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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May 29. 2024

수박-우리의 여름은 시원했다

여름의 한 쌍 ① 수박과 모기: 가장 좋아하는 것과 가장 혐오하는 것

주말 아침, 동네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아이들이 양념에 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꽤 맛있었던 양념목살갈비를 사다가 구워주기로 했다.      


집안일로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차에 타니 여름 햇살이 아침부터 따갑다. 인후염이라 차 에어컨을 못 틀고 습하고 후끈한 공기에 몸을 노출하니 채 5분도 되지 않아 속옷 주위로 땀이 배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은 5월인데….     


한산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다. 흡사 찜통 뚜껑을 열고 꺼낸 만두가 된 내 얼굴에 태양의 열기를 실은 바람이 훅 끼쳤다. 지상 주차장에서 마트까지 20여 미터를 잰걸음으로 완주했다. 마트 출입문에 달린 자동 열림 버튼을 왼손으로 눌렀다. 마트의 자동문이 뜨거운 햇볕을 반으로 쪼개 그 속에서 내 몸을 꺼낸 뒤 신비의 냉장고로 집어넣었다.      


땀의 흔적이 동그랗게 배어 있을 검정색 반팔 티셔츠 겨드랑이에 청량한 바람이 들어왔다. 내 팔이 자동으로 몸통에서 30도 각도로 들려 올라갔다. 팔이 올라가자 손이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앞에서 뒤로 쓸어 넘겼다. 그래도 이마에서 코까지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여름엔 마트만 한 피서지가 없지.     


서둘러 장을 봐야 한다는 조급함이 순간 사라지고 내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자리를 잡았다.      

마트 출입구에서 여유를 맛보다 (사진: 픽사베이)

어디 한번 둘러봐?     


더위로 뾰족해질 뻔한 마음이 마트의 청량 바람에 뭉툭해진 걸까? 사야 할 것이 있으면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방향을 향해 직진하는 1분 쇼핑인(shopping + 人: 외래어와 한자어의 조합이라니 크크 웃음이 난다)인데 솔깃 이런 생각이 났다.      


출입문에서 왼쪽 정육 코너까지는 일곱 걸음이면 된다. 이 시간에는 양념목살갈비가 있겠지, 지난번에는 늦게 갔더니 떨어지고 없어서 울상 짓고 돌아왔다구. 지금 시각은 이제 막 만든 반찬들로 진열장이 빽빽하게 차 있을 터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평소와 달리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아직 남은 다섯 걸음을 웬일인지 아끼고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운 핑크빨강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데 왠지 속살을 본 것만 같아 괜히 부끄러워지는 색. 곱디고운 색이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가 있었다.      


색의 주인은 분명했다. 여름과일의 대명사, 여름과일의 황제, 여름을 제패한 금메달리스트. 바로 수박이었다. 그런데 왜 그리 낯설게 느껴졌을까. 작년여름만 해도 내가 단골로 가는 이 마트에서 판매했던 수박은 초록색이었다. 명도 높은 검은색 줄무늬가 당당하게 그어져 있는 짙은 초록. 그 동그란 물체를 보고 나는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았고, 이 달콤한 과즙이 지방기 없는 내 볼을 빵빵하게 채우도록 허락했고, 그리하여 여름이 꼭 나쁜 계절만은 아니라고 마음의 품을 넓혔다. 내가 사랑하는 과일. 한 입 베어 물면 절로 미소가 번지고 살며시 눈을 감게 되는 음식. 입맛이 없을 때면 더욱 애타게 그리워지는, 내게 행복을 주는 과일이다.     


그런데 수박의 가장 큰 단점은 무겁고 손질하기 번거롭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손목과 손가락 관절염이 있는 나로서는 수박을 드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마트에서 트렁크에 싣기까지, 트렁크에서 집까지, 집 현관에서 주방 싱크대까지 그것은 돌덩이였다.     

장미의 가시가 수박의 껍질이어라 

어찌어찌 돌덩이를 집 안으로 들였다 치자. 마법사의 도움으로 돌덩이가 씽크대 안까지 들어갔다고 하자. 그걸 씻어 도마에까지 다시 올렸다고 하자. 그다음은?     


모두가 눈에 그리는 그 광경이 펼쳐진다. 칼을 대니 수박이 반으로 갈라진다. 신선한 분홍의 속살이 드러난다. 커다란 그 살점들을 먹기 위해서는 큰 반구를 반으로 자르고 잘라 속살을 납작하고 기다랗게 만든 뒤 큐브 모양이 되도록 잘라야 한다. 도마 위에서 단물은 질질 흘러 바닥에 똑똑 떨어지고 줄무늬 초록 껍질은 산처럼 쌓이는데, 그걸 담으려면 작은 봉지로는 안 되고 커다란 비닐봉지가 필요하다. 어째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많다, 싶지만 분홍 큐브를 보관할 락앤락 통을 찾으면 딱 맞는 큰 통이 없고 자잘한 것 몇 개만 있어서 눌러 담아도 남는 게 많아 그 자리에서 그걸 다 먹어 치우다 보면 어느새 배가 산만해진다. 발바닥은 단물이 말라 끈적거린다.     


이런 한 차례 노역을 끝내고 나면 ‘아, 다시는 수박 안 사 먹어야지.’ 굳게 다짐하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이 그렇게 호락호락 짧게 끝나지를 않는다. 사람 약 올리듯 자꾸만 찔러보는 5월 더위가 지나면 대놓고 본성을 드러내는 6월 더위가 이어지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사납고 난폭한 7월 더위가 흐물거리는 내 몸을 조종한다. 막바지 복더위를 쏟아내는 8월이 되면 김치냉장고 속 사방에 낀 성애를 보며 하릴없이 한겨울 눈썰매장을 상상한다.     


이렇게 더우니 반이나 빈 김치냉장고 속에서 김치 대신 자리를 잡고 앉아 시원~하게 자기 몸을 관리한 수박 큐브가 간절히 맛보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아, 어쩐다. 먹느냐 참느냐 희대의 고민 앞에서 내 미간주름은 깊어만 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주말이라 한가하게 쉬는 남편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신랑~.”

평소와 다르게 말끝을 길게 늘이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남편은

“왜, 뭔데. 무서워.” 한다.

“수박이 먹고 시포요.”

내 혀 짧은 소리에 남편은 질색을 하며 소파에서 얼른 일어나 피한다. 그렇게 부인을 피한다고 피했지만 남편은 작년 여름 2주에 한 번씩 커다란 수박통을 손질해 먹음직한 수박 큐브를 만들어 락앤락 통 다섯 개에 담아 보관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여름은 애꿎은 아이들 아빠가 주말마다 수박통 쪼개느라 땀 삐질거리는 계절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의 수고에 미안함이 쌓이자 수박이 값도 오르고 단맛도 사라지는 초가을에 들어설 때쯤엔 내가 먼저 “수박 그만 먹어야겠다” 했다.      

드디어 네가 조금 손 닿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수박 큐브는 그러므로 내게 매우 귀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내 짧아진 혀와 수박씨보다 커다란 남편의 땀방울이 합해져 탄생한 결정체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제는 하얀색 상자에 담겨 랩으로 몸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질질 분홍색 침을 흘리고 있지도 않고 단단한 껍데기도 없이 말이다. 그것은 두 아이와 내가 한 번 먹기 딱 적당한 양이었다. 가격도 5000원. 출장 간 남편에게 아무리 혀 짧은 소리를 낸들 가질 수 없는 수박 큐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하나를 집었다.     


아이들에게 수박을 내놓으니 올해 첫 수박 큐브에 눈을 빛낸다. 후식으로 수박만 한 게 없지.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여름의 수박을 기다렸나 보다. 목살갈비구이보다 더 순식간에 큐브가 사라졌다.      


나는 다음 날 5000원 수박 큐브를 사러 다시 마트에 갔다.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나의 몸도 자동으로 왼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제의 매대 앞에 섰다. 

헉, 이게 뭐지? 우리의 큐브 상자는 없었다. 아무리 고개를 휘휘 둘러보아도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매장 직원에게 물었다.     


“그거 없어요?”

말도 어눌하게 못하는 손님이 손가락으로 매대 위만 가리키자 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아, 자른 수박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큰 소리로 “네!” 대답했다.

“지금은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자 손님에게 직원은 달래듯이 이렇게 물었다.

“손질해 드릴까요? 원하는 수박을 카운터에서 계산하시면 잘라서 드릴게요.”     


나는 아이처럼 울상을 멈췄다. 그리고 가격표를 스캐닝했다. 5000원짜리 가격표는 없었다. 제일 싼 게 9000원이었다. 수박통을 반으로 자르고, 그 반구를 3분의 1로 자른 크기였다. 

예상한 가격이 아니라 돌아설까 했지만, 출장에서 돌아올 남편에게 이번에는 내가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9000원짜리를 들어 직원에게 건넸다. 상자 두 개 양은 되겠지….     


직원은 손질대에 가서 큼지막한 식칼을 들었다. 그리고 수박을 잘라 나갔다. 어제와 같은 크기와 모양의 하얀색 상자를 꺼내 거기에 잘라진 큐브를 담았다. 그런데…. 큐브는 하나의 상자로 끝났다. 이럴 수가. 나는 수박 껍질에 달라붙어 있는 핑크색 살들을 가리키며 “저것들도 다 잘라서 주세요.” 했다. 직원은 상자 하나를 새로 꺼내어 흰살이 달라붙은, 모양도 큐브가 아닌 납작이들을 그곳에 담았다. 상자는 랩이 아까울 만큼 빈 공간이 많았다.     

남편의 정성은 아무리 쪼개도 작아지지 않는다

집에 와서 장바구니에 담긴 두 개의 상자를 꺼내는데 새삼 남편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에 출장에서 느지막이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수박 상자를 권했다.     


“신랑, 이거 얼만 줄 알아요?”

“비싸겠지.”

“저기 옆 동네 마트에 가면 한 통에 16000원으로 세일한대요. 우리 주말에 그거 사러 가자.”

“그래.”     


아무래도 올해 남편에게 내가 서비스할 수박은 이것으로 끝인 것 같다. 다른 음식으로 대접하면 되지. 남편도 수박을 손질하는 일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노고로 가족들이 볼 볼록, 배 불룩 맛있게 수박을 먹는 걸 보면 기쁠 것이다, 라고 부인은 오늘도 이기적으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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