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삶이 담긴 생명의 소리
K약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적지는 아끈다랑쉬 오름의 갈대밭. 몸을 덥히는 한낮의 가을볕에 절로 나오는 하품을 삼키는데, 어디선가 후이-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등이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정류장에 와 앉았다. 할머니 옆에는 위태롭게 배를 내민 주황색 책가방이 자리를 차지했다.
휘이이-
전보다 가까이서 불어온 휘파람 소리는 귓속을 찌를 듯이 달려들었다. 오므린 입술 주위로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혀끝에서 나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숨이 가빴는지 말씀마다 고른 숨을 내쉬셨는데, 그때마다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다.
“휘이- 버스 언제 올 거우꽈?”
“할머니, 어디 가시는데요?”
“휘이- 세화 갈 거라.”
“10분 정도 남았어요. 저도 그 버스 탈 건데, 같이 타시면 돼요.”
할머니께서 버스를 기다리며 숨을 다 고르시는 동안,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숨비소리 같아요."
"어떵 알암수꽈?"
"박물관에서 들어본 적 있어요."
할머니는 은퇴한 해녀셨다. '휘이-' 소리는 물질로 일곱의 자식들을 키워내는 동안, 습관이 밴 한숨소리라고 했다. 이제는 늙어서 갈 수 없는 바닷속이 그립다고 하시며, 오늘 처음으로 오조리 포구에서 캔 바지락을 팔러 간다고 하셨다. 학생들이 메고 다닐만한 주황색 책가방 안을 열어 보여주셨는데, 비닐봉지에 담긴 바지락이 한가득이었다. 또 다른 검은색 봉지에는 손톱만 한 보말과 엄지만 한 방게도 있었는데 그건 반찬으로 해 드실 거라고 하셨다.
포구 앞에도 정류장이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나마 읍내로 나와야 물어볼만한 사람들이 다니니까' 30분이 넘게 걸어오셨단다. 다음번엔 큰길 건너 있는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타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총각도 세화가멘?"
“아니요, 전 다랑쉬 가요.”
“기꽈? 게메(그러니까)... 지금 갈대밭이 참 좋쥬게.”
언젠가 가본 적이 있는 갈대밭을 추억하듯 할머니는 수줍게 웃으셨다.
곧 작은 손 가득히 갈대를 움켜쥐었다 펴 보이는 시늉을 하시더니, 튕기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갈대의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어 보이셨다. 그리곤 입을 오므려 진짜 휘파람을 부셨다.
호-오이
정류장엔 사춘기 소녀의 새침한 미소가 나긋하게 울려 퍼졌다.
모니터에 ‘곧 도착’이 깜박였다.
“할머니, 저기 버스 오네요.”
“아이고, 고맙수다양.”
다랑쉬 오름 앞에는 '작은 다랑쉬'인 아끈다랑쉬 오름이 있다.
오름 정상의 갈대밭을 거닐며 한 달 전에 해녀박물관에서 봤던 숨비소리에 대한 영상을 떠올렸다.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해녀들이 물질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소리입니다."
해설사는 그 소리를 가리켜 ‘숨비소리’라고 불렀다. 영상에서는 물질하는 해녀의 사진과 함께 자막이 이어졌는데, 꼭 숨비소리에 대한 한 편의 시 같았다.
<제주 숨비소리길 中>
누가 바다를 보면 가슴이 트인다 했는가
턱 밑까지 올라온 슬픔 억누르고
한계를 이겨낸 뒤 내뱉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생명의 소리
한평생을 자맥질 해 내려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숨비소리 한 번에 자식을 키웠고,
숨비소리 두 번에 부모를 모셨다
그녀의 바다는 어떤 모습인지
그녀의 소망을 제주 바다에 새긴다,
그녀의 슬픔 망사리에 담아 올린다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희망의 햇살이 눈부신 그곳으로 간다
물 밖으로 내쉬는 숨비소리가
허공에 흩어진다
힘든 물질 끝에 숨비소리는 바닷속만큼 깊다
또다시 물속으로 머리를 디민다
더 깊이 더 깊이
숨비소리는 해녀의 노래가 되어
제주의 바람이 되어
푸른 꿈의 모습으로 날아오른다
*영상 링크: 해녀뮤지엄 유튜브 <제주 숨비소리길>
쏴쏴ㅡ
일제히 쓰러졌다 일어서는 갈대밭의 군무에 파도소리가 퍼져나갔다.
오름 너머 바다에서 생명의 숨비소리 같은 할머니의 한숨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언젠가 이곳에 맴돌았을 사춘기 소녀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갈대밭을 거닐던 새침한 소녀의 휘파람 소리
바다의 무게를 이겨내고 내뱉는 해녀의 숨비소리
바지락을 짊어진 할머니의 한숨 소리
모두 한 명의 삶이 담긴
생명의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