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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Aug 13. 2024

가면대 가면

살아야지, 힘들어도 버텨야지

아리엘이 노래하네요. 오늘은 "Angel of music"이에요. "그동안 어디에 숨어있었어? 정말 넌 완벽했어, 난 너의 비밀이 알고 싶어...." 목소리 큰 그녀가 "오페라의 유령"을 만나 실력을 발휘하네요. 힘이 넘쳐요. 그녀처럼, 목소리가 큰 것도 자랑할 재능도 없는 나는 오늘도 밥을 해요. 신선하고 좋은 재료로 따뜻하고 정갈하게요. 내가 지은 밥으로 힘 나는 누군가가 있다면 밥을 해야지요.  K-culture 열풍으로 K-food가 대세인 지금, 한국인의 힘은 밥심이란 걸 내 이웃에게 보여줘야지요. 


힘 좀 써 보려 했는데, 오늘은 힘쓸 일도, 도마 쓸 일도 많지 않아요. 그래도 필요는 하죠. 톡톡 탁탁. 단호박, 브로콜리, 깻잎, 연근. 씨를 빼낸 노란 단호박은 반으로 잘라 초승달 모양으로 썰어요. 하얀 연근은 동글납작하게 썰고, 초록색 브로콜리는 한 잎크기로 잘라요. 야채준비가 끝나면, 주인공을 등장시켜야 해요. 오늘의 주인공은 냉장고에 대기 중인 타이거새우예요. 튀김 하면 역시 새우튀김 아니겠어요?  오전에 스티브스턴 수상시장에서 거금의 출연료를 지불하고 모셔왔어요. 머리에 쓴 투구와 내장, 껍질을 제거하고요. 꼬리와 앞다리는 살려두어요. 우람한 몸통도 맛있지만 바싹하게 튀겨낸 새우는 앞다리와 꼬리가 일품이거든요. 


주르르 흐르는 튀김반죽을 뜨거운 기름에 몇 방을 떨어트렸어요. 금세 떠오르네요. 가만 보니, 떠오르는 건 하얀 밀가루반죽이 아니라 동그란 얼굴이에요. 말없이 누군가의 밥상을 차리고 계신...  "누군가의 밥그릇을 채워주고 말없이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하신 분이에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요리고수예요. 본업을 봤어요.  교수님이시데요. 한때, 제게 교수라는 직업은 존경의 대상이며 스승의 대명사였어요. 세월과 함께 의미와 존재감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곳곳에 존재하는 선생님이요. 성직자, 교수, 변호사, 의사. 저는 그 훌륭하신 분들을 명함에 찍힌 직위와 직업만으로는 모르겠더라고요. 겉과 속이 다른 수박처럼, 글도 그 사람이 아니고, 직업이나 말로는 속사람을 알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과 처지에 맞춘 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나 역시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요. 페르소나라 하죠. 쓰기 싫어도 써야 하는 가면도 있고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쓰는 가면도 있어요. 오늘은 수많은 가면 중, 애용하는 창고털이 가면을 쓰려고 해요. 겉과 속이 같은지, 글과 삶이 같은지. 교수님 한번 털어보려고요.


모두가 잠든 오늘 새벽이에요. 창고를 터는 일이 처음도 아니건만 비장한 마음이 들데요. 여느 창고보다 높고, 단단한 재질로 지은 창고란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많고 많은 방중 첫 번째 방 문을 따고 들어갔어요. 어렵게 따고 들어간 첫째 방에서 나는, 흐물흐물 무너지고 말았어요. 캄캄한 창고 안에서 찢기고 밟힌 가면을 만났거든요.  "폭탄을 만들고, 감옥을 지키고, 술집가게문을 닫는" 아버지라는 가면이요. 교수님도 아버지여서일까요? "생존을 위한 싸움터의 비굴함과 분노"를 "하회탈처럼 찡그려 웃는 가면"으로 바꿔 쓴 아버지를 끌어안고 계시더군요. "살아야지, 힘들어도 버텨야지"...... 세상 아버지들의 독백에 나는, 백기를 들고 말았어요.  처음의 각오, '반드시 가면을 벗기고 말리라' 불타던 전의는 사라지고 말았죠.


너덜 해진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방 문을 열었어요. 향기롭고 따뜻한 방이었어요. 631개의 서랍이 있더군요. 그중 하나, 온기가 전해지는 서랍 하나를 열어 봤어요. "달걀이 따뜻할 동안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기철 시인을 밝혀 놓으셨더군요. 따뜻했어요. "아무리 빛나는 시나 그림도 사람이 없으면 적막하다"시며 "잠시라도 당신 곁의 누군가를 사랑하세요" 라구요. 나는, '암요, 사랑해야지요, 사랑만이 모든 길이니까요'하며 또 하나를 열어 봤어요. 꽃이 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것도 순결의 상징 "백합꽃이 되고 싶다"고요. 벤존슨의 "고귀한 품성"을 펼치고 숨겨놓은 작은 것에 돋보기를 올려놓으셨더군요.  작은 것 좋아하는 내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귀히 보시는 '교수님은 이미 꽃이세요' 하려다 생각했어요. '그동안 하신 말씀과 프로필 사진을 보면 남성임에 틀림없는 교수님께서 꽃이 되고 싶다고요?'  나는, 올려놓으신 돋보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어서요. 그때  알았죠. 남녀노소 불문하고 우리 모두는 꽃이 되고 싶다는 것을요. 누군가의 꽃으로, 누군가를 위한 꽃으로 말이에요. 


꽃 한 송이를 훔쳐 들고 수십 개의 서랍을, 더 열어 봤어요. 갓 태어난 시인, 걸음마를 시작한  시인, 성큼성큼 걸어가는 시인, 시인이란 무대에 올라섰지만 조명한번 받은 적 없는 가난한 시인들의 밥상을 차리고 계시데요. 꽃이 되고싶다하시더니, 꽃 한번 피워보라고  밥을 짓고, 물을 주고 계시더군요. 낯선 이민지에서 넘어야 할 산도, 건너야 할 강도 많지만 제일 힘든 백인이라는 "벽"을 넘어가는 제 손을 잡으시데요.  안신영시인의 "노을 지는 길목"에 앉아 나란히 노을을 바라보시고, 천년이나 된 자신의 사랑을 "변명"이라 명패 붙인 김명철 시인의 흔들림 없는 사랑을 넓은 품으로 보듬어요. 수많은 시인들의 이름 앞에 등잔불을 밝히고, 말없이 밥상을 차리고 계시더라고요. 631번의 밥상이요. 많이도 차리셨어요. 몇 번의 밥상을 더 차리실지는 모르겠어요. 아는 건 단 하나, 글과 삶이 같더라는 거예요.


창고를 털며, 흐물 하고 너덜 해진 내가 다시 요리를 해요. 묽은 반죽을 입혀 야채먼저 튀겨요. 초록빛깔 선명한 브로콜리, 하얀 연근, 샛노란 단호박을 튀겨내요. 다음엔, 다섯 손가락 끝에 반죽물을 묻혀 팔팔 끓는 기름 위에 톨톨 뿌려요.  반죽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위에 새우를 올려요. 꼬리만 빼고 반죽옷을 입은 새우를요. 튀김꽃을 입고 꽃이 된 새우를 앞뒤 좌우 뒤집어가며 튀겨요. 노릇한 색깔이 옅은 브라운색으로 변하면 꺼내야 해요. 튀김옷이 오소소 붙어 눈으로 먼저 먹게 되는 튀김이에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촉촉해요. 이런 꽃 같은 새우튀김, 어떠세요? 재료본연의 맛을 살리면서 식감은 배가 되는 튀김말이에요. 원작은 살리고 시맛은 배가시키신 최용훈 교수님 글맛 같지 않아요?  


한번 피워보라고, 수고했다 다독이며 육 백번 넘게 식탁을 차리신 교수님! 쓰다만 원고를 밀어 두고 간식거리를 찾고 계신 건 아닌지요? 그래서 작은 마음을 준비했습니다. 알록달록한 야채튀김과 민들레꽃빛 노란 새우튀김을 새하얀 접시에 담았어요. 간장에 식초, 레몬, 생강을 다져 넣어 튀김장도 곁들이고.  살짝 느끼할 수 있는 음식이라 와인도 준비했어요. 튀김과 잘 어울리는 스파클링 와인이요. 단맛은 없고 청량감이 뛰어난 스페인산 로저 구라트, 브륏 코랄 로제(Roger Goulart, Brut Coral Rose)로 준비했어요. 차갑게 해서 한 모금 마시면 부드럽고 섬세한 기포가 끊임없이 터지는 기분 좋은 와인이죠. 바싹하고 촉촉한 튀김과 함께 드시고,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나팔꽃이 피는 순간만큼이라도 시원하고 향기로우시길 기도하며, 떨어진 튀김부스러기를 닦고 창을 열어요. 아리엘은 아직도 팬텀 오브 디 오페라를 부르고 있네요.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어, 난 너의 비밀이 알고 싶어, 너의 새로운 선생님은 누구야?".......... 새로만날 선생님, 누굴까요?  



어젯밤 털어다 놓은 "차려진 밥상"이에요. 숟가락만 들고 가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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