠지요. 오늘같이 겨울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눈처럼 하얀 당신이 찾아올 것 같아 온밤을 하얗게 지새울 겁니다. 


누군가의 기적이란 것도 모르는, 융통성 없고, 뿌릴 먹물 한 방울 없는, 그래서 너무 아름다운 당신이 끼룩끼룩 노래를 부르네요. "내가 앞서 날갯짓할 테니 바싹 따라오세요.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 나는 그렁그렁 맺힌 당신을 닦으며, 촉수가 다섯 개인 당신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 그래요, 당신과 함께 갈게요, 당신이 너무 이쁜 할머니가 되는 그날까지요."




PS: 답장을 기대하며 쓴 편지가 아니었는데 답장을 받은 것보다 기쁘고, 

      염치없게도 고마워서 "내 잔이 넘치고 넘치나이다" 


*아름다운 동행

https://youtu.be/7r1SpOaQS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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